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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경제주의를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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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경제주의를 넘어서자

[장석준 칼럼] 새로운 전체를 제시해야 한다. 연대 사회를!

지난 번 칼럼에서 나는 촛불 시민이 무너뜨려야 할 것이 박근혜 정권과 재벌 체제만이 아니라고, 바리게이트 안쪽의 우상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글의 결론은 기성 사회운동이 새 세대의 사회 변화 요구에 부응하려면 '1987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련 기사 : '1987년 이데올로기'와 작별하자!)

그럼 '1987년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경제주의'를 강조하고 싶다. 경제주의란 무엇인가? 경제적 이익 추구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태도다. 그래서 다른 가치조차 경제적 합리성의 틀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태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주의는 너무도 당연한 전제이기에 특별히 '이데올로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주류 경제학은 모든 인간이 경제주의에 따라 행동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대체로 그렇게 행동한다. 오직 과거 역사와의 대조를 통해서만 이게 우리 시대만의 특징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본주의 태동기에는 자본가 집단의 독특한 사고 및 행동 양식이던 것이 이제는 지구 자본주의 안에 살아가는 거의 모든 대중의 문화가 됐다.

한국적 경제주의 – '추격' 의식

경제주의는 한국에만 유별난 현상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경제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유독 강한 힘을 발휘하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린 경제주의의 독특한 형태가 존재하며, 이것이 특히 지배력을 행사하는 영역이 따로 있다. 말하자면 '한국적' 경제주의가 있다.

한국적 경제주의의 발단은 박정희 정권 이래의 압축 성장이다. 이 시기에 국가 권력은 시민들에게 지적, 도덕적 스승으로 군림했다. 단순히 군홧발로 짓누르기만 한 게 아니다. 삶의 모범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국가가 '좋은 삶'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그 실천 지침까지 꼼꼼히 교시했다. 새벽마다 TV에서는 박정희가 작사, 작곡했다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반복하며.

국가가 제시한 '잘 사는' 것, '좋은 삶'이란 무엇이었던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일단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초가집이 없어진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넓힌 길은 자가용 승용차가 가득 채웠다. 그것은 이른바 선진국의 막연한 이미지였다. 정부 선전과 기업 광고, 주류 매체의 프리즘을 거쳐 대중의 눈에 비친 선진국, 주로는 미국의 이미지였다.

압축 성장의 지휘자인 국가 권력은 선진국들을 '추격'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경공업을 따라잡고, 중화학공업을 따라잡고, 정보화를 따라잡고, 그러다 보면 우리도 선진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추격은 지구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줄곧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생존-발전 전략이었다. 영국 이외의 모든 공업국은 어느 정도는 추격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한국의 추격에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앞선 공업국들을 따라잡으려고 사회 역량을 총동원했다. 국가기구의 지휘를 받으며 모험 투자에 나선 재벌도, 노동조합도 제대로 없이 노동 경쟁에 내몰린 노동자도, 고향을 떠나 이제 막 낯선 도시의 달동네에 정착한 이농민도 모두 다 추격전의 경기장에 섰다. 역사상 1930년대 소련 말고는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산업화 총력전이었다. 그러면서 추격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스며들었다.

국가가 제시한 '좋은 삶'의 이미지를 따라잡는 게 보편적인 삶의 목표가 되어갔다. 앞선 이들이 거둔 경제적 성공을 나 역시, 우리 가족 역시 반복해야 했다. 후발 재벌은 앞선 재벌을 따라잡고, 중간층은 부유층을 따라잡고, 가난한 이들은 중간층을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즉, 전 사회적인 추격전 양상이 나타났다. 국가는 선진 자본주의를 추격했고, 시민들은 '좋은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간 듯 보이는 바로 위 계층을 추격했다.

이런 '추격' 의식을 통해 이 나라에는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 빠르고 깊게 경제주의가 뿌리내렸다. 상층 계급을 추격 대상으로 보는 한, 계급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질 수 없다. 본래 계급이란 거리 두기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거리를 둘 때, 비로소 노동 '계급'을 말할 수 있다. 이 거리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계급의식'이 형성된다. 자본가 집단에게 친숙한 경제주의 이데올로기는 이 간극을 뛰어넘는 데 애를 먹는다. 자꾸 경제적 이익 아닌 다른 가치를 내미는 집단적 고집, 자부심, 기풍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격 상황에서 거리란 좁혀야 할 무엇일 뿐이다. 중간층에게 부유층은 미래의 자기이고, 노동자들에게는 중간층이 그렇다. 그럴수록 상층 계급의 사고 및 행동양식이 쉽게 아래로 퍼져나간다. 이게 압축 성장 시기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가기구와 자본가 집단이 솔선수범한 경제주의 이데올로기를 너도 나도 열심히 모방 학습했다. 하루빨리 따라잡아야 할 '좋은 삶'의 이미지와 경제적 이익 추구를 점점 더 일치시키면서 말이다.

대중의 경제주의를 정당화해준 1987년 이후 사회운동의 경제주의

'1987년 이데올로기'의 경제주의는 이런 대중의 경제주의 자체는 아니다. 이를 뜻한다면, '1987년 이데올로기'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해를 따서 '1962년 이데올로기'라 하거나 유신 독재 수립 이후 새마을 운동이 요란하게 확대된 해를 따서 '1973년 이데올로기'라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1987년 이후 진보 세력과 사회운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경제주의가 이완되기는커녕 더욱 확산되고 강화됐다는 사실이다. 1987년 이후의 사회운동은 경제주의와 대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제주의가 전성기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주고 자기 정당화 논리를 제공했다. 대중의 경제주의를 오인하고 이와 결탁하도록 부추긴 사회운동의 경제주의가 작동했다.

냉정히 돌이켜보자. 1987년부터 지금까지 민주화 세대, 민주노조 1세대가 현실에서 이뤄낸 것은 무엇인가? 집단적 추격의 성공이다.

과거에는 국가 권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저마다 추격전을 펼쳤지만, 1987년 이후에는 추격에서 뒤쳐진 이들이 힘을 모아 국가 권력과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충돌을 통해 나아가려는 방향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3저 호황 이후 전성기를 맞이한 한국 자본주의에 편승해 앞선 이들을 따라잡으려 했다. 덕분에 민주화 세대는 국가가 그토록 선전하던 '좋은 삶'의 이미지가 실제 어떤 것인지 맛보았고, 상당수 조직 노동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진보 세력(나도 그 일부이니 아래 내용은 '자기' 비판이기도 하다)은 이런 흐름에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이를 옹호하고 역사 진보의 의미를 부여했다. 진보좌파는 기업별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에서 '계급투쟁'을 보았다. 물론 이게 계급투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한국적 맥락이 있었다. 자본과의 치열한 대립 이면에서 한국적 경제주의의 핵심인 추격 의식이 반복, 확산되고 있었다. 진보좌파가 계급투쟁의 전진에 가슴 벅차 한 그 순간에 실제 전진한 것은 대중의 경제주의였다.

이런 오인과 무능의 근저에는 노동 '계급'을 둘러싼 지극히 단순한 관념과 환상이 있었다. 진보좌파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층위의 노동 계급만 존재했다. 하나는 경제적 피착취자인 현재의 노동계급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래에 모든 모순을 해결할 주체인 혁명적 노동계급이었다. 그리고 전자를 후자로 성장시키는 것이 계급투쟁이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이런 관념에 따라 노동조합의 모든 투쟁을 '계급투쟁'이라 정당화했다. 이 틀에서는 집단행동의 주된 동기가 단지 경제적 이익 추구인지 아니면 이를 넘어선 가치를 동반하는지 식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위의 두 노동 계급은 실재라기보다는 허구에 가깝다. 단순히 자본의 피고용자라는 위치만으로는 노동 '계급'이라 하기 힘들다. 아직 사회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 주역으로서의 노동 계급은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현실의 노동 세력이 그런 존재에 근접한 순간들(가령 100년 전의 러시아 대도시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예외적' 순간 쪽에 더 가까웠다.

노동 '계급'이란 말에 부합하는 실체는 오히려 이 두 허구 사이의 어떤 존재다. 달리 말하면, 노동 계급의 또 다른 층위가 존재하며, 실은 이게 '현실' 노동 계급이다. '경제적' 노동 계급과 '혁명적' 노동 계급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회적' 노동 계급이 그것이다. '사회적'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상식과 표준으로 들이미는 지배 집단과의 거리를 통해 식별된다. 이들은 항상 지배 집단과는 구별되는 신념과 정서, 가치를 내세울 준비가 돼 있기에 경제주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포섭되었다고 말하기 힘든 집단이다.

한국의 진보좌파가 수용한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사회적' 노동 계급의 존재를 전제하는 이념-운동이었다. 이 층위의 노동 계급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계급 투쟁'을 이야기하며 '혁명이냐 개혁이냐'를 논쟁하는 사조였다. 한 세기 전의 유럽에서는 이게 별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이념-운동이 번성할 무렵에 실제로 이런 노동계급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노동계급, 그러니까 실제의 노동 '계급'이 어떠한 존재이고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론화하는 작업도 뒤늦게야 등장했다. 이런 노동 계급에 해체 위기가 닥칠 즈음에야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좌파는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당연시되던 이 현실 전제가 한국 사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전투적 민주노동조합들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담론의 현실 근거를 찾았다. 마치 '사회적' 노동 계급이 이미 등장했다는 듯이 고전 사회주의 담론을 반복했다. 그래서 대기업, 공공부문의 분파적 경제 투쟁이 곧 '계급 투쟁'이 됐다.

이는 민주노동조합운동에도 결코 좋은 일이 못 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신생 노동조합운동은 다양한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었다. 집단적 추격 운동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짙기는 했지만, 자본-국가가 결코 교시한 바 없는 사회 연대의 씨앗도 담고 있었다. 후자를 찾아내고 성장시키는 것이 진보 세력과 사회운동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변별과 발견, 양육의 노동에 실패했다. 이것이 촛불 이후 우리가 극복해야 할 '1987년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진보-사회운동의 경제주의다.

새로운 전체를 제시해야 한다 – 연대 사회를!

어떻게 해야 진보-사회운동의 경제주의 경향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해답을 찾으려는 모색은 이미 여러 곳에서 시작되는 중이지만, '1987년 이데올로기'의 관성이 이런 시도들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항쟁으로 1987년 항쟁 이후의 한 시대가 매듭을 지은 지금은 더 이상 이런 관성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치부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기성 사회운동과 2017년 세대의 만남은 영영 기약할 수 없다.

아마도 출발점 중 하나는 '계급 투쟁'이라는 말로 흔히 상상하던 바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가장 흔한 것은 사회 세력들이 전체를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투쟁한다는 관념이다. 서로의 몫이 있고 그 몫을 늘리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또 다른 통념은 전체의 참 주인을 가리려고 투쟁한다는 것이다. 빼앗겼던 전체를 일거에 되찾는다는 식의 혁명관 말이다.

그러나 사회 세력 사이의 투쟁은 이제 이것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고 상상해야 한다. 누가 더 나은 전체를 제시하는지를 놓고 벌이는 싸움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는 더 매력 있고 인간적인 전체를 예시하는 세력이 승리하는 싸움이다.

전체란 곧 '사회'다. 그리고 부도, 권력도 없는 세력이 내세울 전체의 미덕이란 '연대'뿐이다. 여기에서 경제주의의 질긴 관성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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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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