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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독립 주민투표, 스페인 좌파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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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독립 주민투표, 스페인 좌파의 고뇌

[장석준 칼럼] 시험대에 선 유럽 좌파

작년 가을에 나는 이 지면에서 스페인의 중도좌파 사회주의노동자당(PSOE)에 벌어진 당 내 쿠데타를 다룬 바 있다(☞관련 기사 : "브라질 이어 스페인도 '우파' 쿠데타한국은?"). 이 당의 젊은 대표 페드로 산체스가 급진좌파인 우니도스 포데모스(포데모스가 다른 좌파 세력들과 결성한 선거연합)와 연립정부를 결성할 가능성을 열어놓자 당 내 거물들이 산체스를 공격해 물러나게 만들었다. 산체스를 몰아낸 사회주의노동자당 의원단이 묵인해준 덕분에 우파 인민당(PP)이 소수파 내각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당원들이 뽑은 대표를 원로와 의원, 고위 당직자들이 몰아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2016년에 영국 노동당에서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의원단의 불신임을 받아 대표 선거를 다시 치른 사례와 판박이였다. 심지어는 결말까지 같았다. 코빈이 당원들의 지지를 더욱 늘리며 대표에 재선돼 올해 조기 총선에서 혁혁한 성과를 낸 것처럼, 지난 6월에 실시된 대표 선거에서 당권에 재도전한 산체스가 당당히 승리했다. 엘리트들의 쿠데타에 맞선 당원과 지지자들의 승리였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산체스 노선으로 돌아옴으로써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의 인민당 소수 정부는 마치 테레사 메이 총리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과 민주통합당(북아일랜드 극우정당)의 불안정한 연립정부처럼 언제 불신임 당할지 알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포데모스가 선명성 경쟁을 벌이며 우파 정부를 협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스페인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마드리드 의회가 아니다. 바르셀로나가 주도인 카탈루냐다. 카탈루냐 지방정부는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할지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10월 1일에 실시하겠다고 천명했다. 라호이 총리의 중앙정부는 이 움직임에 강경일변도로 대응하고 있다. 급기야는 주민투표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중앙정부 경찰이 카탈루냐 지방정부를 급습해 투표용지를 압수하고 지방정부 각료들을 체포하기까지 했다.

군대만 동원하지 않았지 내용은 거의 내전이다. 3년 전에 같은 유럽연합 국가였던(지금은 아니게 됐지만)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가 평화롭게 진행됐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어쩌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아니, 그 전에 왜 하필 지금 카탈루냐에서 분리 독립 요구가 치솟게 된 것인가? 카탈루냐를 비롯한 스페인 전역의 진보좌파는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유서 깊은 카탈루냐 민족주의

카탈루냐인들은 스페인어(정확히는 카스티야어)와는 다른 독자 언어를 사용한다. 카탈루냐어도 카스티야어처럼 인도유럽어의 로망스어군에 속하지만, 카스티야어보다는 프랑스어에 가까운 점이 많다고 한다. 언어를 민족을 가르는 중요한 지표로 본다면, 카탈루냐인들은 분명 스페인의 여타 지역 주민들과 다른 민족이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11세기에 카탈루냐인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2~13세기에 인근 왕국들과 구분되는 독자 정치 질서가 수립됐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미 르네상스 초기에 카탈루냐인의 민족 정체성이 굳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도 민족 형성이 빠른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상업 부르주아지가 일찍부터 성장한 결과였다.

18세기에 들어서서야 카탈루냐는 스페인 왕국에 완전히 통합됐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합병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카탈루냐도 오랜 저항 끝에 주권을 상실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카탈루냐인들이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주민투표 실시를 보며 들썩이기 시작한 사정도 이해할만하다. 300년만에 주권을 되찾으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바람에 근거가 있다면, 지금 카탈루냐인들의 움직임도 그러하다.

실은 카탈루냐의 근대 민족주의는 스코틀랜드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됐다. 스페인을 공화국으로 바꾸려 한 첫 번째 시도인 1868년 혁명 와중에 카탈루냐인들은 자유주의 연방공화국 안에서 자치를 보장받길 원했다. 이것이 매번 스페인 전체의 변혁과 연동해 폭발해온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시작이다. 이후 마드리드에 반동적 왕정이 복구된 뒤에도, 아니 오히려 이 때문에 더욱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지지층을 넓혀갔다. 카탈루냐가 스페인 다른 지역보다 훨씬 일찍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점도 민족주의 성장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봄은 20세기 초에 다시 한 번 스페인의 전국적 혁명과 더불어 찾아왔다. 1920년대에 마드리드에 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서서 변화의 열망을 짓밟자 카탈루냐에서는 민족주의와 공화주의, 사회주의를 결합한 '좌파' 민족주의가 대두했다. 1931년 드디어 왕정이 무너지고 두 번째 공화국이 수립될 무렵,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카탈루냐 공화주의좌파(ERC)'를 창당했다. 이해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공화주의좌파는 압승을 거뒀다. 류이스 콤파뉴스가 수반을 맡은 카탈루냐 자치정부가 출범했다.

1936년 스페인 총선에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공화파부터 사회주의노동당, 공산당에 이르는 좌파 선거연합인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선거에 승리한 인민전선은 카탈루냐에 전례 없는 자치를 허용했다. 마드리드의 좌파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공동 운명체가 됐다. 반대로 인민전선에 맞서 내란을 일으킨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은 '스페인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카탈루냐, 바스크 등의 분리주의자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내전은 결국 인민전선 정부의 패배로 끝났고, 이는 곧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종말을 뜻했다. 프랑스로 망명하기 직전에 콤파뉴스는 상징적으로 카탈루냐의 독립을 선언했다. 콤파뉴스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나치 독일 점령군에게 체포돼 스페인에 송환된 뒤 잔인한 고문을 받다 숨졌다. 수많은 카탈루냐인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이 느닷없다 여기는 이들은 이런 피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경제 위기 이후 불붙은 분리 독립 여론

민주화 이후 1978년 헌법에 따라 스페인 각 지방에는 제한된 자치권이 부여됐다. 카탈루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80년 첫 번째 지방선거의 승자는 프랑스에서 카탈루냐 망명정부를 자임해온 공화주의좌파가 아니었다. 조르디 푸졸이 이끄는 우파 선거연합 '일치와 통합(CiU)'이었다. 이때부터 2003년까지 장장 23년간 푸졸이 카탈루냐에서 장기 집권했다.

'일치와 통합'은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마드리드와의 관계에서 공화주의좌파에 비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물론 자치를 강화하려 했지만, 공화주의좌파처럼 공공연히 분리 독립을 외치지는 않았다. 이는 '일치와 통합'이 오랫동안 여당 자리를 지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치 지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3년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일치와 통합'이 야당으로 밀려났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카탈루냐 자매정당인 카탈루냐 사회당(PSC)이 공화주의좌파 그리고 카탈루냐의 지역 녹색정당인 '카탈루냐 녹색이니셔티브(ICV)'와 좌파 연립정부를 결성했다. 우파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사회 개혁을 열망한 민심에 따른 정권 교체였다. '일치와 통합'으로서는 뭔가 혁신이 필요했다.

몇 년 뒤, 2008년에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다. 스페인은 정부가 나서서 부실은행을 살리다가 재정 위기 국가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처럼 스페인도 유럽연합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그 전제조건으로 긴축 정책을 강요받았다. 이에 맞서서 2011년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분노한 자들' 운동이 벌어지고 이 운동이 정치세력화해 포데모스가 등장한 이야기는 우리한테도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다.

카탈루냐도 당연히 중앙정부 재정 위기와 긴축 기조의 압박을 받았다. 이 무렵 '일치와 통합'을 이끈 아르투르 마스는 정권을 탈환하고 경제 위기에 맞서기 위해 그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기피하던 분리 독립 카드를 꺼내들었다. 2010년에 집권에 성공한 마스는 분리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실시를 공언하기 시작했다. '일치와 통합' 안에서도 이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카탈루냐 부르주아 진영도 찬반이 갈렸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부터의 분리 독립 시도에 아래로부터의 민심이 화답하면서 새 국면이 열렸다. 카탈루냐 인구 750만 중 100만 명 넘게 참여한 2012년 9월 11일의 독립 요구 시위가 분수령이었다. 9월 11일은 1714년에 카탈루냐가 스페인군에 마지막으로 항복한 날로서 카탈루냐인들에게는 민족 기념일이다.

카탈루냐인들의 시위는 당시 한창 뜨겁던 스페인 전역의 반긴축 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 좌파들도 그렇게 봤다.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거리에 나선 카탈루냐인들은 '독립'을 외치면서 민족 감정만 표출한 게 아니었다. '독립' 함성 안에는 고리타분한 왕정, 스페인 경제를 망친 금융 재벌, 부패한 마드리드 정치세력들을 향한 분노가 응축돼 있었다. 이후 카탈루냐 각급 선거에서 분리주의 입장인 공화주의좌파뿐만 아니라 비분리주의 입장인 여러 급진좌파 세력들이 약진한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 주거권운동가 아다 콜라우의 바르셀로나 시장 당선이다. 콜라우는 '바르셀로나 엔 코무(BComú, '공유도시 바르셀로나'라는 뜻)'라 이름 붙은 선거연합의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는 카탈루냐의 급진좌파들이 총결집하다시피 했다. 위에 언급한 녹색이니셔티브와 전국적 녹색당인 에쿠오(Equo)의 카탈루냐 지부, 좌파연합(스페인 공산당이 속한 정당연합)의 카탈루냐 자매조직인 연합대안좌파(EUiA), 포데모스의 카탈루냐 조직인 포뎀이 여러 사회운동 세력과 함께 했다.

지방선거에서 제1당이 된 '바르셀로나 엔 코무'의 시장 후보 콜라우는 바르셀로나 시의회 내 다른 좌파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시장에 최종 선출됐다. 콜라우가 시장에 취임하자마자 단행한 조치 중 하나는 시청에 설치된 스페인 전 국왕 흉상의 철거였다. 그녀를 당선시킨 카탈루냐 민심의 정확한 표출이었다.

주민투표일이 다가올수록 깊어지는 스페인 좌파의 고뇌

분리 독립 주민투표가 실제로 정치 일정에 오른 계기는 2015년 9월에 실시된 지방정부 조기 선거였다. 이때 카탈루냐 정치 지형이 완전히 분리주의 대 비분리주의로 나뉘었다.

분리 독립을 놓고 '일치와 통합'의 내분이 계속되자 마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새로운 선거연합을 결성했다. 이번에는 전통적인 분리 독립파인 공화주의좌파와 함께 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좌우합작이라 할만하다. 선거연합의 이름은 '준스 펠 시(JxSí, '[독립] 찬성을 위해 다함께'라는 뜻)'. 이들은 조기 선거에서 39.6%를 얻으며 일단 제1당(135석 중 62석)이 됐다.

그러나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준스 펠 시'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분리주의 정당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로, 8.2%를 얻어 10석을 획득한 '인민연합 후보단(CUP, 이하 인민연합)'이었다.

인민연합은 흥미로운 정치세력이다. 카탈루냐 전역에서 대안세계화운동, 빈집점거운동, 사회센터(민중의 집의 현대판) 활동 등을 벌이던 젊은 세대 운동가들 중에서 카탈루냐의 아나키즘, 공산주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이들이 2000년대 초반에 만든 조직이다. 이들은 중앙정치 무대에 포데모스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카탈루냐 안에서 당원들(활동가 성격이 강한 2천여 명의 소수 정예로 이뤄져 있다)의 참여와 숙의로 움직이는 새로운 정당 실험을 펼쳤다.

인민연합은 결성 당시부터 가장 강경한 분리 독립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준스 펠 시' 정부의 등장이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실제 추진할 절호의 기회라 보았다. 그래서 구 정치인인 마스 말고 다른 이가 정부 수반이 되는 것을 전제로 '준스 펠 시' 정부 출범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마스 노선을 이어받은 카를레스 푸지데몬이 이끄는 새 정부가 구성돼 분리 독립 주민투표를 밀어붙이게 됐다.

글 첫머리에 소개한 것처럼, 이러한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움직임에 라호이 총리의 인민당 정부는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전례에 따라 평화롭게 주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카탈루냐 측의 협상 제의를 묵살하고 헌법 위반이라고만 한다. 사실 인민당에게 카탈루냐 사태는 소수파 정부의 명줄을 이어갈 더 없이 좋은 핑계거리다. 대립을 격화시켜서 위기를 조장할수록 정부의 붕괴를 뒤로 미룰 수 있다.

이런 마드리드의 강경 대응이야말로 지금 카탈루냐인들의 투지를 자극하는 핵심 요소다. 왕실, 정부, 경찰, 군대, 헌법재판소, 중앙 언론이 총동원돼 카탈루냐를 포위할수록 카탈루냐인들은 과거의 비극적 역사, 최근의 긴축 반대 운동을 떠올리며 주민투표 강행 의지를 불태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카탈루냐 분리 독립에 찬성하는 의견은 여전히 50%에 미치지 못하지만, 70%가 넘는 압도적 다수가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주민투표는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주민투표는 어느덧 우파 중앙정부에 맞서는 상징적 행위가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민투표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스페인 좌파 세력들은 고민이 깊어만 간다. 카탈루냐를 바라보는 카탈루냐 바깥의 좌파만 그런 게 아니다. 카탈루냐 안에서도 비분리주의 좌파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는 중이다.

분리주의 진영 안의 온건좌파와 급진좌파라 할 수 있는 공화주의좌파와 인민연합의 입장은 물론 주민투표 강행이다. 두 당은 주민투표를 실시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구속력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인민연합은 2015년, 2016년 연달아 실시된 총선에서 포데모스의 득표율이 20% 대에 머문 점을 지적하면서 현재의 스페인 국가 골격 안에서 사회 세력 관계가 크게 바뀌어 변혁이 시작되기는 어렵다고 결론 내린다. 반면 독립 카탈루냐 공화국에서는 급진좌파가 충분히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정반대 쪽에 사회주의노동자당-카탈루냐 사회당이 있다. 이들은 인민당과 마찬가지로 주민투표 실시 자체에 적극 반대한다. 카탈루냐 사회당은 주민투표 참가 보이콧을 조직하고 있다. 다만 산체스 체제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주민투표 정국이 끝난 뒤에 좌파 간 협력을 재개해야 하니 감정의 앙금만은 남기지 말라고 덧붙인다는 점 정도다.

이런 두 입장 사이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마드리드 중앙의회의 우니도스 포데모스와 카탈루냐 안의 급진좌파들이다. 논쟁의 무대는 '카탈루냐 엔 코무'다. 바르셀로나 엔 코무가 지방선거 성공 뒤에 카탈루냐 전역으로 확장한 것이 카탈루냐 엔 코무다. 참여조직 중 포뎀을 제외한 조직들은 모두 '카탈루냐 우리는 할 수 있다'(본래 '포데모스'가 '우리는 할 수 있다'의 줄임말이다)라는 정당연합으로 뭉쳤고, 포뎀만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정당 간 연합이 활성화되지 않은 우리 정치문화에서는 낯선 조직 형태다.

아무튼 카탈루냐 엔 코무 안의 입장은 둘로 나뉜 상태다. 우선 기왕에 예정된 주민투표를 인민당 중앙정부에 맞서며 카탈루냐 인민의 자결권을 과시하는 집단행동으로 만들되 투표에는 기권하자는 입장이 있다. 우니도스 포데모스의 두 젊은 지도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와 알베르토 가르손이 카탈루냐 동지들에게 이런 대응 방향을 권고하고 있다.

또 다른 입장은 투표에까지 적극 참여하자는 것이다. 다만 투표 결과에 구속력은 없다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분리 독립 찬성이 다수로 나오더라도 즉각 독립을 선포하기보다는 이를 바탕으로 자치를 더욱 강화하고 스페인을 완전한 연방국가로 바꾸는 노력에 나서자는 것이다. 아다 콜라우의 바르셀로나 시정부는 처음에 주민투표에 회의적이었지만 마드리드의 탄압이 거세지자 이 입장으로 기울었다.

전국적 변화의 전망만이 분리를 막을 수 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이야 카탈루냐 안에만 시야를 고정해도 되겠지만, 스페인 전역을 무대로 삼은 좌파는 그럴 수 없다. 카탈루냐 주민투표가 카탈루냐인들의 정당한 자결권 행사라 하더라도 이를 바라보는 스페인 다른 지역 주민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구는 스페인 전체의 15%이지만 국내총생산은 20%를 차지하는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이 지배 엘리트에게만 걱정거리인 것은 아니다. 타지역의 민중들도 이를 상대적으로 부유한 카탈루냐 주민들의 경제적 이기주의로 보곤 한다. 분리 독립 쪽이 다수인 투표 결과가 나오면 자칫 카탈루냐의 이탈을 무력으로 막자는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10월 1일을 어떻게든 넘겨보려는 수준을 넘어 현 사태를 해결하려면, 결국 분리 독립 민심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 사태의 핵심에는 불완전한 민주화에 그친 1978년 헌법 체제, 신자유주의의 유산에다 긴축이라는 재앙까지 겹친 경제 상황, 연방국가로 나아가길 한사코 거부하는 마드리드 엘리트 주도의 국가 구조 등등이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대중의 인식이 있다. 이런 장애물들 앞에서 카탈루냐 민중은 분리 독립이라는 탈출구를 찾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한 가지뿐이다. 이제라도 전국적 변혁의 전망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우니도스 포데모스와 산체스 체제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역사적 책무다.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차단할 유일한 길이 제러미 코빈의 노동당이 집권하는 것이듯, 스페인에서도 좌파 대중정치가 인민당 정부를 대체할 때만 카탈루냐 분리 독립의 급물살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정치 국면에서 핵심은 늘 '속도'다. 역사가 더욱 나쁜 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개입하는 좌파의 속도전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거의 한 세기 전, 그러니까 1930년대에 유럽 좌파는 이 전장에서 참혹하게 패배했었다. 이제 그 시험이 그때의 무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 카탈루냐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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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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