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찌찌 보세요~ 엉덩이 보세요~"
요즘 함께 목욕할 때마다 세 돌을 앞둔 아이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하는 말이다. 두 돌 무렵부터 슬슬 엄마 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쿡 찔러보며 "이건 뭐예요?" 묻더니, 세 돌이 되자 아예 관찰하고 만져보며 몸 자체를 장난감 삼아 논다.
이 무렵이 아이들에게 손, 발, 엉덩이뿐 아니라 성기에 이르기까지 각 신체기관의 이름과 역할을 알려주기 좋은 시기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부모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성기를 무어라 부르게 하면 좋을지, 성기의 역할을 '쉬야 하는 곳' 정도로 얘기해주면 될지, 아니면 몽땅(?) 알려줘야 할지.
보통은 유아에게 성교육할 때 '잠지' '고추'라는 말 대신 '음경'과 '음순'이라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강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는 '정확한 용어'를 구사하기 위해 꽤 신경을 썼고, 실수로라도 아이들 앞에서 잠지, 고추라는 단어를 내뱉으면 동료 강사들에게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제 막 우리말을 쫑알대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음경, 음순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발음하기 어려울까? 귀에 제대로 꽂히긴 하는 걸까? 아이 주변의 어른들 중에 음경, 음순이라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이가 성교육 말고 일상생활에서 이런 단어를 들어보기는 했을까? 정자와 난자에 대한 설명 또한 마찬가지다. 마치 올챙이와 해님 같은 정자, 난자 그림을 보여주며 "이것은 무엇일까요? 올챙이처럼 생겼지요? 사실은 아빠 몸속에 있는 아기 씨앗이에요. 이름은 '정자'! 따라 해볼까요?"라는 식의 교육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올챙이처럼 생겼지만 올챙이가 아니고, 아빠 몸속에 있는 아기 만드는 씨앗인데 이름은 정자'라니…. 마치 아이들에게 "할배지만 할배는 사투리이고, 사실은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데, 조부라고도 한단다"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할배면 어떻고, 할아버지면 어떻고, 조부면 어떠하랴. 할배한테 할매라고만 안 하면 되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성기를 지칭하기에 잠지, 고추만큼 안성맞춤인 단어가 없다. 아이들이 발음하기 쉽고, 익히기 쉬운 단어일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라서 유용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보지', '자지'처럼 비속어 느낌도 아니니 말하고 듣기에도 편안해 아이들 눈높이에도 알맞은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음경, 음순이라는 단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성기의 역할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도 고민할 텐데, 처음부터 모두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이의 호기심을 따라 한 걸음씩 천천히 "잠지, 고추는 쉬~하며 오줌도 싸고 아기도 만들어낸단다" 정도면 충분하다. 혹시나 "어떻게 잠지와 고추가 아기를 만들어요?" 하고 더 궁금해한다면, "네 생각에는 어떨 것 같은데?" 되물으며 이 주제로 아이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어보는 것도 좋다. 상상력을 키우고 몸에 대한 신비감, 긍정적 태도를 지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큰아이가 몸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던 두 돌 즈음에 둘째를 임신하여 엄마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올라 어느 날 짠하고 동생이 생기는 경험을 전해줄 수 있었다. 아이는 매일매일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 배가 점점 커지고 있어, 배 안에는 아기가 들어 있어, 아기는 어떻게 저기 들어갔을까? 언제 어떻게 나올까? 나도 저 안에 들어 있었던 걸까?" 하며 호기심을 가졌고, 그때마다 엄마, 아빠와 많은 대화를 했다. 때로는 "엄마, 그러면 아빠가 나를 엄마 배 속에 넣어 놓았어요?"라는 질문을 하루에 열 번도 넘게 하더니, 혼자 곱씹어보며 '이젠 알겠어, 궁금증이 풀렸어' 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엄마 것과 내 것이 왜 달라요?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부터 한편으론 편하고, 한편으로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그건 바로 "내가, 내가!"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모 눈에는 마냥 아기 같은데 무엇이든 '내가' 하겠다고 나서니, 신기하고 기특하면서도 '내가' 하는 바람에 잔뜩 어질러진 방안과 늦어진 시간들을 수습하느라 어째 엄마는 더 바빠졌다. 이럴 때면 게을러터진 내 성격 때문인지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아이의 "내가, 내가!" 중 대표적인 건 바로 '샤워 후 로션 바르기'다. 감당도 못 할 만큼 한 움큼 짜서 두 발에 잔뜩 바르고는 그 미끄러운 느낌이 좋은지 그대로 바닥에서 슬라이딩 놀이를 하곤 하는데, 얼마 전에는 어째 조용하기에 돌아봤더니 개구리처럼 앉아서 자기 잠지를 양손으로 벌리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벌써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세 돌쯤 시작된다는 유아 자위가 우리 아이에게도 온 것이다.
"뭐 하고 있어?"라는 질문에 아이가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잠지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엄마가 혼을 내려는 건지 칭찬을 하려는 건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 일단 행동을 멈춘 듯하다. "잠지 만지고 있었어? 만져보니까 어때?" 하고 물으니,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예뻐요"라고 대답했다. 나도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성교육을 할 때 우리 몸은 아주 소중하다고 가르치지만(사실은 몸이 소중하다는 것에서 나아가 '나' 자체가 소중하다는 인식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해보면 좋겠다), 그렇게 말한 것과 다르게 실생활에서는 부모도 교사도 아이가 목욕을 하고 나서 옷을 빨리 입지 않고 미적거리면 무심결에 "아이고, 부끄러워라. 얼른 옷 입으세요"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면 아이는 벗은 자신의 몸, 특히 성기, 엉덩이는 팬티로 가려야 할 '부끄러운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는데 우리 아이가 아직까진 자신의 성기를 '예쁘다'라고 생각하며 소중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쓰다듬고 있다는 것에 나는 마음이 놓였다.
사실 아이들에게 성기와 항문만큼 자신의 몸에서 신비하고 재미있는 곳이 또 있을까? 자신의 몸에서 오줌과 똥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째 신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몸에서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할까?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떻게 생겼는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다.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져보았더니 '어머나!' 느낌이 이상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아이는 자기 몸에 달린 엄청난 장난감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는 오줌 싸고 똥 싸는 신기한 곳이 만지면 기분까지 좋으니, 최고의 장난감으로 여기며 가지고 노는 것인데 엄마 아빠가 기겁을 하며 "만지면 안 돼!"라고 하면 아이들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는 이럴 때 차라리 아이의 놀이에 동참하길 권하고 싶다. 성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함께 그림도 그려보고, 엄마 잠지와 너의 잠지가 똑같이 생겼을까?(이때 우리 아이는 "엄마 잠지에는 머리카락(음모)이 있는데 나는 왜 없어요?"라고 묻더라.) 왜 다르게 생겼을까? 만졌을 때의 느낌이 어떤지도 나누고, 그러다 차차 손을 씻지 않고 만졌을 때 생기는 일, 배변 활동 외에 성기가 하는 일, 다른 사람이 내 몸을 만지는 일, 내가 좋아하는 스킨십과 싫어하는 스킨십까지. 몸과 성기를 가지고 아이와 나눌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물론 아이가 단순한 놀이 이상으로 자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성교육 강사나 심리상담가를 만나볼 것을 권하지만, 혹시 부모 자신이 아이의 자위를 성인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즐거움 혹은 공포를 심어주는 성교육
어떤 책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동기부여를 해야 할까? 그건 바로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성교육을 하는 그 수많은 시간 동안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성에 대한 즐거움과 행복을 얼마나 전달했을까?' 싶었다. 성에 대한 동경심을 심어주었을까? 더 솔직히 말하면, 가끔 나는 성교육 강사인 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판매하며 그들의 마음 한구석을 파먹어가는 존재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렇게 끔찍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어요. 가해자들은 늘 우리 주위에 있답니다. 여러분도, 당신의 아들딸들도 가해자,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하면서 말이다.
배를 만들려면 바다에 대한 동경이 있어야 하듯, 성교육에도 성에 대한 '행복, 즐거움,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에 대한 행복, 즐거움, 사랑 등을 논하는 것에는 여전히 인색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부쩍 유아기의 성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아갈 세상과 사람, '나'에 대한 태도를 갖추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교육 그림책을 죽 펼쳐놓고 "이건 아기가 자라는 자궁이야"라거나 "누가 만지면 '안 돼요! 싫어요!' 라고 말해" 하는 식의 지식을 쌓는 교육이 아니라, 성에 대한 태도를 갖추어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나름대로 결심한 것이 있다. 아이들을 더 많이 안아주어야지, 더 많이 칭찬해주고, 쓰다듬어주고, "사랑한다" 속삭여야지 하고 말이다. '성'이란 단어를 정확히 모를지라도 아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을 부대끼고,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일인지 느끼도록 해주고 싶다. 그렇게 우리 아이와 함께 행복한 성생활을 하고 싶다. 잠지를 잠지라고, 고추를 고추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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