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지는 섬 낙월도(落月島). 8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2강은 8월12(토)∽14일(월), <여름휴가 2박3일특집>으로 영광의 아름다운 섬 낙월도로 떠납니다. 올해 여름휴가를 계획하시는 회원님들이 참고하실 수 있도록 미리 공지합니다. 숙박시설이 많지 않은 관계로 30분을 선착순 접수, 마감합니다.
낙월도는 새우의 고장입니다. 새우 덕에 일제 때는 “뱃사공 부인도 비로도(비단)치마를 입고 다녔다” 할 정도였고 “전라도 세 번째 갑부가 살았”을 정도로 부유했던 섬.
지금도 여전히 새우의 고장이지만 섬은 한적하고 소박합니다. 물놀이하기 좋은 해수욕장이 세 개나 있지만 한 여름에도 한산해서 여름휴가를 즐기기 더없이 좋은 섬입니다. 섬에는 내내 바다를 바라보면 걸을 수 있는 해안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트레킹하기도 좋습니다. 신령한 기운이 도는 당산 숲도 아름답습니다. 최고로 높은 곳이 109m밖에 안 되니 가파른 길도 없습니다.
낡고 허름하지만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은 섬 토속음식을 차려내는 민박집 밥상은 더없이 맛깔스럽습니다. 더위에 가출했던 입맛을 되돌아오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마당을 나서면 바다와 갯벌, 거기서 뒤안길로 50미터만 걸으면 아담하고 예쁜 해수욕장이 있는, 섬마을로의 휴가. 한적한 섬에서의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계신 분들을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 답사지인 <낙월도-2박3일 여름휴가특집>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달의 후예들이 사는 곳
굴은 달이 차고 기우는데 따라 여물기도 하고 야위기도 한다
섬사람들도 굴처럼 살이 올랐다 야위었다 한다
섬사람들은 달의 자손이다
달이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하며 바다 것들을 키우면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소라고둥과 굴들을 얻어다 살아간다
(강제윤 詩 <달의 후예>)
영광 향화도 항에서 출항한 낙월도행 여객선은 직항하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간다. 밀물 때면 물에 잠기고 썰물 때만 형체를 드러내는 모래평원 풀등, 이 바다 속에도 100ha에 이르는 거대한 풀등이 있다. 여객선은 풀등에 걸려 좌초할까 두려워 우회하는 것이다. 낙월도가 새우젓의 산지가 된 것도 새우들의 산란장인 이 풀등 덕이다.
상낙월도항에 잠시 기항한 여객선은 하낙월도항에 정박한다. 낙월도는 한 섬의 지명이 아니다. 상하낙월도 두 섬을 동시에 일컫는 이름이다. 낙월도(落月島)의 옛 이름은 진다리(진달이)섬 혹은 진월도(珍月島)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월도로, 고산자 김정호(1804∼1866)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낙월도로 표기되어 있다. 낙월도가 진다리섬이 된 것은 백제가 폐망할 무렵 백제의 왕족들이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달이 지자 항로를 잃고 이 섬에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전설은 전설일 뿐. 달과 밀접해 보이는 이름들이 실상 달과는 무관하다. 낙월도 인근 해역은 너른 갯벌이 분포해 있다. 진다리는 진들, 즉 갯벌을 뜻한다. 진들 한가운데 있어서 진들섬, 진다리섬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월도(珍月島), 낙월도(落月島)로 바뀐 것이다.
별개의 섬으로 있던 상하 낙월도는 갯벌 사이에 제방을 쌓아 만든 연도제로 하나의 섬처럼 됐었다. 하지만 두 섬 사이를 막은 제방이 해수 유통을 방해해 갯벌이 점차 물러져 늪이 되어 갔다. 갯벌에 의지해 살던 섬사람들은 작업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근래에 다시 제방의 일부를 트고 다리를 놨다. 물은 흘러야 마땅하다. 그래야 갯벌도 살고 사람도 산다. 갯벌은 다시 점차 본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낙월도는 전남 영광군 낙월면의 소재지다. 11개의 유인도와 41개의 무인도를 아우르는 낙월면 전체 인구는 700여 명에 불과하다. 1965년 인구가 4,000명이었으니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섬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그렇게 저물어 갔다.
옛 모습 살아있고 인심은 소박하다
하낙월도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상하 낙월도 두 섬 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다. 섬에 빼어난 풍광이나 역사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적한 어촌 마을이다. 그래서 오히려 평화롭고 여유롭게 쉬다 가면 좋은 섬이다. 낙월도에는 장벌, 재계미, 큰갈마골 등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객들도 제법 찾는다. 그밖에는 주말이나 연휴에 섬 둘레 길을 걷거나 캠핑을 하기 위해 조금씩 찾아들 뿐이다. 그러니 식당도 따로 없다. 민박집 시설도 부족하다. 하지만 관광객이 적은 만큼 섬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인심 또한 소박하다.
새우젓의 고장답게 낙월도 곳곳에는 새우잡이에 쓸 어구들이 잔뜩 쌓여 있다. 낙월도는 옛날부터 새우의 산지로 유명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도의 세 번째 갑부가 낙월도에 살았을 정도다. 전성기 때는 새우잡이 배가 400여 척이 넘은 적도 있었다. 지금 인구(320여 명)보다 어선이 많았다. 그중 멍텅구리배(해선망어선)는 80척. 요즘 새우젓 산지로 유명한 임자도 전장포에는 당시 멍텅구리배가 15척 정도밖에 없었다. 보통 멍텅구리배에는 5명씩 승선해서 조업했으니 낙월도 배의 선원들만 400명이나 됐다. 그래서 한때 낙월도에는 술집과 다방이 10여 곳에 이를 정도로 유흥업도 덩달아 번성했었다.
낙월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전통 어선인 '멍텅구리배'로 새우를 잡았다. 바지선처럼 다른 배가 끌어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서 멍텅구리배로 불렸던 무동력선. 그 배로 새우를 잡을 때는 상하 낙월도 두 섬이 전국 새우젓 시장의 50%를 점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1987년 '셀마' 태풍 때 멍텅구리배가 난파되어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멍텅구리배는 어업의 역사에서 영영 퇴장 당하고 말았다.
낙월도 사람들은 임자도 전장포보다 낙월도가 새우잡이의 원조라고 자부한다.
“전장포는 낙월서 헌 어구 가져다 새우잡이를 시작했어. 그런데 이제는 거기가 더 커져버렸어.”
낙월도는 여전히 새우의 고장이다. 현재는 하낙월에 20척, 상낙월에 17~8척 정도의 새우잡이배가 있다.
면사무소 부근에서 만난 노인은 평생을 섬에서 살았다. 노인은 낙월도를 비롯한 영광바다의 어장이 황폐화된 것이 1986년 영광원전이 들어서면서부터라고 주장한다. 원전이 건설된 뒤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바다의 수온이 너무 높아져 물고기들의 서식 환경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냉각수를 뽑아들이는 취수구로 부화된 물고기 유생들이 빨려들어가 죽으면서 어장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원전 저것이 어민들 다 죽이는 살인무기여."
그래서일까. 지금 영광의 칠산바다에는 어선 한 척 떠있지 않다.
염산의 천일염과 낙월의 새우가 만나니
과거 낙월도 새우젓이 명성을 얻은 데는 염산면의 소금이 한몫을 했다. 염산면에서 나는 천일염과 낙월도의 질 좋은 새우가 결합되어 맛이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낙월도는 일제 때부터 부자섬으로 이름 높았다. 그때는 일본인들이 낙월도에 거주하며 어업조합을 관리했다. 일본 상선들도 낙월도까지 찾아와서 새우를 사갔다.
"낙월서 난 니보시(삶아서 말린 새우)는 아지노모도란 일본 조미료 공장에서 수입해 갔어."
일제 때 낙월도에서 동경 유학생이 6명이나 나왔고 "뱃사공 부인도 비로도(비단) 치마를 입고 다닐 정도"였다. 해방 후에도 낙월도는 여전히 부유한 섬이었다. 모두가 새우 덕이었다.
"낙월도에는 전라도에서 세 번째 가는 갑부가 있었어. 김달선 씨라고. 새우잡이배 선주였지. 돈을 가마니로 져 날랐다고 해. 아주 왕 노릇을 했었지."
낙월도에는 논이 전혀 없고 밭만 있다. 예전에는 밭에 거름으로 새우를 쓸 정도로 새우가 많았었다. 농사는 전적으로 여자들 몫이었다.
"남자는 배에 다니다가 집에 오면 손님이었어."
낙월도 사람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통 새우잡이 어선 멍텅구리배가 위험한 배였다고 알려진 것이 억울하다. 1987년 7월 셀마 태풍으로 조업중이던 낙월도의 멍텅구리배 12척이 난파돼 선원 51명이 때죽음을 당한 적이 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섬 앞바다 물살이 센 어장까지 동력선이 끌어다줬다. 어장에 도착한 배는 거대한 나무닻을 내려 정박했다. 좌우로 길게 뻗은 날개에 줄을 매달아 그물을 내리고 조류를 따라 그물 입구로 새우가 들기를 기다렸다가 새우를 건져 올렸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바다에 내려앉은 비행기 같았다.
당시 일부 멍텅구리배에서 선원들에 대한 구타 협박 등 인권침해가 컸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셀마 태풍 때 멍텅구리배가 난파되는 사고를 당한 것은 배의 구조에 결함이 있어서도 선주가 사고가 나도록 방치해서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고는 잘못된 일기예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멍텅구리배 선원들은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비껴간다고 해서 피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마치 태풍이 오는데도 선주들이 무리하게 조업을 시켜서 사고가 난 것처럼 알려져 억울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셀마 태풍으로는 난파된 멍텅구리배에서는 낙월도 주민인 선장 3명과 선원들도 여럿 함께 타고 있다가 수장을 당했으니 주민들의 증언도 일면 타당해 보인다.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주민들은 그때의 사건이 거론되는 것을 꺼려하지만 낙월도 이야기를 하면 결코 비껴갈 수 없는 사건이라 다시 기록한다. 아픈 역사도 역사다.
둘레길, 산책로처럼 여유롭다
하낙월도와 상낙월도 두 섬 다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으나 찾는 이들이 많지 않다 보니 관리는 소홀한 편이다. 하낙월도 둘레길은 장벌해변에서 당너매, 전망대, 외양마지, 진월교로 이어진다. 시야가 탁 트여 걷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가파른 비탈도 없고 거리도 3km 남짓이니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상낙월도 둘레길은 상하 낙월도를 연결해주는 진월교에서 시작되는데 쌍복바위, 누엣머리, 당산, 큰갈마골해변, 큰애기고랑, 재계미해변, 달바위를 거처 상낙월항까지 그대로 섬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다. 7km 남짓한 길이니 천천히 걸어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상낙월도의 최고봉은 98m, 하낙월도의 최고봉은 109m에 불과해 산이라기보다는 구릉에 가깝다. 그런 까닭에 둘레길은 그저 산책로처럼 걸을 수 있다. 걷는 중간중간 해변에서 놀 수도 있고 당산숲 그늘 아래 쉬었다 갈 수도 있다.
상낙월도 당산숲은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 당산의 수호신은 현풍 곽씨 할머니다. 16세기 말 재계미로 처음 들어와 살았던 입도조 할머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룻날이면 무당을 불러 당산나무 아래서 곽씨 할머니를 신주로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대동제를 올렸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당제도 지내지 못하게 됐다. 미신 타파를 이유로 정부에서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제가 없어지면서 마을이 더 삭막해졌어. 대동의식도 없어지고. 유대가 잘 안 돼."
그래서 섬 노인들은 다시 대동제를 부활시키려 노력 중이다. 박정희 시대 파괴된 우리 전통문화가 어디 대동제뿐일까. 독재자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더 늦기 전에 되살려야 할 우리 전통 문화들. 거기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있다.
(덧붙임 : <한국경제신문> 6월18일자 ‘시인 강제윤의 새로 쓰는 섬택리지’(1회)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섬학교 제62강 8월의 <낙월도-2박3일 여름휴가특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8월12일(토)
09:00 서울 출발(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2강 여는 모임
-영광 도착
-점심식사(영광에서 굴비백반)
-영광 향화도항 출항
-하낙월도 도착
-하낙월도 걷기(4km)
하낙월항→장벌해수욕장→당너매→전망대→외양마지(낚시터)→진월교
-저녁식사 겸 뒤풀이(민어회 혹은 병어회와 탕)
-자유시간 및 취침(민박. 다인실)
8월13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물놀이, 책읽기, 낮잠 혹은 자유시간(하낙월도 해변)
-점심식사(섬밥상)
-물놀이, 책읽기, 낮잠 혹은 자유시간
-상낙월도 둘레길 걷기(5km)
하낙월항→진월교→뽕나루쉼터→쌍복바위→누엣머리→당산→큰가마골→재계미해변→달바위→상낙월항→진월교→하낙월항
-저녁식사 겸 뒤풀이(병어회와 탕)
-자유시간 및 취침
8월14일(월)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하낙월도 출항
-향화도항 도착
-법성포 숲정이숲길 탐방. 어판장 및 굴비판매장 등에서 장보기
-백수해안도로 드라이브
-점심식사(백수에서 백합죽)
13:30 서울 향발. 제62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수통,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읽을 책, 수영복, 낚시도구, 물놀이기구,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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