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읽은 올해의 신년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예년과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평이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는 듯하다. 그렇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이를 중심으로 2017년 북한을 둘러싼 변화 양상들을 짚어보고 우리의 대처 방향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인민의 충복'을 맹약하고 민심을 챙기는 김정은
북한 체제의 특성상 영구 임기가 보장된 최고지도자의 위상은 절대왕정을 넘어선다. 그런 권력자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의 민심에 신경을 쓰면서 '인민을 충직하게 받들어 나가는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은 참으로 파격적이다.
신년사를 읽기 전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5번째 신년사 연설이었는데 싱글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 이 역시 처음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수령은 잘못이 있을 수 없는 무오류의 존재임에도 신년사 마지막 부분에서 "언제나 늘 마음 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서 한 해를 보냈는데…"라는 식으로 자기를 낮추는 발언도 했다. 이 역시 처음이다.
여기에 더해서 당을 비롯한 모든 기관은 '인민 제일주의'를 관철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김정은 본인도 북한 주민들을 보다 잘 섬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까지 한다. 김정일 사후 5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혹시 한국사회의 촛불 민심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것일까? 일을 열심히 하자는 차원에서 "일군들은 패배주의와 보신주의, 형식주의, 요령주의와 단호히 결별하고 당의 구상과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한몸을 초불처럼 깡그리 불태워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의 현상을 지적하는 말 바로 앞에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과도기를 거쳐 김일성-김정일과는 차별화되는 리더십의 모습을 구현해 보려는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난해 12월에 처음으로 개최된 전당초급당위원장대회를 언급하면서 위와 같이 패배주의, 보신주의, 형식주의 및 요령주의에 대한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는 북한 사회에 만연해 있던 문제점들에 대해 상층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됐으니, 이제는 하부 단위를 정비하겠다는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이들이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이기 때문에 주민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북한 사회의 고질병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009년 5월부터 시작했던 150일 전투와 연이은 100일 전투는 김정은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북한 경제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작업이었는데 대부분의 단위에서 형식적인 허위보고를 했고, 이를 믿고 실시한 11월 30일 화폐교환 조치로 큰 실패를 경험했다.
직후 김정은 위원장은 거짓 보고하는 사람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했다고 한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2~3년 동안 군을 비롯해서 고위직들의 계급장이 널뛰기를 하면서 변동이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난 수년 동안 작업의 결과 상층부의 기강을 어느 정도 잡았다는 판단에 기초하여 이제는 인민을 위해 헌신 분투하라며 중하급 관리들의 기강을 잡으려고 나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 장악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북제재에 맞서 자강력 강화에 주력
여러 사안들이 있으나 북한 역시 문제는 경제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면 경제 문제 해결을 우선순위에 둘 수밖에 없다. 북한은 2016년 5월, 36년 만에 당 대회를 개최하고 국가개발 5개년 전략을 추진하기로 했다. 당 대회 직후 전략 수립을 위한 200일 전투를 실시하여 12월 15일에 공식 종료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각 기관 단위별로 5개년 전략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5개년 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첫해인 2017년에 경제부문에서 김정은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강력이다. 북한은 원래 자력갱생을 경제운영의 모토로 삼아 왔으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자력갱생 경제가 무너지면서 2000년대에 북한은 생존을 위해 외부의 지원을 요청하고 버텼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농지와 물길을 정비하고 다양한 발전소들을 건설했다. 중국기업들의 자본을 이용해서 석탄광을 정상화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 석탄 수출을 늘리기 시작한 이후 6년의 시간이 지났다.
북한은 1950년대에는 전후 복구를 위해, 그리고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분야의 설비를 개조하기 위해 지하자원을 집중 수출해서 외자를 끌어들인 사례가 있다. 평상시 북한의 지하자원 수출은 전체 수출에서 약 10% 내외를 차지하는데 2010년 이후 지금까지는 대략 4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수출해서 확보한 외화자금으로 북한은 농업 및 경공업 분야에 집중 투자했다. 그 결과 지금은 먹는 문제와 생필품 조달 문제가 최저 수준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비록 평양시에 국한되지만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국제사회는 북한의 석탄 수출을 억제시키는 강력한 대북경제제재 2321호를 채택했다. 물론 중국 정부가 제재안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관건인데, 일단 중국 외교부는 성실히 이행할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중국 정부가 북한의 석탄 수입을 쿼터제(4억 달러 또는 750만 톤 중 작은 것)로 운영하게 된다면 북한은 타격을 입게 된다. 더욱이 국가개발 5개년 전략은 대부분 지하자원 수출을 전제로 책정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은 자강력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탄소하나화학공업' 구축을 주문하고 있다. 탄소하나 화학공업은 다소 생소한 표현이지만, 북한 경제의 연원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이해되는 면이 있다. 북한은 1960년대에 석유화학에서 나오는 나일론 대신 석탄화학에서 나오는 비날론을 선택했다. 북한의 화학공업은 석탄화학이 중심이다. 부존량이 많은 석탄을 주 에너지원과 원료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선택이었다.
탄소하나화학은 일산화탄소, 메탄올과 같이 분자 안에 한 개의 탄소를 가지고 있는 화합물로부터 2개 이상의 탄소를 가진 유기화합물을 만드는 합성화학이다. 이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전후였는데, 김정은 위원장은 이 분야를 하나의 상용화되는 산업 분야로 만들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탄소하나화학의 주원료는 석탄이다. 즉 석탄 수출이 막히게 되면 예전과 같이 10% 정도만 수출하고 나머지는 내수로 돌려 에너지 및 공업 원재료를 확보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전력공급과 식량 및 생필품 공급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데 기초해 외부의 지원 없이도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화와 협력을 원하는 북한
다음으로 미국과 무척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2016년에는 수소탄 실험도 성공했고, 핵폭탄 소형화도 성공했다고 하면서, 이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도 완성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자랑했다.
이는 국제사회에 대한 군사적 도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직 ICBM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과 미국이 대화에 응하면 협상에 나설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와 무척 대화하고 싶다는 점을 강조한 북한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북한의 ICBM 보유에 대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우선 순위로 여기는 중국 문제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활용할 만한 카드가 있다면 미국과 북한의 대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이러한 대화를 한국이 나서서 주선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난다.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려는데 주력하지 말고, 남북한의 협력을 원하는 북한의 진정성을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북한이 협력하는 것에 대해 미국은 방해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기부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남북한이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자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핵실험까지 자제하면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남북대화를 세 차례나 직접 요구하기도 했다. 2015년 말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사망한 이후 북한은 대남 강경 기조로 전환했으며, 급기야 2016년에는 두 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미국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북한의 외무성은 말레이시아와 제네바에서 미국 측 전문가들과 회의를 갖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가 어떻게 나올지를 주목하는 가운데 미국과의 대화를 희망하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 또한 원하고 있다. 물론 자신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도발을 불사하겠다는 북한식 과격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말이다.
2017년 한반도 평화는 한국의 적극적 역할에 달려 있다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를 보게 되면 2017년에는 경제문제에 집중할 것이며, 한국, 미국 측과 대화를 원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전제 조건 없는 대화'라는 것이 걸림돌이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핵 포기 선언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아직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를 겨냥한 말을 하고 있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기존의 환경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예측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 역시 국내외 정세가 매우 불확실한 상황일 뿐만 아니라 외교의 컨트롤타워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이 방향을 설정할 때까지, 그리고 북한이 행동으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한반도의 모습은 무엇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 시점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북한이 핵 개발을 지속하는 것은 심각한 위협이다. 그럼에도 압박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압박에 대비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압박을 위한 경제제재는 김정은 정권이 사회주의의 틀 속에서 북한의 시장화를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있는 면이 보인다. 북한의 시장화는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공식경제부문과 더욱 연계되어 확장되고 있지만, 북한의 공식경제부문으로 흡수될 가능성도 높다. 북한의 시장화는 북한 핵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중요 단초이지만, 지속되는 경제제재로 오히려 북한이 제재를 버텨낼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남북관계를 한국이 주도적으로 운영할 때는 미국과 일본이 이에 맞춰 동조해온 측면이 있다. 미국과 일본은 동북아 지역에서 남북한의 문제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 한미일 동맹구조이며, 따라서 한국이 한미일 동맹구조를 벗어나서 중국으로 편향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현재도 유효하다. 또한 신년사의 행간과 이면에서 북한의 생각도 드러났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 평화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에 달렸다. 우리 생각대로 설계를 하면 그 자체가 밑그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한국의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정책 제안과 추진이 요구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북한 핵으로부터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국의 정치인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워싱턴에 와서 하나같이 물어보는 말이 '미국의 한반도 통일정책이 무엇이냐'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통일정책이 무엇이며 이를 위해 미국이 무엇을 도와야 할 것인지 미국 정치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지금과 같이 미국의 신 행정부가 막 출범하고 한국에서 리더십의 교체가 임박한 바로 이때가 평면적 사고에서 벗어나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할 적기다. 우리의 적극적 역할이 가능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만 한반도에서 대화국면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평화와 통일에의 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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