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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노동력 2% 시대, 아이들 직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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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노동력 2% 시대, 아이들 직업은?

[민들레] 장래 희망,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

미래로부터의 방문

지난 3월에 강원도 인제로 이사를 와서 얼마 전부터 지역 자유학기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교육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강의가 안 풀린다. 매번 쩔쩔매고 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청소년 강의는 자신이 있었다. 늘 청소년과 만나는 현장에 서면 더 펄펄 신 났고, 반응도 좋았다. 나름 내 강의는 청소년들과 코드가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뭐가 문제인 걸까?

어쩌면 '진로'라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진로라는 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동안 해온 강의주제는 청소년의 현실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었다. 폭력, 왕따, 성적, 알바노동, 청소년 참정권 등.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청소년들 자신이 화자가 되었고, 현실을 가르쳐주는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미래'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미래에 대해선 그다지 할 말이 없다. 난들 미래를 아는가. 하면 할수록 고민이 깊다. 어쩌면 진로교육이란 것 자체가 애당초 청소년들의 현실 문제와 고민을 같이 풀어가기보다는 그들의 미래에 대한 어른들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떤 교육이든 당사자의 자기 동기가 없는 상태에서는 집중도 열의도 생기기 힘든 법이다.

재밌는 강의를 해보면 어떨까? 재미를 주는 여러 가지 '장치'를 고민해본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두 시간의 집중을 위해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가 고민의 중심이 된다. 인기강사의 레퍼토리를 참고해본다. PPT는 현란하다. 역시 장치의 미학이다. 시간은 금방 가지만 그런 강의들은 대부분 헛다리를 짚는 오락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 대박, 의지와 열정과 '노오력'의 감동 스토리. 들을 때는 잠시 감탄하지만, 그저 한두 시간의 공상여행으로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어차피 남이 주인공인 인생드라마다. 드라마가 끝나면 내 삶은 더 초라하게 그대로인 채 현실에 버려지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같이 걸어가야 할 길 위에 서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현재에 개입할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을 갖지 못했을 때 미래는 공상이 되고 만다. 어른도 마찬가지 아닌가. 미래의 세계여행이란, 꿈을 꾸어도 그걸 위해 적금이라도 붓고 있는 현재가 있을 때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런데 10년, 20십 년 후에 대한 계획을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구체적으로' 세워보라니. 어른들은 그게 가능한가?

그런데도 진로교육은 마치 어른들이 아이들의 미래인 것처럼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 교사는 먼저 그 길을 걸어가 본 사람으로서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이드'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들의 미래인가? 아니다. 그건 나이를 시간으로 착각하는 데서 오는 '착시'일 뿐이다. 그들은 나의 어린 시절이 아니고 나는 그들이 살아갈 시간을 먼저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고, 그들의 미래는 곧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 나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걸어가 보지 않은 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미래와 나의 현실 사이에는 공집합이 없다.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의 미래를 함께 바라보기 시작해야 한다.

누가 우리의 노동을 무가치하게 만드는가

미래학에 따르면, 앞날에 우리의 직업 태반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진로체험교육은 다 뭐란 말인가. 강의 때 쓰는 KBS <명견만리>라는 영상자료는 볼 때마다 충격적이다. 2013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나온 '우리의 직업을 얼마나 컴퓨터에게 내줄 것인가'란 제목의 보고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에 있는 702개 직업 중 20년 안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47퍼센트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통해 컴퓨터가 승리하는 장면을 눈으로 본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이 이야기를 거부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믿어버린다.

▲ '진화학자'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지난해 9월 KBS <명견만리>에서 아이들의 미래 일자리 문제를 짚었다. KBS 화면 갈무리.

아이들이 말하는 장래희망 대부분도 사라질 직업의 목록에 들어 있었다. 미래에 사라질 일에는 나의 일도 포함되어 있다. 대학교수는 선망의 직업이었지만 앞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에 속해 있고, 이미 교수직의 하층계급인 대학강사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교사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배우, 요리사, 아나운서, 기자, 회계사, 변호사, 법무사, 교사, 교수, 약사, 의사, 공무원 등. 대체 안 사라질 직업이 뭔가 싶을 정도다. 이유가 무엇일까?

"왜 교사가 없어질까요?" 학생들은 금방 대답한다. "인강(인터넷 강의)!" "그럼 배우는요?" "씨지(CG)!" 단답형으로 툭툭 던지는 대답은 과연 현실에 대한 직관력을 보여준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이런 직업들이 정말 다 없어져도 되는 걸까요?" 가치판단을 요구한다. "음, 선생님이 없어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인강은 재미없어요." 그렇다. 우리는 이 직업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데 가치판단 없이 동의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삶에서 그런 일이 사라져도 좋은가에 대해,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물어야 했다.

▲ <노동의 종말>(제러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사실 이런 미래에 대한 경고는 이미 20년 전에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영호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안에 세계 전체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데 인간 노동력의 2퍼센트만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단기적으로 살아남을 직업은 기업가, 과학자, 기술자, 프로그래머, 교육자, 컨설턴트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예측했다.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저임금 불안정 단순노동자 아니면 실업자가 된다. 이런 사태를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는 지금 '노동의 종말'을 '직업의 소멸'로 바꾸어 부르고, '구조조정'을 '기술혁신'이라 부르고, '해고'와 '실업'을 '기술대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하는 수업의 반만 인터넷 강의로 대체해도 교사는 절반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아니 전부 '인강'으로 대체하고 교실 관리만 하는 '보조교사'로 전원을 대체한다 해도, 학교는 유지될 것이다. 그 정도 교실을 관리 운영하는 보조교사의 역할은 낮은 단계의 인공지능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므로 나중에는 교과담당교사, 담임교사 대부분이 사라지고, 관리직·특수직 같은 최소한의 인력만으로 학교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아니, 학교 자체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건 단지 교사라는 직업의 위기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학교가 사라지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라고? 나는 지금과 같은 학교와 대학이 해체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배움의 연대와 공동체로 재구성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본에 의해 시장주의적으로 해체되어버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정말로 로봇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경쟁자일까?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은 기술발전이 가져올 미래를 운명처럼 자명하게 받아들이면서 왜 그것을 거부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본질적인 것은 '인간 대 기계'의 구도가 아니다. '기계와 인간의 경쟁 구도’는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비인간화’를 은폐한다. 인간의 노동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인간을 기계처럼 취급하고 기계보다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질 때 가차 없이 대체해버리는 자본의 냉혹함이다. 그런 미래에서 살고 싶은가, 라고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시나리오는 그런 미래에 대해 마치 당연한 결과처럼 묘사함으로써 그 미래에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미래학이 눈속임같이 느껴진다.

사라질 직업의 목록에서 '요리사'가 나오자 자기 꿈을 요리사라고 썼던 아이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왜요? 외식 많이 하니까 요리사는 안 사라질 것 같은데." 요리사는 왜 사라질까? "지금 식당 주방에서 하는 일이 뭐게요? 요즘도 프랜차이즈 식당 같은 데선 사실 요리를 거의 안 하거든요. 본사에서 재료 받아서 매뉴얼에 적힌 정량대로 넣고 끓여서 완성품 모양대로 똑같이 그릇에 담아내는데, 그건 요리사 일이 아니잖아요." 프랜차이즈 뷔페의 오픈 키친에서 요리사 옷을 입고 요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요리사들이 아니라 저임금 단순노동 종사자들이고 대학생 알바들이라고 말해 준다. 아마 앞으로 인간의 몫으로 돌아올 일자리의 태반은 그런 것이겠지.

"그럼 이제 어떡해요?" 그 막막해지는 눈빛을 차마 마주칠 수가 없다. 내가 묻고 싶다. "어떻게 할까요?" "로봇을 부숴요!" "인강(인터넷강의)도 뽀개버려요!" 이게 청소년들이 미래를 대비하며 현실에서 개입하는 방법이다. 역시 그들에게 물어봤어야 했다. 앞으로 컴퓨터를 부수는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난다면, 그 주체는 청소년들일 것이다. 그럼 이제 사라질 직업의 목록에 들어 있는 직업들은 다 포기해야 할까? "아니죠, 하고 싶으면 계속해야죠. 다만 그 일이 단지 '유망직업'일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라면 미련 없이 버리세요."

진로교육은 조기 취업교육인가

사정이 이런데도, 교육부가 진로교육에 매진하는 이유는 취업난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실업 문제는 노동시장과 노동의 조건이 변화한 탓이지 학교에서 진로교육을 안 해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진로교육은 지금 학생들의 진로 문제, 더 정확히는 취업 문제가 교육과정에서 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로교육이라는 교육과정을 통해 풀 수 있는 것처럼 접근함으로써 문제의 진짜 원인을 감추고 현실을 왜곡한다. 마치 사회의 끔찍한 사건들이 학교의 '인성교육' 부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에도, '인성교육'을 교육과정에 신설하는 것이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노동의 조건 자체가 열악해지는데 이것이 학교의 진로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게다가 엉뚱하게 미래학을 가져와 '미래를 제대로 예측하고 준비하지 못한다면 실패할 것'이라며, 취업을 못하는 것을 개인의 미래 예측 실패 때문인 것으로 돌린다.

결국 지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진로교육은 사실상 조기 취업교육에 다름 아니다. 진로교육의 모델은 학생 개인의 특기, 적성과 미래의 유망산업 분야를 잘 연결할 수 있도록 경로설계 해주는 것을 기본 틀로 하고 있다. 이 프레임 자체가 문제다. 왜냐면 노동의 사회적 현실과 조건은 보지 않고 개인의 적성과 미래 산업(기업적 수요)을 잘 '매칭(maching)'시켰는지에 대한 것으로만 직업 선택에서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수요공급론이 이 프레임의 기본 원리다. 진로교육도 이 수요공급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수요고 누가 공급인가? 일자리에서 수요는 '자본의 수요'이고 공급은 '노동력'이다. 주체는 자본이고 노동은 대상이다. 거꾸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기업이 찾는 인재, 시장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택권을 가진 쪽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다. 이 구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하지 않는가?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있을 때 기업과 사회와 국가가 그것을 공급해야 한다고. 그 틀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서, 노동시장의 수요공급론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진로교육은 결국 조기취업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작년에 자유학기제를 마친 아들에게 좋았던 프로그램을 물으니, 야간산행과 포켓볼 동아리에 들어 당구 친 것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유학기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진로교육이 제일 평이 안 좋다. "진로교육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직업을 죽 보여주고 이 중에서 골라라." "그걸 하려면 뭘 준비해야 한다든가, 그런 건 없었어?" "있지, 공부 잘하는 거." 결국 학교공부의 목표가 대학에서 취업으로 이동한 것이다. 전자도 나쁘지만 후자는 더 나쁘다.

지금 진로교육은 일찍부터 진로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초등시기에는 진로인식, 중등에서는 진로탐색, 고등에선 진로계획, 대학에선 진로준비, 그리고 진로적응과 진로전환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계단을 한 계단씩 밟아서 사회에 나가도록 한 것이다. 계단의 맨 꼭대기가 절벽 끝 벼랑이라는 건 왜 말하지 않는 걸까. 참 무책임한 교육이다. 사회의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교육이 과연 미래사회에 대응할 수 있을까? 청소년들에게 사회는 체험의 대상일 뿐이다. 실제로는 대부분 청소년들이 직업적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직간접적으로 문제를 함께 겪고 있는데도 그들이 자신의 삶과 노동으로 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오직 '체험장'을 통해 미래의 공간을 방문하는 것만 허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키자니아'나 '잡월드' 같은 곳이다. 진로체험교육 프로그램에는 실제 일터를 직접 방문해서 체험해보는 '일터 체험' 과정도 있지만, 이 역시 경험이라기보다는 일회적 체험에 그치는 수준이다. 체험처는 각종 '체험마을'처럼 생활 세계의 쇼윈도가 된다. 삶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구경시켜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찍 시작하는 진로체험교육은 기업의 관점, 시장의 관점을 일찍부터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처음 접하는 직업세계라는 가상의 공간은 노동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공간이 아니라 철저히 자본의 관점, 시장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공간이다. 키자니아나 잡월드 같은 공간은 말이 직업체험이지 실상은 노동의 현실도 미래도 없는 기업 브랜드의 마케팅 시설일 뿐이다. 교육공간이 아니라 체험상품을 파는 쇼핑몰이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진로체험이 계속 반복된다. 교육부의 진로체험교육 방식도 키자니아나 잡월드 방식의 직업 찾기 매뉴얼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적성검사–직업탐색–체험하기. 어렸을 때부터 그런 식의 진로체험교육을 받다 보면 '꿈'이 '취업'으로 대체되고, 구체적인 직업으로 답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직업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직업들은 무의식 속에서 머릿속에 각인된다. 부모들은 아직 꿈이 없다고 하는 아이들을 보고 '생각이 없는 거냐?'고 걱정하지만, 어쩌면 없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난번 강의 때는 27명 중 5명이 장래희망을 아무것도 쓰지 않고 백지를 들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그중 한 장 구석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직은 없어요." 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백지가 더 희망처럼 느껴졌다. 채근하지 말자. 솔직히 중학생들에게 특별히 꿈이 없던 시대보다 꿈을 아주 구체적인 직업으로 대답하는 시대가 더 걱정스럽다.

일찍부터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

어떤 이들은 과거와 현재는 다르고 미래의 사회변화 속도는 훨씬 더 빨라질 테니 일찍부터 진로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미래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일찍부터 시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안의 통치가 일찍부터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를 계속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궤도를 이탈하거나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통치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처럼 진로교육을 해나가면 '현실적 인간'으로 어릴 때부터 촘촘하게 개조하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육적으로도 문제고 정치적으로도 문제다. 교육과정을 끊임없는 현실적응의 과정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반교육적이다.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은 '사육'이나 '보육'이라 불러야지 교육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현실주의자로 제조하는 교육은 또한 정치적 보수화를 교육과정에서 기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현실주의자'란 실은 현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비판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 조건을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것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현실순응주의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몸에 배게 되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왜?'라고 물으며 이유를 찾고 그것으로부터 잘못된 것을 개선해나가려고 하는 이상주의자들을 불편하고 거북하게 느끼게 된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에 순응한 인간이 애써 적응한 체계를 자꾸 뒤흔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직업교육으로서의 진로교육의 철학은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적 조건 자체를 개선하려는 의지와 힘을 기르기보다는, 철저히 현실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직업준비를 해나가도록 돕는 데 맞춰져 있어 사실상 '이상주의자'를 조기에 진압하고 있다. 진로교육에서 비판적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적하고 싶은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지금 진로교육에서 노동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업의 세계란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의 세계인데,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게 될 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이나 노동권에 대한 교육은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다. 프랑스에서는 중학생이 되면 사회 시간에 한 달 동안 모의 파업, 모의 노사단체협상 등을 해보면서 노사관계와 노동권에 대한 실무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부모의 파업이나 지역사회의 파업 현장을 자연스럽게 목격하면서 참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지지파업이나 시위를 조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사회를 이해하고, 그것이 미래의 자기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떻게 대처해나갈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청소년들이 그런 식으로 현실에 개입해 들어가는 현실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훨씬 달라진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정말 청소년들이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체험장이 아니라 먼저 정당한 노동의 권리와 정치의 권리를 주어야 한다.

미래는 그렇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의 적성과 특기를 일찌감치 찾아라, 그리고 전도유망한 직업을 택해라" 하는 진로교육은 근본적으로 재고해보아야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미래에 대한 선택권 자체가 없다. 설혹 피나는 노력으로 '미래의 유망직종'에 진입한다 한들, 그 일이 그때도 유망하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지금 사라질 것이라고 위협받는 직업들도 과거에는 '미래의 유망직종'이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역에서 아이들을 지켜야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답이 없어요. 안 그러면 십 년만 지나도 농촌은 그냥 거대한 노인요양소가 될 거예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도시로 나가서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죽겠지요." 내가 사는 곳의 이야기다. 설악산 배움터 선생님에게서 들은 그 목소리는 지금도 무섭게 울려온다. 배움터를 졸업하고 나서 대처로 나간 친구들이 명절 때 고향 집에 못 내려오는 일이 점점 많다고 한다. "명절인데 집에 안 오고 뭐해? 잘 지내는 거야?" 선생님의 안부전화조차 제대로 받을 틈도 없이 "아, 쌤 지금 바빠서요" 하고 끊는 그들은 '명절에 쉴 수 없는 직업'을 가졌다. 이들과 지역 안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고 함께 살아갈 수는 없을까? 지난번 강의 때는 힘들면 돌아오고 싶은 곳이 고향이라고, 쌤이 여기서 살기 좋은 농촌마을을 만들고 있을 테니까,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서 찾아오라고, 약속했다. 호언장담이다. 그래도 약속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꿈이 '농부'라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재밌는 사람이네 하는 표정이다. 살기 좋은 마을은커녕 농사 좀 지을 줄 아는 노인이 되는 이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지나온 삶에 대한 지금 나의 현실적 결단이고, 남은 삶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미래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진로계획'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 아직 별거 없다. 서울을 정말로 벗어났고, 산촌으로 정말로 이사했고, 밭을 장만했고, 풀을 뽑고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다한 것 같다. 이렇게 어떤 길이 생겨났으니 당분간은 앞으로 그냥 걸어가도 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도 불가능할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별 목적 없이 그냥 걸어갈 시간을. 너무 일찍부터 미래를 준비하라고 내몰지 말고 말이다. 아무리 잘 설계해도 미래는 그렇게 오지 않는다. 그러니 부도날 은행에 적금 쌓듯이 불확실한 미래에 시간과 노력을 저금하지 말고, 우연과 운명의 시간을 맞이할 힘을 기르자.

다음 강의 땐 미래가 그렇게 오지는 않을 거라는 걸, 꼭 말해줄 것이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꿈을 꼭 이루세요"가 아니라, 꿈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건 적성을 모르고 특기를 계발하지 못하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어찌 될지 모를 미래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것이 먼저라고 말해주겠다.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그래도 '희망'을 말해야지 절망을 먼저 말하는 것이 옳은가?" 되묻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절망해야, 가망 없는 희망을 내려놓아야, 마침내 세상이 뒤집힐 것 같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계속 속이는 건 결국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닌가. 그러니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미래는 그렇게 오지 않을 거라고. 현재를 미래에 예속시키지 말고 지금을 살자고. 마음의 용기를 기르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자고. 그래도 된다고, 그래야 한다고. 지금 나에겐, 미래가 그렇게 예언대로 오지는 않을 거라는 게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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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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