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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의 공약에서 읽는 이 시대의 풍향

[장석준 칼럼] 노동당과 포데모스, 에너지 혁신을 통해 사회 혁신으로

한국 정치판에서 정책 공약이 선거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말하면, 문외한이나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열흘 전 총선을 지른 영국에서는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보수당에 20% 포인트 이상 밀리던 노동당이 총선 공약집 발표 이후 빠르게 지지를 늘리더니 불과 2% 포인트 차이로 보수당을 위협하는 2위를 기록했다. 압승을 예상하던 보수당은 어느 정당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헝 의회(Hung parliament, 어느 당도 의회 의석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상태)'라는 결과와 마주해야만 했다.

노동당 총선 공약집 중 대중의 눈길을 끈 것은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원상 회복", "대학 등록금 폐지", "철도 재국유화", "최저임금을 생활임금 수준으로 인상", "0시간 근로계약(시간제인데 근무시간이 지정되지 않아서 사용자의 뜻에 따라 노동시간과 임금이 고무줄처럼 변하는, 영국의 대표적 불안정 고용) 폐지" 등이었다. 하지만 이밖에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 많다.

그 중 하나가 과감한 에너지 전환 계획이다. 총선 공약집의 첫째 장 "모두를 위해 작동하는 경제 수립"은 "인프라스트럭처 투자" 항목에서 철도 현대화, 광대역 통신망 구축과 함께 다음을 약속한다. "최첨단 기술을 사용한 새로운 저탄소 가스 및 재생가능에너지 발전(發電)에 투자해 에너지 시스템을 전환한다."

1년 전 스페인 총선에서 '우니도스 포데모스'가 제시한 공약도 비슷했다. 우니도스 포데모스("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뜻)는 신생 좌파정당 포데모스가 연합좌파(공산당 등이 참여하는 정당연합)와 함께 결성한 선거연합이다. 우니도스 포데모스는 "공동 통치의 50가지 약속"이라는 제목의 총선 공약집을 발표했다. 그런데 50개 항목 중 제1항이 "국가 에너지 전환 계획"이었다. 내용만 놓고 어떤 정당 공약 같으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녹색당이라고 답할 것이다.

비슷한 고민과 전망이 최근 1년 사이 선거를 치른 두 나라 좌파정당들을 관통하는 것이다. 영국 노동당이든 스페인의 우니도스 포데모스든 모두 에너지 체제 전환을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정책 과제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도 하루빨리 좇아야 할 시대의 풍향이다.

포데모스와 노동당을 관통하는 문제의식 – 에너지 전환

우니도스 포데모스의 총선 공약집은 "2050년까지 완전한 탄소 제로 에너지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두 가지 수단을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한다.

첫째는 "국가 에너지 절약 계획"이다. 민간, 공공 가릴 것 없이 모든 건물의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교통, 산업, 전력 공급망 역시 낭비를 최소화하도록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국가 재생가능에너지 계획"이다. "태양광, 태양열, 풍력, 지열, 소형 수력, 저탄소 바이오매스 등의 기술을 집중 개발"해서 화력 발전을 대체하겠다고 한다. 더불어 "모든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을 불허해서 2024년까지 폐쇄하겠다"고 약속한다.

영국 노동당 총선 공약집은 이만큼 상세하게 목표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총선 공약집을 작성하는 데 기본 자료가 된 제러미 코빈 대표의 당내 경선 공약은 꽤 상세한 목표를 언급한 바 있다. 2016년 당대표 선거에서 코빈 대표는 "2030년까지 탄소 제로 전력 시스템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니도스 포데모스 공약과 마찬가지로 새 에너지 체제의 두 축은 에너지 효율성 강화와 재생가능에너지 확대다. 우선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차기 정부 임기(5년) 안에 "400만 넘는 가구에게 공공 재원으로 주거 단열 프로그램을 시공"한다. 또한 "전력의 65%는 재생가능에너지로 생산하고 기술 발전과 확산에 따라 목표치를 85%까지 상향한다". 이와 연동해 "석탄 화력 발전소는 2020년대 초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한다".

우니도스 포데모스와 노동당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핵발전을 둘러싼 입장이다. 우니도스 포데모스가 핵발전소 철폐를 명시한 데 반해 노동당 총선 공약집은 이를 존치하겠다고 밝힌다. 노동당 총선 공약집 중 가장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경제, 노동, 교육의 변화와 연동된 에너지 전환

아무튼 10년~20년 정도를 내다보며 새 에너지 체제를 수립하겠다는 비전은 일치한다. 그런데 비슷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우니도스 포데모스와 노동당 모두 에너지 전환 계획을 좁은 의미의 환경, 에너지 정책을 넘어선 종합 청사진으로 바라본다. 이는 일자리 창출 계획이기도 하고, 경제 구조 개혁의 한 경로이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교육 개혁과 연관되기도 한다.

우선 우니도스 포데모스의 총선 공약집을 보자. "국가 에너지 전환 계획"은 50대 공약의 첫 번째일 뿐만 아니라 여덟 번째 공약인 "경제 전환 계획"의 일부이기도 하다. 경제 전환 계획이란 "에너지와 원자재의 지속가능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스페인 산업 구조를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옛 산업의 쇠퇴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을 적극적 노동시장 및 훈련 정책을 통해 새 산업에 재배치하는 "녹색 고용 계획"이 함께 한다.

우니도스 포데모스는 이 모든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할 주체로 "전략부문위원회"를 상정한다. 전략부문위원회의 목표는 "거시 전략과 기술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현대화가 꼭 필요한 부분을 적시해서 해당 부문의 미래를 여는" 것이다. 그런데 전략부문위원회에는 "재계와 노동조합이 함께 참여"한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이 미래산업의 계획과 운영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새로운 산업정책을 추진하자면, 재원이 필요하다. 우니도스 포데모스는 "대규모 공공은행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위의 계획들을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국영은행을 중심축으로 삼고 스페인 금융위기의 원흉인 대형 민간은행들을 국유화해 강력한 공공금융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다. 공공은행들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전략부문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미래산업 투자다.

영국 노동당은 어떠한가. 노동당 총선 공약집은 에너지 전환의 첫 걸음이 사유화된 전력산업을 다시 공유화하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단, 그 형태는 과거의 중앙집권적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노동당은 지역 공기업과 협동조합 형태를 선호한다. 총선 공약집이 밝힌 1단계 계획은 각 지역마다 1개 이상의 전력 공기업과 협동조합을 설립해 기존 민간 공급업체와 경쟁하게 하는 것이다.

1년 전 대표 경선에서 코빈 진영은 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했었다. "집권 기간(5년) 안에 200개 이상의 지역 에너지 공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다. 또한 "1000개의 지역사회 에너지 협동조합을 육성하겠다"고도 했다. 지역 에너지 공기업과 협동조합은 재생가능에너지를 바탕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지역 내에 공급한다. 이들이 "새 에너지 경제의 중심축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노동당은 총선을 앞두고 공약집 말고도 "대안적 소유 모델"이라는 정책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새 노동당 정부가 추구할 대안 기업 모델로 "노동자 생산협동조합", "지방자치단체 소유 공기업", "전국적 공기업"을 제시한다. 그리고 노동자, 소비자, 지역사회 등의 경영 참여를 통해 공기업 운영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의 에너지 전환 계획에는 이러한 노동당의 경제 구조 개혁 비전이 고스란히 집약돼 있다.

에너지 전환 계획이 동반하는 또 다른 비전은 대규모 새 일자리 창출이다. 대표 경선에서 코빈 진영은 지역 에너지 공기업과 협동조합을 통해 3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에너지 효율성 강화를 위한 주거 단열 프로그램 역시 건설업 일자리를 늘릴 것이다.

새 산업은 새 지식, 기술,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 지식, 기술, 능력을 갖춘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노동당이 내놓은 답이 '국민교육서비스(NES)'다. 영국인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국민보건서비스에서 따온 말이다. 의료와 마찬가지로 교육에서도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언제든 국비 부담으로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는 정책이다. 여기에는 공공 보육 확대, 대학 등록금 폐지 외에도 무상 공공 성인교육이 포함된다. 이를 통해 수많은 시민이 미래산업에서 새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노동당의 에너지 전환 계획은 이렇게 교육 정책으로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모든 혁신의 재원은, 우니도스 포데모스 공약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공금융 체계를 통해 조달한다. 노동당 총선 공약집은 "국영투자은행을 신설하겠다"고 약속한다. 국영투자은행의 주된 기능은 지역별로 공공투자은행을 설립하고 이들 지역투자은행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투자은행이 하는 일은 지역사회의 참여 아래 에너지 전환과 미래산업 육성에 투자하는 것이다.

에너지 전환을 사회 변화의 지렛대로

요즘 "제4차 산업혁명" 논란이 뜨겁다. 실체가 있다, 없다, 말들이 많다. 대선 때도 그랬다. 정부가 나서서 4차 산업혁명을 지원하겠다는 후보도 있었고, 4차 산업혁명은 민간 기업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며 논박하는 후보도 있었다.

논쟁의 결론이 무엇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제러미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이든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이든 공통 토대는 새 에너지 체제라는 점이다. 새로운 전력 생산 및 공급 체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전력은 이미 제2차 산업혁명부터 주된 에너지 형태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력 생산은 화력이나 원자력에 의존하는 집중적 방식이었고, 소비는 조방적(외연적)이었다. 이는 제2차 산업혁명에 전형적이었던 위계적-관료적 산업 조직(민간 대기업이든 일당국가의 국영기업이든)과 딱 들어맞았다.

'제3차의 한 국면'이든 '제4차'든 정보화 이후의 새 산업 조직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제 공인된 사실이다. 이에 부응하려면 전력 생산은 분산적 방식이어야 하고, 소비는 집약적(내포적)이어야 한다.

누가 이런 새로운 인프라스트럭처 투자를 책임질 것인가? 국가가 나서야 한다. 다른 미래산업 분야는 몰라도 에너지 체제만큼은 분명 공공의 몫이다. 한국에서 '제4차'가 맞는지 틀리는지 입씨름을 벌일 동안, 영국과 스페인의 좌파정당들은 우리 시대에 공공이 떠맡고 나서야 할 이 기본 과제를 또렷이 지목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새로운 공공부문 모델, 새로운 공기업 운영 구조, 새로운 경제 계획 방식을 실험하고 확산시키려 한다. 또한 그 재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탈신자유주의 공공 금융 체계를 구축하려 하며, 새 산업의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교육 혁명을 추진하려 한다. 에너지 전환을 중심으로 경제, 노동, 교육 등등의 개혁이 결합해 사회 전반의 변혁으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을 던져주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우리는 박정희 산업화의 결실인 재벌 대기업을 어떻게 개혁할지 고민해왔다. 하지만 이미 오래 굳어온 구조를 개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새 세대 산업화를 통해 처음부터 새로운 소유-운영 모델을 갖춘 경제 영역을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 기존 경제 영역을 뜯어고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기존 영역의 개혁을 포기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새 경제 영역에서 바람직한 소유-운영 모델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기존 영역의 개혁에도 기준이자 자극이 될 것이다.

에너지 전환은 이러한 새 경제 영역 구축의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다. 에너지 전환에서 시작되는 산업 혁신은 사회 전반의 혁신에 촉매가 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진보정당도 영국 노동당과 스페인 포데모스가 앞서 모색한 이 가능성을 대담한 종합 정책으로 구현해야 할 때다. 따지고 보면, '산업혁명'의 먼지 구름 속에서 '사회혁명', '인간혁명'의 가능성을 길어내려는 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좌파의 좌파됨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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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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