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목숨을 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소를 자아냈다. 집권당의 당대표가 의회의 기본인 대화와 소통을 팽개치고 국회의장을 상대로 불퇴전의 각오로 격렬 투쟁을 벌인 전대미문의 사태를 두고, 대통령의 호위무사가 제격인 사람이 당대표가 된 결과라거나 개인의 격한 성품에 탓을 돌리는 시각이 많았다. 물론 내세운 명분은 무너진 의회정치의 원칙을 수호하겠다는 것이지만, 여야 협의가 열려 있는 국회에서 무기한 단식으로 목적을 달성하겠다니 그런 의회주의자도 있는가? 비장한 포즈를 취했지만 일주일이 멀다하고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명분조차 구차하기 짝이 없었던 때문이다.
이 한바탕의 해프닝은 기득권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온 현 집권당이 정치역학에서 밀릴 경우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말해주는 서글픈 징후일 수도 있다. 총선 패배로 여소야대가 된 환경에서 변화된 의회 환경에 대처하는 지혜와 자기갱신 없이는 집권당이 제 역할을 못할 것은 뻔하다. 이번 사태는 청와대가 관련된 권력형 비리 의혹이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당면한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자 하는 책략으로 부추겨진 면이 없지 않고, 뜬금없는 단식투쟁이니 과도한 막말 퍼레이드에 여론의 눈길이 돌아가게 함으로써 어느정도 성공하기는 했다. 그러나 투쟁선언의 비장함과 성공의 비루함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이정현 대표의 이번 집무실 단식농성과 중단은 그가 지키고자 했을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당대표시절 벌였던 끈질기고 야무진 싸움과 대조된다. 2005년 참여정부의 주도로 개혁적인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을 때 소수야당이던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의회를 박차고 나가 장외투쟁에 돌입, 결사반대 머리띠를 동여매고 무려 6개월간 전국을 돌며 반대여론을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보수진영의 총결집을 불러일으킨 이 투쟁의 결과 2년 후 개혁성이 크게 후퇴한 사립학교법 재개정이 이루어졌다. 비리로 축출되었던 구재단들이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모두 대학에 복귀하고 일부에서 극심한 분규가 벌어지게 된 것도 이 재개정 혹은 개악된 사립학교법의 여파다.
어떤 점에서 이번 집권당 항의의 격렬한 양상은 과거 박근혜 당대표 시절 투쟁의 희화화라고도 볼 수 있지만, 기득권 구조가 위협받을 때 이 정치세력이 말하자면 '목숨 걸고' 투쟁에 나선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선상에 있다. 당시 대학운영의 민주성을 대폭 강화한 사립학교법 개정은 참여정부의 4대 개혁과제 가운데 유일하게 실현된 경우로, 사립학교 재단을 전통적인 지지기반으로 두고 있던 한나라당에게는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재개정을 통해 개혁성을 희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중요한 정치의제로 만든 박근혜 대표의 투쟁력이 한 몫을 했지만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에서 반대여론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덕분이었다. 그에 비하면 국민적 공감을 거의 상실한 이번 국감 거부 사태는 집권당이 아직 총선 패배가 불러일으킨 패닉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기득권위기에 대처하는 이 정당의 대응방식이 말해주는 바는 이들이야말로 사생결단의 정치싸움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야당의 투쟁력이 오히려 이보다 미약해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진정한 의미의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굳어진 기득권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싸움을 통해서 발현된다. 지금의 야당에서 그같은 변혁을 위한 정치가 작동하고 있는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조정해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민중의 변화 요구에 부응하는 투쟁력이 필요한 국면도 있다. 그러나 기득권 구조의 온존이냐 변화냐의 근본적인 정치의제에서 야당은 절실함도 투쟁성도 기득권수호 정치집단에게 뒤처지는 듯보인다. 이것은 야당 자체가 그 기득권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는 현실과도 통한다. 총선이전의 야당이 의회 소수세력으로서의 한계를 늘 입에 달면서 역부족을 호소해 온 것도 이같은 완력의 부족에 기인한다. 물론 필리버스터 국면은 야당 내부에 진정한 정치를 향한 열망이 내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총선의 승리에 기여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허약체질의 야당에게 근본적인 싸움을 감당할 수 있는 근육을 키워준 것이 지난 총선의 의미라고 봐야 할 것이다.
보수정권 9년째인 한국사회는 퇴보했다고 말하기조차 부족할 정도로 국가사회 전체가 난파 직전의 배처럼 위험에 처해 있다. 과거 정부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체제를 지향하던 남북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대결국면으로 치달았고,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기득권구조는 더욱 공고해졌다. 개성공단 폐쇄가 보여주듯 모든 연결고리를 차단한 극심한 남북대립은 결국 북한의 핵무장을 촉진했으며 이제 한반도는 핵전쟁의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최악의 위험지대로 변하고 말았다. 원전 밀집지역인 동해안지역의 지진발생은 뜻하지 않은 핵 재앙이 이 땅 전체를 폐허로 만들 수 있다는 불길하고 어두운 전망을 던진다. 그럼에도 정권은 노후 원자로까지 연장가동하고 소위 원전마피아의 기득권구조는 대체에너지산업이 성장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든 가장 큰 요인이 야당은 물론 집권당과의 싸움조차 마다않는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아집 때문인지, 친박 비박 가릴 것 없이 집권당 전체의 완강한 기득권 수호의지 탓인지, 아니면 정치권 전체의 책임인지 가리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시대적 왜곡이 대다수 민중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기득권 구조를 대폭 바꾸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힘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당의 이번 국회파동을 단순한 개인적 흥분의 결과라거나 명분이 부족한 일과성 트집이라고 보아 넘길 수만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변화의 바람이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음을 예감한 기득권집단의 경각심이 불러일으킨 일이자 이 흐름을 저지하고자 하는 전투욕의 발현이기도 한 것이다.
여소야대의 20대 국회와 내년으로 다가온 대선 과정은 단순히 이해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하는 차원 이상의 정치적 지향을 가져야 한다. 지난 총선에서 나타난 민의는 국가 전체를 위험사회로 몰아넣는 이 일방통치의 흐름을 중단시키고 한국사회를 새롭게 재구성하라는 것이다. 형식적인 차원의 민주주의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 새로운 체제의 구축에 해당하는 발본적인 변혁이 요구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을 되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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