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테가 대통령은 이날 수도 마나과의 '요한 바오르 2세 믿음의 광장'에서 열린 혁명 기념식에서 개헌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오르테가는 1979년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을 이끌고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낸 후 1985년까지 6년 동안 집권했다. 그후 지난 2007년 1월 다시 선거에서 승리,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 중이다. 1995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 연임을 금하고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총 횟수를 두 차례로 제한하고 있다.
▲ 지난 19일 열린 산디니스타 혁명 30주년 기념식 ⓒ로이터=뉴시스 |
이날 기념식에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참석해 시선을 끌었다. 최근 중남미 국가들에서 잇따른 개헌 움직임이 나오는 것에 대해 차베스가 주장해 온 '볼리바리즘'이 중남미 좌파 정부들을 중심으로 본격 추진되는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볼리바리즘은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가 시몬 볼리바르의 '중남미 대통합 이상'을 구현하는 정치 이념으로, 차베스 대통령이 줄곧 주장해온 것이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미주기구(OAS) 대신 2006년 베네수엘라를 주축으로 창설한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를 라틴 아메리카의 중심축으로 제시한 바 있다.
중남미에 유행처럼 번지는 개헌 열풍의 시작은 차베스였다. 차베스는 올 초 개헌안을 논란 끝에 국민투표에서 통과시켰으며, 에콰도르와 볼리비아 역시 개헌 투표로 선거 재출마의 토대를 만들었다. 니카라과와 이웃한 온두라스에서는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다 지난달 말 쿠데타로 축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개헌 시도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20일자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SCM)에 따르면, 중남미의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과거처럼 우파세력에 의한 군사쿠데타의 조짐이 없는 상황에서, 오르테가의 개헌 발표는 곧 입헌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온두라스의 쿠데타처럼 오히려 우파세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산디니스타군 지휘관 출신이자 전직 장군인 휴고 토레스는 <CSM>에 "법과 제도에 반하는 쿠데타가 대통령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며 "그것은 전형적인 방식의 쿠데타는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만약 오르테가가 재출마를 위해 헌법 개정을 한다면, 그것은 니카라과의 '열대 파시즘'을 향한 결정적인 단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국민투표 과정이 공정하다면 개헌 자체가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찬성론 역시 존재한다. 우파 기득권 세력의 권력 재장악을 막기 위한 개헌이 오히려 필요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중남미 정치평론가 마이클 쉬프트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주도하는 ALBA 국가들은 중남미 지역의 '이데올로기 전투'에서 우파 독재자의 권력 회귀를 막기 위해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최근 혁명 30주년을 맞은 니카라과의 풍경과 최근의 개헌 움직임을 담은 현지답사 기사를 내보냈다. 아직 '완수되지 않은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니카라과의 현재를 짐작케 하는 <알자지라>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원문보기)
니카라과의 '끝나지 않은 혁명'
니카라과는 1979년 7월 19일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타락하고 잔혹했던 정권을 무너뜨렸던 산디니스타 혁명 30주년 행사를 준비 중이다.
요즘 수도 마나과를 거닐면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의 웃는 얼굴이 담긴 대형 광고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니카라과 정치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곳곳에 있는 혁명 기념일 포스터들은 오르테가가 2007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 대중과 언론 앞에 나타나는 것을 꺼려했던 행적과 묘하게 배치된다.
오르테가, 정치색을 바꾸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 사령관이었던 오르테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혁명 기간 동안 내세었던 사회주의적 공약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산디니스타의 상징이었던 적색과 흑색이 최근 오르테가가 등장하는 광고판의 바탕색처럼 분홍색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르테가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색을 바꾸고 있다는 지적이다.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 거리에 걸린 '혁명 30주년' 포스터. 산디니스타의 적색과 흑색이 아닌 분홍색은 이제 오르테가 대통령의 새로운 정치적 상징이 되었다. ⓒ로이터=뉴시스 |
1979년 당시 산디니스타 지휘관이었던 모니카 발토다노(Monica Baltodano)는 "오르테가는 과거 보수정권과 사실상 같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부는 자유시장주의를 신봉한다"고 비난했다.
소모사를 지원했던 미국
산디니스타 혁명 전 정권을 잡았던 소모사 정권은 미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았다. 미국은 그처럼 중남미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에서 벌어지는 일에 오랫동안 관여해 왔다.
소모사와 그의 아버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는 농민들로부터 막대한 수탈을 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에 반발한 혁명은 광범위하게 형성된 학생연합, 지식인, 농민을 바탕으로 한 FSLN에 의해 실현됐다. 오르테가를 필두로 한 9명의 사령관이 FSLN을 지휘했다.
3만 명이 넘는 니카라과인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산디니스타의 승리는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발토다노는 산디니스타의 목표가 상당히 야심차면서도 각 지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우리의 이상은 단지 독재자 소모사를 제거하는 것에만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극도의 빈곤상태에 시달리고 있던 조국을 새로운 사회로 바꿔내고자 했다."
"우리는 니카라과인 대수가 가지지 못했던 교육 받을 기회, 토지와 경제적 이윤에 대한 권리를 원했다."
미국의 반혁명 지원
혁명 성공 후 산디니스타는 경제계와 지식인, 보수주의자 정치인과 맑스주의 정치인 중에서 온건파들을 망라하는 국가재건위원회를 설립했다. 그것은 중미 지역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인 실험이었다.
새 정부는 정치적 다원주의와 혼합경제를 표방했다. 문맹률을 60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낮추는 문맹퇴치운동 역시 제시됐다.
그러나 니카라과와 공산국가인 쿠바가 밀접한 동맹을 맺고 니카라과가 새로운 정책을 펴 나가는 것을 본 미국은 신경이 거슬렸다. 특히 미국은 산디니스타가 인근 엘살바도르에서 맑시스트의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1981년 미 중앙정보국(CIA)는 소모사 독재정권의 경비대 잔당들로 구성된 반혁명군인 '콘트라'에 재정 지원을 시작했다. 명목상 비밀작전이었는데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후 10년 동안 산디니스타와 콘트라 반군의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니카라과는 두 동강이 나고 3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토록 심했던 내전은 다당제가 도입돼 선거가 치러진 1990년에 종결됐다. 내전으로 지친 니카라과인들은 그 선거에서 산디니스타와 오르테가를 거부했다. 대신 광범위한 보수주의자 연합이 정권을 잡았다.
패배를 인정하다
▲ 시민들이 산디니스타 혁명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산디니스타가 선거의 패배를 인정한 날은 니카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라미레즈는 결국 오르테가와 거리를 두게 됐고, 1990년대에는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현재 그는 오르테가의 가장 극렬한 비판자이기도 하다.
"나는 민주적 절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오르테가에 등을 돌렸다. 그는 어떤 비용을 치러서라도, 심지어는 헌법을 위배해서라도 산디니스타의 힘을 회복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산디니스타는 언제나 윤리적인 기본 원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윤리와 도덕은 완전히 사라졌다."
"전쟁과 협상, 무엇이 도덕적인가"
오르테가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적들과 타협함으로써 혁명의 원칙을 포기해왔다고 말한다.
1997년 오르테가는 개헌을 위해 집권 여당과 타협하고 사법부와 입법부를 포함한 주요 기관들에 대한 권력을 분점한다.
당시 대통령은 아르놀도 알레만(Arnoldo Aleman)이었는데, 그는 퇴임 후 국고 수백 만 달러에 대한 사기죄로 20년형을 선고받게 됐다.
오르테가는 그의 석방을 위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고, 알레만은 현재 야당의 총수이다.
이에 대해 <산디니스타> 신문의 전 편집장 페르난도 차마로(Fernando Chamorro)는 "오르테가는 알레만의 석방에 협력한 대가로 35퍼센트의 득표율로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전례 없는 선거법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엄한 낙태금지법을 통과시킨 것도 막강한 영향을 가진 가톨릭교회를 달래기 위한 오르테가의 양보안이었다고 생각한다. 가톨릭교회 수장인 오반도 요 브라보(Obando y Bravo) 추기경은 산디니스타의 첫 번째 집권기 당시 산디니스타의 맹렬한 비판론자였다.
오르테가의 타협적 행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한때 산디니스타의 사령관이었던 이든 파스토라(Eden Pastora)는 오르테가를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산디니스타의 사령관이었다가 1980년대 혁명에 환멸을 느껴 콘트라 반군 쪽으로 전향했다가 다시 오르테가 지지자로 돌아온 특이한 경력을 가진 그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탄하고도 거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건 더 나쁘다. 협상과 전투 중에서 무엇이 더 도덕적인가? 그게 바로 정치다. 권력을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타협은 정당하다. 정치는 깨끗하지 않다. 정치는 천사나 악마가 하는 게 아니다."
오르테가, 권력을 되찾다
두 차례 재선 시도에 실패한 후, 2007년 오르테가는 마침내 정권에 복귀했다. 겨우 36퍼센트의 득표율로 전임 콘트라 반군 지도자였던 모라레즈 카라조(Morales Carazo)를 제쳤다.
오르테가는 산디니스타 혁명 공약을 다시 한 번 약속했다. 그는 여전히 혁명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쿠바의 공산 정부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베네수엘라기 석유를 제공해 니카라과에는 이제 전기가 충분하다. 시골 길 역시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있다. 산디니스타의 첫 번째 통치가 끝난 후 다시 치솟았던 문맹률을 낮추는 일도 재개되었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여전히 서반구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다. 인구의 반이 심각한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어린 아이들 3명 중 1명이 영양실조 상태다.
수도 마나과에는 카지노와 거대 다국적 기업,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점 등 '자본주의의 장식품'이 눈에 띄지만 1972년의 상처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당시 대형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는 아직도 재건이 끝나지 않았다.
과거 20년 동안 집권했던 보수 정권은 수백 만 니카라과인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해 낼 수 없었다.
오르테가 재집권 시도에 대한 우려
오르테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권력에 집착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장기 집권을 위해 개헌을 시도한다고 비난한다. 이웃 온두라스에서도 그와 유사한 움직임 때문에 최근 쿠데타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60퍼센트 정도의 니카라과인이 개헌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당을 이끌고 있는 알레만은 개헌과 관련해 "오르테가와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권 복귀 후 오르테가는 대통령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에 다시 출마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엘 누에보 디아리오>(El Nuevo Diario)의 뉴스 디렉터인 다닐로 아퀴르(Danilo Aquirre)는 30년 전 권력에 눈먼 지도자에 반대하며 싸우다 죽은 그의 아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독재자의) 재선을 막기 위해 니카라과는 피바다가 됐다"며 "사람들이 재선을 반대한다고 외치며 길에서 죽어 나가는 것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모사와 싸운 이유다. 니카라과에서 재선 시도는 비극만 가져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르테가가 개헌을 밀어붙일 것인가의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헌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카라과 사람들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전히 산디니스타 사람들이 약속한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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