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핵발전소가 얼마나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깨우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어 지난 9월 12일 ‘경주지진’을 통해 대한민국이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시켰다.
아직도 동일본 대지진과 경주지진의 ‘공포’가 채가시지 않은 시점에 최근 일본 ‘탈핵운동의 대모(大母)’로 알려진 키요코 미토 여사(81)가 대한민국 ‘탈핵운동의 성지’인 강원 삼척시 근덕면을 찾았다.
그는 일본 정부와 ‘핵 마피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본의 대표적 ‘탈핵운동가’다.
탈핵운동으로 핵 마피아에게 협박받던 그의 남편은 쌍둥이 아들과 함께 겨울산행 도중, ‘의문사’를 당했는데 꼭 30년 전의 일이다.
그는 지난 5~7일 근덕면 노곡리 ‘원전백지화 기념비’를 찾아 지역 주민들이 32년 전부터 핵발전소 설치를 결사항쟁으로 막은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한국과 일본 정부가 핵발전소 건설과 가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한 핵발전소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며 핵발전소 추방운동이야 말로 남은 인생의 최대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핵발전소 반대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들이 최근 수년동안 삼척시장과 시의원, 국회의원으로 잇따라 당선된 내용을 전해듣고 높은 시민의식을 칭찬했다.
지난 6일 프레시안 취재진은 삼척시 근덕면 노곡리에서 미토 여사와 만나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피해실태 등을 들어봤다.
일본에서 남편은 탈핵운동의 선각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남편 미토 이와오씨는 도쿄대 핵물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탈핵운동에 앞장섰다. 대학시절 남편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인류를 위해 살겠다며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 때문에 나도 의학에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979년 스리마일,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당시 일본은 핵발전소 건설에 혈안이었는데 남편이 결사적으로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했다.
그러자 핵 마피아들은 온갖 협박을 해왔는데 우편물에 손가락을 잘라 보낼 정도였다. 협박에 못 이겨 집을 오사카로 옮기기도 했다. 당시 남편은 아시아 탈핵운동가들에게 정신적 사부로 알려질 정도로 탈핵운동에 온 몸을 던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의문사 했다고 알려졌다
“핵 마피아에게 무서운 협박을 당하던 1986년 12월 일본의 북 알프스로 알려진 곳에 쌍둥이 아들과 겨울산행에 나섰다. 머리도 식히려고 떠난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난소식을 듣고 현장에 달려갔는데 추락했다는 당국의 발표와 달리 남편과 두 아들은 텐트 안에서 등산화를 벗은 채 숨져있었다.
현장의 구조대원은 예리한 흉기로 살해된 것 같다는 귀띔을 했다. 당시 남편은 53세였고 아들은 25세의 대학생 이었다. 남편의 몸은 산행으로 단련되어 산악 전문가나 마찬가지였다. 경찰수사는 원점에서 맴돌았고 결국 의문사로 매듭지어졌다. 언론은 단순 사고사로 보도했다. 너무 허망하고 황당해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딸 때문에 죽음의 길을 따라 갈 수도 없었다. 자포자기 심정에 외국으로 무작정 배낭여행을 떠났다.”
어떻게 탈핵운동에 나섰나
“중국의 오지여행을 하면서 어린 아이가 높은 산을 몇 개나 넘어 학교 다니는 것을 보고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남편과 아들의 사후 13년 간 방황했다. 그러다가 1998년 탈핵운동을 하던 사와무라 가즈요씨를 대만에서 우연히 만났다. 사와무라씨 덕분에 남편이 눈앞에 환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전에 탈핵운동을 했던 사실을 회고하면서 그와 함께 탈핵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후쿠시마는 대한민국 삼척처럼 매우 아름답고 수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후쿠시마는 사랑하는 남편의 고향이기도 하다. 삼척을 보면서 후쿠시마의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만의 주민이 거주하던 후쿠시마는 2011년 3월 11일 진도 9의 강진으로 핵발전소는 재앙의 진원지가 됐다. 그러나 당국은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아이들과 주민들의 피해가 컸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능은 앞으로 10만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고 이후 후쿠시마 지역의 주민과 아이에게 총탄이 몸통을 통과하듯 방사능이 몸의 뼈와 내장을 통과하면서 달라붙었다. 후쿠시마 아이들 가운데 만 18세 이하 어린이 174명이 갑상선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 더 많은 아이들이 갑상선암을 비롯해 방사능으로 심각한 질환에 고통받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후쿠시마를 떠났다. 현재 후쿠시마 주민 가운데 기러기 부부처럼 따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40%를 넘는다. 또 9만이 넘는 주민들은 난민생활을 하고 있다. 5년이 지났지만 사고현장 반경 20키로미터 이내에는 접근도 못한다. 이웃나라인 한국에도 상당한 피해가 불가피하다.”
듣던 내용보다 더 충격적이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일본의 54개 핵발전소 중 3곳만 가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기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지 않는등 전혀 문제가 없다. 전기를 아껴 쓰며 핵발전소 가동을 못하게 소송도 하고 투쟁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 폭발사고 5년이 지나자 멈췄던 핵발전소 가동을 준비하고 방사능과 세슘 수치를 높이며 안전하다고 주민을 현혹하고 있다.
전쟁 말고 한 마을이나 도시가 통째로 이주하는 경우는 핵발전소 사고가 유일하다. 언론도 핵발전소 피해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당국은 주민건강과 생명에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감추거나 수치를 낮추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일본이 상당 부분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핵발전소 관련 정보 숨기기는 창피할 정도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커진 것도 당국에서 정확한 정보를 제때에 즉시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방사능 누출이 가장 많은 시간에 급수차에서 물을 받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또 방송에서 피폭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보도를 믿고 대피하지 못해 더 많은 피해를 당했다. 아름다웠던 후쿠시마는 이제 사람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삼척지역은 32년째 핵발전소 반대투쟁에 나서고 있다
“삼척시민들이 매우 존경스럽다. 삼척핵발전소 반대투쟁위 위원들의 헌신적이 투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삼척의 미래가 희망적이다. 장호중학교는 울진 핵발전소와 직선거리로 25키로미터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핵발전소가 존재하는 한 한국에도 아이들의 미래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삼척지역은 후쿠시마 지역과 매우 흡사하다. 한국에서 핵발전소 폭발사고가 발생하면 피난할 곳이 없다. 반경 300키로미터 지역은 방사능 피폭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지만 핵반전소 인근에서 왔다고 왕따를 당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은 후쿠시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국에서는 핵발전소 발전단가가 가장 저렴하다고 하지만 실제는 가장 비싸다. 최근 당국은 후쿠시마 제1원전의 사고처리 비용이 209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배상금을 제외한 금액이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이 왜 핵발전소를 포기하지 않고 있나
“핵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핵무장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핵마피아 집단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핵발전소로 인한 방사능와 세슘 등의 피폭 한도를 높이는데 식품은 500배가 넘고 식수는 무려 수십만배 수준이다. 군사적인 이유가 절대적이다.”
삼척과 인연이 깊다
“그렇다. 지난해 9월 삼척과 영덕, 서울, 부안, 위도, 영광 등지를 순회하며 핵발전소 토크쇼를 진행했다. 원불교 환경연대 탈핵정보연구소의 초청으로 마련된 지난해 행사는 나를 탈핵운동에 동참하게 만든 사와무라씨와 함께 ‘탈핵, 할매가 간다’는 제목으로 열렸다. 삼척의 이옥분씨로 인해 팔순잔치를 가는 곳마다 성대하게 치렀다.
이번에 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 지도부와 만나 뜻 깊은 간담회도 가졌다. 또 장호중학교 학생들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피해실태를 간략하게나마 알려주기도 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삼척이 아이들과 미래에 영원히 남겨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핵발전소가 절대 설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쿠시마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삼척지역을 꼭 보여주고 싶다. 삼척시민들이 핵발전소 반대투쟁으로 청정해안과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 현장은 역사가 살아 있는 산 교육장이기 때문이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미토 여사는 연금으로 생활하면서도 2003년 부안 핵폐기물 유치반대투쟁현장에 100만 엔을 지원해 부안주민들은 그를 ‘1000만 원을 쾌척한 할머니’로 부르고 있다.
특히 그는 다카하마핵발전소 정지 가처분 소송을 주도해 승소하기도 했다. 또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피폭을 당한 아이들을 위해 ‘아동탈피폭재판모임’을 주도하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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