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에서 양강구도로, 1강 1중으로, 특별한 쟁점 없이 판세 변화를 거듭하던 19대 대선판에 '송민순 문건'이란 작은 파문이 이어지고 있다. 뭔가 논란거리가 될 것이기에, 또는 (누군가) 뭔가 논란거리가 되길 바라기에 파문은 맞지만, 개인적으로 판을 엎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지 못할 것으로 전망하기에 '작은' 파문이다.
'송민순 문건'은 예의 북풍이란 점에서 구차하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다. 지난해 10월 송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자신의 회고록인 <빙하는 움직인다>(창비 펴냄)에서 2007년 11월 UN 대북인권결의안의 찬성과 기권을 두고 벌어진 참여정부 외교·안보라인의 이른 바 난맥상을 기술한 후 선거를 얼마 앞두지 않고 새삼 '난맥상'이 부각된 게 다수의 추측처럼 우연일 리는 없다. 어렵지 않게 추한 맥락을 떠올리게 되어, 세상사의 씁쓸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나아가 이 북풍에 담긴 구시대의 유물을 직시하면 씁쓸함은 배가된다. 요점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북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북한의 의사를 물어보고 기권하자는 입장이었느냐', 아니면 '기권을 결정한 뒤 북한에 사후 통보했느냐'이다. 대통령 자리를 두고 벌이는 제로섬의 정치게임이지만, 일단 치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북 정상회담 바로 뒤인 당시 상황에서 북한과 교감 없이 그러한 결정이 내려지긴 힘들었을 것이다. 만일 북한과 사전 교감 없이 덜컥 결정을 내리는 정부라면 오히려 신뢰할 만한 정부라고 할 수 없다.
국내 정치가 그러하듯 남북문제에서 상대방의 의사와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정작 송 전 장관 자신도 유엔 채널로 북한과 접촉해 결의안에 대한 북한의 '동향'을 파악했다고 하지 않았나. 같은 행위에 대해 의중·의사·동향 등 다양한 단어로 변주되다가 급기야 '재가'라는 단어까지 등장한 걸 보면, 정략적 목적의 북풍 불씨 살리기라는 의혹이 짙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송민순 문건'에서 문제 삼는 것은 문젯거리도 아니라는 판단이다. 문재인 캠프 진성준 TV토론단장이 "(설사 사실이라 해도) 북한에 입장을 물어 본 것이 뭐가 문제냐?"는 인식이 가장 정확하다. 악의적으로 해석하듯 상사에게서 결재받듯이, 상급자에게서 재가 받듯이 한 게 아니라 서로에게, 무엇보다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을 찾기 위해 협의하고 소통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4대강 사업에 관해 물은 게 아니라, 북한 현안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물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사실관계는 결정 후 통보라는 게 문재인 캠프의 해명이고, 다른 후보 진영에서는 해명을 믿지 못한다는 이견이 지속되고 있다.)
이 문제는 주적 논쟁과도 맞닿아 있다. 북한은 주적이 아니다. 이때 우리는 북한을 두 층위로 나누어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북한 인민과 북한 집권세력.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3대 세습의 북한 지배세력은 분명 호전적이고 현존 국가 중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악한 집단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국민을 굶주리게 만들었고, 한줌 지배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를 끊임없이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정은 집단을 극복해야 할 '적'으로 간주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김정은 철권통치 아래서 신음하는 북한 인민도 '적'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북한 인민이 '적'일 수는 없고, 남한 인민의 입장에서 북한 인민은 함께 가야 할, 가치 있는 미래를 더불어 도모해야 할 하나의 민족이다.
답은 명확하다. 북한의 지배세력과 인민을 나누어서 대처해야 한다면, 현실적으로 남한에 북한 인민과 직접 소통하거나 동원할 역량이 없다고 할 때 우리는 북한 인민과 함께할 공동의 미래 때문에라도, 전체 북한 인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저 호전적 북한 정권과 적대할 수 없고 따라서 적으로 돌릴 수가 없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 아니다. 북한 인민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고, 북한 정권은 대화하고 소통해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노력해야 할 대상이지 싸워서 무너뜨려야 할 적이 아니다. 북한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본적 컨트리 리스크이므로 남한 정부가 할 일은 리스크 관리이지, 리스크 발현이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가불 햇볕정책이 나왔고, 정말로 아주 결정적 순간까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햇볕정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그럼에도 북한을 주적으로 취급하고 선언하는 일부 대선 후보들의 행태는 몰상식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은 아마 이럴 것이다. 그들은 사실 북한에 관심이 없다. 유력 대선 후보를 주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북한을 끌어왔을 뿐이다. 내부의 경쟁자를 주적으로 만들기 위해 북한의 이름을 차용하는 행태의 답습.
문재인 후보가 TV토론에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런 규정은 대통령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다시 물어도 문 후보가 재차 "대통령 될 사람이 할 발언이 아니라고 본다"고 한 것은 정확한 답변이었다. 문 후보의 말대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관리 대상인) 북한에게 적대의 표현인 주적이란 말을 써서 될 일인가.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적대를 종식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송민순 문건'은 역설적으로 후보 문재인의, 적어도 안보관에 관해서는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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