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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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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 미국

[기고] 미국 역사 240년 동안 219년을 전쟁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호전적(好戰的)인 국가다. 미국처럼 전쟁을 많이 해본 나라도 없고, 좋아하는 나라도 없으며, 잘하는 나라도 없다.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이 되었고, 전쟁을 통해 세계 패권을 유지해 왔다.

몇 가지 통계를 제시한다. 첫째, 미국은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2016년 현재까지 240년 가운데 무려 219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는 8.8%인 21년밖에 되지 않는다. 5년 이상 연속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기간은 세계 대공황 직후인 1935년부터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0년까지가 유일하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난 이후엔 1997년과 2000년에만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둘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016년 현재까지 전 세계 150개 이상의 지역에서 약 250개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가운데 200개 이상의 전쟁이 미국에 의해서 일어났다. 참고로 20세기에만 약 1억9000만 명이 전쟁으로 죽었다.

셋째, 미국은 2016년 현재 세계 각지에 약 1000곳의 군사 기지를 운영하며, 150개 이상의 국가에 1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 놓고 있다. 구체적으로 일본에 5만2000명, 한국에 2만5000명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8만 명 이상, 그리고 독일에 3만7000명, 이탈리아에 1만2000명 등 유럽에 6만 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넷째, 미국은 2011년 7100억 달러 이상의 군비를 지출함으로써 전 세계 군비의 40%를 차지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2011년 '예산 통제법(Budget Control Act)'을 만들어 2012년부터 해마다 5% 안팎의 군비를 줄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15년엔 약 6000억 달러의 군비를 지출했지만 여전히 세계 전체 군비의 3분의 1 이상을 쓰고 있다. 참고로 2015년 군비 지출 2위부터 10위까지의 국가는 중국 2100억 달러, 사우디아라비아 870억 달러, 러시아 660억 달러, 영국 550억 달러, 인도 510억 달러, 프랑스 510억 달러, 일본 410억 달러, 독일 390억 달러, 한국 360억 달러 순이다.

건국부터 2016년 현재까지 주목할 만한 미국의 전쟁과 외교 정책 10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 2006년 태평양에서 대규모 훈련을 실시한 미 해군. ⓒwikipedia.org

1) 영국과의 독립 전쟁과 건국 : 전쟁을 통해 세워진 나라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했다. 선언문에 "영국의 현재 왕의 역사는 반복적인 위해와 강탈의 역사였다. 이 식민지에 절대 폭정을 세우려는 데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며 온갖 폐해를 세계에 알렸다. 나아가 "이 국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서 전쟁을 시작하고 평화를 체결하며 동맹을 협정하고 통상을 수립하며, 독립 국가가 해야 하는 모든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전쟁은 독립 선언 1년 전인 1775년 시작됐고 1783년 끝났다. 8년간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고 이루었으며 나라를 세운 것이다.

2) 유럽에 대한 도전과 먼로 독트린 : 고립주의보다 독자주의나 불간섭주의

제임스 먼로 제5대 대통령은 1823년 먼로 선언이라 불리는 미국 외교의 기본 정책을 발표했다. 유럽 강국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에 간섭하지 말고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의 약화로 중남미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라틴아메리카를 더 이상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도전이었다. 아울러 미국도 유럽에 간섭하지 않고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에 지속적으로 중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먼로 선언을 고립주의 외교 정책으로 부르는데, 이는 다른 나라들의 관계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국가 안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 대외 문제에 광범위한 개입을 반대하는 방침을 가리킨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고립주의'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미국은 건국 이후 세계문제로부터 진정 고립을 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먼로 선언은 유럽 강국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하는 것을 봉쇄하여 이 지역에서 미국의 안전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공세적 정책이었다. 따라서 '독자주의'나 '불간섭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3) 멕시코와의 전쟁과 서부 개척 : 원주민 학살의 역사

1820년대부터 미국인들이 당시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로 많이 이주했다. 멕시코 정부가 초기엔 이민자들을 환영했지만 이들의 숫자가 원주민보다 훨씬 많아지자 이민을 제한했다. 이에 미국인들이 반발해 1836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이겼고, 텍사스는 1845년 미국에 합병되었다. 1846년부터는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미국이 크게 이겼다. 그 결과 지금의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네바다, 캘리포니아 등 광활한 서부 지역이 미국 영토로 바뀌었다.

인구와 면적으로 미국 본토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주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빼앗은 것이다. 참고로 전쟁 직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황금 덩어리가 무더기로 채굴되고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펑펑 쏟아졌으니 이를 바라보는 멕시코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들이 지녀온 반미 감정의 원천이다.

멕시코와의 전쟁을 전후로 이른바 서부 개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미국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적어도 수백만 명 이상 죽었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개척'일지라도 원주민들의 처지에서는 참담하고 끔찍한 학살이었다.

역사는 대개 승자가 쓰기 마련이며 패자의 기록보다는 승자의 기록이 멀리 퍼지고 오래 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미국의 '서부 개척'이라는 승자의 용어를 쓰려면, 일본의 '한반도 진출'이라는 승자의 용어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분노하며 '한반도 침략'이라는 패자의 입장을 주장하려면, 미국의 잔인함을 비판하며 '원주민 학살'이라는 패자의 처지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4) 스페인과의 전쟁과 제국으로의 발돋움 : 선민의식과 조선에 대한 배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1895년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쿠바에 투자한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98년 쿠바에 해군 함정을 보냈다. 곧 이 함정이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되자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겼다. 전리품으로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등 거의 모든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지도자들이 내세운 게 선민의식이었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인종이 기독교 문화와 그를 기반으로 발전된 서양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함으로써 미개한 유색인종들을 개화시키는 것이 도리요, 의무라고까지 주장했다. 참고로, 1898년 쿠바에 정박 중이던 미국 함정의 폭발은 무려 73년이 흐른 1971년에야 스페인군의 기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일러실의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해외로 확장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1905년 태프트-가쓰라 비밀 협정을 맺었다. 태프트 미국 육군 장관이 새로운 식민지 필리핀을 시찰하러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가쓰라 총리를 만나,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양해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이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맺자, 서양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1882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던 미국은 가장 먼저 조선을 떠났다.

5) 일본과의 전쟁과 인류 최초의 핵무기 사용 : 고립주의와 중립주의에서 국제주의로

1935년 히틀러의 독일은 군비 증강에 착수하고 주변국들을 위협하는 한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동원령을 내리고 에티오피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유럽 분쟁에 또 다시 휘말려 들지 않겠다며 중립법을 제정했다.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킬 뿐만 아니라 교전국에 대한 융자와 전쟁 물자의 판매까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940년 곤경에 처한 영국이 협력을 요청하자 미국은 중립법을 피하고 무기 대여법을 통해 영국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하자 미국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며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1945년 7월 인류 최초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해 8월 일본에 터뜨림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핵무기에 따른 조선인들의 피해도 매우 크고 끔찍했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 약 7만 명이 방사능에 노출되고 4만 명이 폭사했던 것이다.

▲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뜨린 핵폭탄이 폭파하는 모습. ⓒwikipedia.org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은 세계 패권을 추구하는 국제주의로 바뀌었다. 유럽 열강들이 두 차례 대규모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하며 쇠퇴하는 터에, 세계 제1의 국가로 솟아오른 미국이 소극적 고립주의나 중립주의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국제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6) 소련과의 냉전과 트루먼 독트린 :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와 저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1이 되었는데 곧 미국에 맞서는 나라가 나타났다. 자본주의 멸망을 추구하며 세계 제2위로 오른 사회주의 소련이었다. 스탈린은 1946년 자본주의 진영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 예상되므로 조국을 강화하고 방어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에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 소련의 팽창 정책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1947년 초엔 영국이 붕괴 위기에 처한 그리스와 터키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지속할 수 없다며 두 나라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이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은 중동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 나라가 공산화하면 중동의 석유 자원도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것을 우려해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반공주의를 강조한 트루먼 독트린과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을 내세운 마샬 계획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문제는 더욱 꼬이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가 그리스나 터키보다 전략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47년 초부터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면서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1947년 9월 미소 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를 일방적으로 결렬시키고, 10월 한반도 문제를 미국 외교의 뒷마당이랄 수 있는 유엔에 떠넘긴 것이다.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이끌었다. 또한 중동에서는 아랍 국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실현시켰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국가 이익'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소련과 손잡고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끝난 뒤엔 연합국이던 소련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까지 우방으로 만들었다.

1947년부터 안으로는 국가안보위원회 (NSC), 중앙정보국 (CIA), 그리고 합동참모본부 등을 만들고 밖으로는 미주기구 (OAS),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등의 창설을 주도하며 소련과의 냉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7) 한반도에서의 전쟁 : 60여 년 지나도 끝나지 않는 전쟁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트루먼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했다. 그리고 남한이나 대만이 공산화하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군이 합법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직접적 위협이 될 것"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 상황이라며 의회의 동의 없이 병력을 보냈다. 필리핀에 주둔하는 미군을 증강하고 필리핀에 대한 군사 원조를 확대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미군 주도의 유엔군이 1950년 9월 인천에 상륙해 서울을 되찾고 북쪽으로 진격했지만 10월 중국군이 참전함으로써 1951년 1월 후퇴했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만주 폭격을 포함한 전쟁 확대를 주장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내의 제한 전쟁만을 명령했다. 매카더의 거듭된 확전 주장에 트루먼은 그를 해임해버렸다.

1년간의 격전 끝에 1951년 7월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휴전을 극렬하게 반대하며 북진 통일을 주장하자, 미국은 지루한 휴전 협상을 빨리 끝내기 위해 1952년부터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두어 차례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2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1953년 7월 휴전‧정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로부터 63년이 흐른 2016년 8월까지 전쟁을 쉬거나(휴전) 멈추고 있는(정전) 상태에서 완전히 끝내거나(종전)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다. '호전적'인 북한은 줄기차게 종전-평화 협정을 요구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다는 미국과 남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미국국립문서보관소

8) 베트남 침략 전쟁 : 제2의 한국 전쟁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독립 전쟁인 제1차 베트남 전쟁은 1946년 시작되어 1954년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 국가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의 제네바 협정이 맺어졌다. 미국은 이에 반대하고 남베트남에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선거가 실시되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추구해온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압도적으로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1961년 남베트남에서 흔히 '베트콩'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군사 조직이 결성되고, 사회 혼란 속에 디엠 정권의 부패와 폭정이 지속되자 미국은 1963년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민 정권이 베트콩 세력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추구하자 미국은 1964년 또 다른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칸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사회 혼란과 베트콩 세력의 확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군사 개입을 확대하면서 북베트남 통킹만에 함정을 보내 정찰 활동을 펼쳤다. 곧 미국 함정이 공격당하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1965년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벌였다. 제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통킹만 사건은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1971년 조작으로 밝혀졌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한 빌미로 삼았던 미국 함정의 폭발이 73년이 흐른 1971년에야 보일러실의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진 것과 비슷하다. 베트남 전쟁은 이렇게 파렴치한 침략 전쟁이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았던 범죄행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이 유일하게 패배한 굴욕적인 전쟁이기도 했다.

이토록 파렴치한 침략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뛰어든 나라가 남한이었다. 처음엔 미국에 간청하다시피 해서 파병했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의 신임과 지지를 받으면서, 미국의 지원에 의한 경제 성장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엔 미국의 줄기찬 요구와 은근한 압력에 따라 베트남에 지속적으로 파병했다. 미국이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미국의 파병 요청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남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남조선)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는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며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미국과 남한의 남베트남 파병에 맞서 북베트남에 공군 병력을 보냈다. 둘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기 위해 1966년부터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무장 침투 및 공격 행위를 급격하게 늘렸다. 1968년 1월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한 청와대 습격 사건과 미국 함정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1~12월 울진‧삼척 침투 사건 등 다양하고 빈번한 공격 행위와 도발은 남한의 베트남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렇듯 제2차 베트남 전쟁은 제2의 한국 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서 가장 대대적으로 싸운 나라는 남한이었고, 그에 맞서 북베트남을 가장 크게 도운 나라는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9) 이라크 침략 전쟁과 부시 독트린 : 예외주의와 일방주의 그리고 선제공격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정부는 2002년 새로운 국가 안보 전략을 짰다. 핵심 내용은 미국의 안보 개념을 다른 나라들에 대한 견제에서 적극적 공격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미국에 대한 테러 징후가 보이면 먼저 공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미국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예외주의도 깃들어져 있었다.

이러한 예외주의와 일방주의 그리고 선제 공격이 핵심인 부시 독트린을 바탕으로 미국은 2003년 유엔의 반대와 많은 나라들의 비판을 받으며 이라크 자유 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이라크를 침공했다.

네 가지 이유를 내세웠다. 첫째,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미국처럼 핵무기와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많이 배치해 놓고 있는 나라는 없다.

둘째, 이라크가 9.11테러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9.11 이전까지 미국만큼 테러를 많이 지원했던 나라는 없다.

셋째, 이라크가 독재를 실시하고 인권 탄압을 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그러나 독재와 인권 탄압에서 이라크 못지않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파키스탄 등에는 무기도 팔고 경제 지원도 했다. 그리고 미국처럼 독재 정권을 많이 지원한 나라는 없다. 세계 곳곳에서 독재 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수십 개의 민주화 운동이 미국의 도움에 의해 반공의 이름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넷째, 이라크가 유엔 결의안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그러나 유엔 역사상 미국만큼 유엔 결의안을 지키지 않은 나라는 없다.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엔을 무시하고 단독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대외 정책에 공개적으로 밝힌 나라 역시 미국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고 이라크를 점령해 군사 정권을 세우려는 진짜 속셈은 반미 정권을 제거하고 석유 자원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렇게 파렴치한 침략 전쟁에 남한은 한미 동맹을 앞세우며 베트남전에 이어 또다시 병력을 보냈다.

10) 새로운 냉전의 시작 : 쇠퇴하는 미국의 떠오르는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중국을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국가로 간주하고 중국을 견제하며 봉쇄해왔다. '냉전'의 정의와 개념에 따라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이 많겠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 말 개혁 개방을 시작한 이래 해마다 10% 안팎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급속도로 떠오르는 중국에 대해 미국은 중국 위협론을 제기하며 일본과의 군사 동맹을 강화해왔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1996년 일본과 안보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1997년엔 일본과의 방위 협력 지침을 개정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있는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보통 국가'가 되도록 촉구해왔다. 아베 정권의 헌법 재해석과 개정 움직임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부추김과 압력에 따른 것이다.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 널리 알려진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또는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이 바로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2015년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 지침을 만들고,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일본과 남한을 끌어들여 이른바 한-미-일 삼각공조를 강화하는 것도 중국 견제용이다. 2016년 남한에 고고도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겠다는 것 역시 중국 때문이다.

미국이 60여 년이 넘도록 한국 전쟁을 끝내지 않고 북한과의 평화 협정을 거부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종전 협정이나 평화 협정을 맺으면 주한 미군을 계속 유지할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고, 주한 미군을 철수하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6년 8월 1~4일 한신대학교에서 열리는 제1회 '대학생 통일 경제 캠프'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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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공동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두 눈으로 보는 북한>,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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