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그 부모가 함께 탔다. 아이가 우편함에서 꺼내온 전단을 들고는 읽는 척을 한다. 두 손으로 전단지를 쥐고 눈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린다. 아이가 하는 짓이 귀엽기도 했지만, 전공자의 오지랖을 참지 못한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이한테 프린트 콘셉트(print concept. 인쇄물에 사용되는 구성요소, 조직, 원리 등을 이해하는 능력. 글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직된다는 것이나 각 단어가 말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책장을 넘기는 행위 등을 말한다)가 있네요."
순간 부모의 눈빛이 반짝하더니,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로 "네? 우리 아이한테 뭐가 있다고요?" 하고 되물었다. 마침 자신들이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했는데도 문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나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아, 괜히 오지랖을 부렸구나 싶었지만 "이제 아이에게 읽기를 가르치셔도 되겠어요" 하고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닫혀가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자기 아이에게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부모의 눈빛이 비집고 들어온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마치 '매직 워드'라도 들은 것 같은 부모의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다. 아이는 읽어야 할 나이가 되어서, 읽기 전에 보이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였고, 리딩 전공자(정확히는 리터러시 전공자)인 나는 무심코 '아, 책에서 읽었던 그 행동이네' 하며 반가운 마음에 오지랖을 떤 거였다.
저 아이도 부모도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나이에 맞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읽기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지점은 다른 데 있다. 만 4〜5세가 문자 읽기 교육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기임에도 이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게 아닌 세태가 바로 그 안타까운 지점이다. 돌이 되기 전부터 방문교사가 찾아오고, 두 돌이나 세 돌이 되면 학습지를 풀며 문자 읽기를 배우는 것이 문화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십몇 개월쯤 된 조카가 학습지 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방문 교사가 아기를 앞에 앉혀두고 그림을 보여주며 외쳤다. "코알라가 나무에서 쿵! 떨어졌어요!" 하면서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을 치면, 아기는 따라서 바닥을 치며 "쿵!" 한다. "코끼리는 코가 기〜일쭉 해요"라며 코에 손을 대고 길게 늘이는 시늉을 하면 아기는 "기〜일뚝"이라고 서툰 발음으로 따라 하며 코에 손을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몇 번 반복을 하며 아기는 코알라라는 말에는 "쿵!"이라고 반응했고, 코끼리라는 말에는 "기〜일뚝"이라고 반응했다. 그러면 부모는 아기가 무언가를 배웠다며 좋아했다.
나는 그걸 보면서 의아했다. 외려 머릿속엔 끔찍한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그 학습지를 하는 아기들이 2만 명이라면, 그 2만 명의 아기들은 "코알라가〜"라는 말만 들으면 모두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반응할 것이다. 자못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한 가지 자극에 모두 동일한 단어 하나로 반응하는 2만 명이 넘는 아기들이라니. 코알라를 처음 본 아이가 자신만의 의성어나 의태어로 표현하게 두면 안 될까? 왜 '코알라=쿵!'으로 틀에 넣고 찍어내듯 언어를 통일시키고 그 언어에 따라오는 사고도 통일시켜야 하는가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어 중에서도 특히 '문자언어'는 사람의 사고를 제한하는데 말이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유형은 사람마다 다르다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이를 보고 반가웠던 건, 아이는 읽기를 시작하기 전에 발달되어야 하는 사전 기술(pre-reading skills)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술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프린트 콘셉트를 통해 드러났으므로, 이제 읽기를 가르쳐도 되겠다고 말한 것이다. 십몇 개월 된 아기에게 일찍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왜 무리수인가 하면, 읽기 사전 기술이 완성이 되지 않은 아기들의 인지 능력에 감당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마땅히 거쳐야 하는 인지 발달이 보이면, 그때 읽기를 가르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보통 아이들이 문자를 익히기 시작하기 좋은 나이는 만 4〜5세이다. 빨라도 만 3세 반이라고 보면 된다. 아이가 흥미를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알아서 문자를 익히는 경우, 부모가 그냥 거들어주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문자를 익히는 최적의 시기가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음성언어 능력은 선천적이지만 문자언어 능력은 후천적이라서, 읽기란 인간 집단에서 태어난 새로운 개체가 학습을 통해 익혀야 하는 기술이다. 문제는 그 각각의 개체는 능력치가 다르고 강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세상을 인지하는 감각의 강도도 다르고, 인지 채널도 다르며, 그걸 소화해내는 두뇌의 능력도 다 다르다. 신체 발달의 속도가 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만 3세 반,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5세에 혼자서 한글을 깨치며 읽기 시작한 케이스다. 그러니까 '일반적'이라 규정되는 범주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누군가 억지로 가르쳐서가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기만의 틀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으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나 역시 다른 이들을 가르쳐보기 전까지, 그리고 아이를 낳아 길러보기 전까지 몰랐다. 사람들의 학습 유형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학습 유형에는 크게 시각형, 청각형, 그리고 감각형(신체 활동형)이 있다(읽기 및 쓰기형 학습 유형을 별도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가 말한 다중지능 중 언어지능이 발달한 사람이 바로 읽기 및 쓰기형 학습자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인지하고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 채널이 문자언어인 사람들을 말하는데, 혼자 글을 터득한 나 역시 이 학습자 유형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내 아이를 키워보니, 다른 인지 채널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행 교육시스템은 언어수리 지능이 뛰어난 학습자들에게 유리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 안에서는 다른 지능이 뛰어나거나 다른 인지 채널로 세상을 파악하는 이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초등학교 시기에는 더 그러하다. 성인이 될수록 지속적인 교육 효과로 읽기와 쓰기 유형의 학습에 익숙해져서 학습 유형 간 차이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 대한 고찰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다른 지능과 다른 인지 채널, 그래서 다른 강점을 가진 아이들은 행복한가? 이건 한 유형의 학습자들에게만 유리한 교육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지, 다른 유형의 학습자들이 모두 현행 교육시스템에 맞춰야 하는 건 아니지 싶다.
교육시스템을 바꾸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학습이 어떻게 바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사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간의 정보 습득 채널은 이미 많이 바뀌었다. 태어나서부터 인터넷 세상을 경험해온 세대들을 '디지털 원어민'이라 부르고, 주로 종이책이나 문서로 정보를 습득하다가 인터넷으로 이행해온 세대들은 '디지털 이민자'라고 부른다.
현재 10대와 20대는 주로 스마트폰으로 서로 연결하며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데, 이들이 웹에서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성세대와는 사뭇 다르다.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을 이미지에 비유해본다면, 디지털 이민자들의 방식은 파워포인트(PPT)를 이용한 프레젠테이션과 흡사하고, 디지털 원어민인 어린 세대들의 방식은 프레지(prezi)를 이용한 프레젠테이션과 비슷하다. 슬라이드가 한 번에 하나씩 직선적(linear)으로 움직이는 파워포인트는 논리적이고 질서 정연하나 경직되어 있고 일방적이다. 그러나 프레지는 정보가 담긴 슬라이드가 방사형으로 배치되어서 동시에 사방으로 확산되며, 정보는 직관적으로 전달되면서 'Ctrl C+V(복사해 붙여넣기)'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된다.
문자세대는 순차적, 직선적인 사고 전개를 하며 인식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데에 반해, 영상세대는 직관적, 방사형의 사고를 하며 인식의 세계를 누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문자언어의 직렬 논리 구조와 다르다. 정보를 깊이 탐구하고 파헤치고 인식을 벽돌 집 쌓듯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실시간 정보를 검색하고 사람들과 연결한다. 즉자적이고 직관적이지만 깊이 없는 정보를 누리는 핑거팁(fingertip)세대들인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테크놀로지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2035년이 되면 인간의 머리에 나노칩을 이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지식을 고통스럽게 외워 머릿속 장기 기억으로 밀어 넣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제 인간의 몫은 저장된 정보를 필요대로 불러내어 이를 가공하고 연결하며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고 창조하는 일이다. 이러한 정보 접근 방식은 아마도 우리의 존재를 바꿀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과거의 예를 보면 극적으로 바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 이행하면서, 그러니까 입으로 전해지던 정보를 문자로 적을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두뇌도 바뀌었다. 음성언어로 정보를 전달하던 구전시대 사람들의 기억력이 문자언어시대 사람들의 기억력보다 훨씬 더 좋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 유선전화 시절에 우리가 전화번호를 몇 개씩 외우고 살았는지 한번 떠올려보자. 십여 개는 기본이었고, 많게는 수십 개까지도 외우고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저장된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되는 시대에 살다 보니 이따금 자기 전화번호도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정보를 다루는 방식이 변하면 우리의 존재 양식도 변한다.
더 이상 무언가를 외워서 학습할 필요 없이 머릿속에 이식된 칩에서 불러내기만 하면, 정보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문자언어 읽기(더 나아가 외우기)를 통해 고통스럽게 정보에 접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를 즉자적이고 직관적으로 내 앞에 불러올 수 있으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머릿속에 칩뿐 아니라 통신장치까지 이식 하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입을 열어 음성언어로 말을 하지 않고 서로에게 생각을 쏠 수 있게 된다고 한다(스마트폰 단체 채팅방처럼 머릿속의 생각을 여러 사람과 동시에 공유한다고 상상하면 된다).
문자라는 언어 매개 없이도 개인이 쏜 생각이 서로 전달되고 얽히는 전무후무한 정보전달 및 의사소통의 장이 생겨나는 것이다. 문자 텍스트로 어우러지며 거대한 인터넷 밈(Internet meme. 대개 모방의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따위의 문화요소를 말한다)들이 유기체처럼 뭉쳤다 흩어지는 현재의 SNS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으로 뭉치며 몰려다니는지를 볼 때, 이렇게 서로 생각을 쏘며 뭉치는 미래에는 하나의 거대한 인식 공동체가 되는 것 아닌가 문득 두려워지기도 한다.
종이 매체밖에 없었던 시절, 대중의 편견을 자양분으로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던 '드레퓌스 사건(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에 사로잡힌 사법부와 군 그리고 대중들이 무고한 유대인 장교인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낙인찍어 12년 복역하게 했으나 결국 무죄로 풀려난 사건)'이 SNS 시대에 일상적인 현상이 된 것은 즉자적이고 집단적인 의사소통 관계에서는 더 빠르고 빈번하게 언제든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립적인 개체만 보면 "너를 동화시키겠다(We’ll assimilate you!)"라고 외치던 스타트렉의 집단 지성체 보그족이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곧 다가올 디지털 원어민들의 세계
미래의 정보 접근 방식이 대략 이러하고 문자의 위상이 달라질진대, 우리가 왜 여전히 읽기에 주력해야 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머릿속에 정보 저장 칩이 이식된 시대에 (직업이 학자가 아닌 이상) 문자를 읽을 줄 모른다고 사는 데 무리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읽는 행위가 아주 중요하긴 하다. 읽지 못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시민으로 서 제대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도로표지판을 읽지 못하고, 투표용지를 읽지 못한다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이 정도의 문자 읽기는 '기능적 문해력(functional literacy)'이고, 문해력 단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일 뿐이다. '실질 문해력(content literacy)'이 높아져야 시민의 수준과 사회의 수준도 높아진다.
그렇다고 모두가 문자언어 읽기에 주력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문자언어 읽기에 주력할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을 타고나는 이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문자언어를 많이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자언어는 정보를 담는 하나의 매체일 뿐이니까. 머릿속에 나노칩이 이식되거나 혹은 그 이상의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정보를 다루는 매체가 중요한 것은 문자언어 읽기가 아니라, 언어로 구성 해내는 서사(narrative)의 힘 때문이다. 서사를 쉬운 말로 하면, 바로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이다. 직선적으로 전개되는 문자언어의 이야기가 아니라, 방사형으로 전개되어 확산되는 이미저리(imagery. 언어에 의해 마음속에 생성되는 이미지군)를 입은 서사의 힘이라고 할까.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하는 정보 접근 방식을 볼 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문자언어 읽기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디지털 원어민 세대들이 스토리텔링의 힘을 갖추면, 정보를 이미지화해서 방사형 그물처럼 즉자적으로 퍼뜨리며 인간 정신의 외연을 확장해나갈 거라고 본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의 힘이지, 문자언어를 많이 억지로 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텔링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스토리를 듣고 읽고 공감하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면 타인의 스토리가 치우쳐 있어도 그에 휩쓸려 집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사를 창작하는 능력이야말로 꿈꾸는 이들의 증거이고, 이것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이 아닐까. 그러니 다양한 매체가 공존하는 시대에 문자언어 읽기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체가 무엇이든 자신의 인지 채널과 학습 유형에 맞게 스토리를 즐기고 빚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다가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인간이 거듭나는 길이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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