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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기본 소득'도 새누리당에 뺏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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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기본 소득'도 새누리당에 뺏길라

[장석준 칼럼] 바람직한 기본 소득의 전제 조건 두 가지

최근 진보적 정책 대안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것은 단연 시민 기본 소득(기본 소득)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몇 학자들이 외국에는 이런 논의도 있다고 소개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신문 1면에 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낯익은 주제가 됐다. 정작 기본 소득을 앞장서서 선전한 노동당, 녹색당은 소수 정당으로 남아 있는데, 기본 소득 자체는 새누리당이나 더불어민주당 정치인 입에서도 튀어나오는 형편이다.

한 마디로 기본 소득이 유행을 타고 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기술 혁신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인공 지능과 결합된 전면적 자동화로 인간 노동이 생산 활동으로부터 대거 퇴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대두했다. 일자리의 대량 소멸에도 불구하고 시장 사회가 존립하려면 기본 소득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자본 진영에서마저 분분하다. 다른 한편 영국 노동당 일각의 기본 소득 검토나 스위스 기본 소득 국민 투표에서 보듯 진보 진영에서도 21세기에 사회 국가를 재건할 중요한 수단으로 기본 소득에 주목하는 중이다.

이런 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춰 한국에서도 기본 소득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뜨거워지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우려 또한 커지는 게 사실이다. 기본 소득을 둘러싸고 자칫 기괴한 정치 지형이 등장할 조짐마저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 기본 소득 논의의 발원지인 진보 세력 안에서는 여전히 이 구상에 대한 찬반 양론이 뜨겁다. 이것은 건강한 현상이다. 기본 소득이 미래 사회의 주요 제도 중 하나로 제기됐다면, 이렇게 치열하고 오랜 토론을 거쳐 합의를 만들어가는 게 마땅하고 옳다.

하지만 기성 정당의 정치인은 이런 진지한 토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들은 선거에서 표만 된다면 기본 소득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입 밖에 꺼낼 준비가 돼 있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이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화'로 성공적인 선례를 남긴 바 있다. 선거에서 경쟁자보다 먼저 말하고, 집권한 뒤에 수첩에서 지워버리면 끝이다. 지금 보수 정치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기본 소득은 이런 맥락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문제는 이런 진지함의 차이가 선거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진보 정당 후보는 기본 소득을 둘러싼 이러저런 주장들을 마치 학자처럼 장황하게 소개하는데, 보수 후보는 실제 정책 내용의 빈곤이나 모순과는 상관없이 화끈하게 기본 소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광경을 떠올려보자. 최근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구도다. 이때 많은 유권자들에게 과연 누가 복지 확대의 주인공으로 보일까? 새누리당 후보가 '복지 국가'의 대변자인 양 굴던 희비극은 2012년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정치적 필요 때문에 다들 기본 소득 찬성론자로 마음에도 없는 전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진정 평등과 해방의 열정으로 기본 소득을 찬성하거나 비판한다면,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전개 양상과 속도를 고려해 논쟁 지형과 태도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는 있다. 기본 소득이 핵무기나 사드처럼 이 땅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게 아니라면, 이에 대한 비판 근거로 제시된 것들을 이제는 기본 소득이 실시될 때 반드시 전제돼야 할 조건들 혹은 기본 소득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 결합돼야 할 일련의 다른 제도들로 재정식화해서 검토하는 게 바람직하다. 반대로 기본 소득 찬성론 역시 이런 전반적 대안 안에 적절히 배치된 한국형 기본 소득 구상으로 성숙돼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전제 조건 : 주택, 의료, 교육 등의 탈상품화, 탈시장화

기본 소득에 쏟아지는 좌파 쪽의 비판 중에는 기본 소득이 자본주의 시장만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면 시민들은 이 돈으로 시장에서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할 테고 그러면 결국 자본의 배만 불릴 것이다 등등.

이 비판은 자칫 당혹스러운 근본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시장'을 그야말로 '모든' 시장으로 이해할 경우 이런 위험을 피할 수 없다. 대중의 화폐 소득이 증가하면 이전에 비해 이런저런 시장들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이것 자체를 나쁘다고 하거나 비판거리로 삼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임금 인상은 어떠한가? 임금 상승이야말로 소비 시장 확대의 주 연료가 아닌가? 자본주의 시장을 말려죽이기 위해 노동조합의 임금 투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물론 희화화된 반비판이다. 이런 쓸데없는 말싸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가지 개념만 분명히 확인하면 된다. 다름 아니라 '시장'이다. 이를 시장 '일반'이 아니라 '특수한' 시장들로 이해한다면, 이 비판은 섣부른 극단 논리가 아니라 기본 소득 도입의 필수 전제 조건에 대한 중대한 지적이 된다.

어떤 특수한 시장들인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면서 동시에 각 가계에 상당히 큰 비중의 지출을 요구하는 재화 및 서비스 시장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누구나 참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서민 가정으로서는 생애 소득의 막대한 부분을 쏟아 부어야 하는 시장들. 자본 입장에서는 이런 시장이야말로 세상 끝 날까지 쉼 없이 엄청난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황금 밭이다. 실제로 이런 시장들이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중심 무대가 됐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물론 주택 시장이다. 이 점은 요즘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이 다 마찬가지다. 한국보다 공공 주택 비중이 높은 나라들에서도 현재 주택 시장이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는 중이다. 주택 가격이 거품 상태일 뿐만 아니라 임대료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다음으로는 의료 시장과 교육 시장을 들 수 있다. 한국에는 꽤 괜찮은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있지만, 의료 공급자는 대부분 민간 병원이다. 의료 민영화를 더 밀어붙이지 않더라도 이미 재벌 병원과 민간 의료 보험 회사들이 공공 의료 보험 제도를 포위하고 있다.

교육 영역에서는 대학교가 문제다. 다른 나라들은 이제 와서 대학 등록금을 도입하거나 인상해서 문제인데, 한국은 예전부터 이것이 중산층 가계의 무거운 굴레였다. 게다가 대학 서열화-입시 경쟁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사교육 시장이 존재하며 웬만한 가계는 다 이 시장에 참여한다.

이런 시장들이 계속 존재하고 이들과 연동된 경직된 가계 지출 구조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기본 소득이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소득층은 모르겠지만 중산층에 지급된 현금 급여는 틀림없이 주택, 의료, 교육 등의 시장을 더욱 과열시키는 연료가 될 것이다. 처음에는 가처분 소득이 늘어난 듯 보여도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집값과 임대료가 오르고 의료, 교육, 보육 지출이 늘어날 것이다(물론 현 구조에서는 기본 소득 도입뿐만 아니라 중산층 가계의 임금 소득이 전반적으로 상승할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서 기본 소득 도입은 반드시 주택, 의료, 교육 등의 탈상품화, 탈시장화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 공공 주택을 늘리고 임대료 상승을 억제해서 주택 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 공공 의료 체계를 갖춰서 의료비 지출을 통제해야 한다. 대학 교육의 공공성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대학 서열화-입시 경쟁과 연동된 한국 교육 특유의 문제들과 대결해야 한다. 즉, 주택, 의료, 교육 등의 진보적 구조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이것이 기본 소득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이다. 전제 조건이라고 해서 꼭 단계론을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주택,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기본 소득은 꿈도 꾸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시간의 선후를 따지자면, 보편적 기본 소득 도입보다는 이들 영역의 탈상품화, 탈시장화가 먼저다.

두 번째 전제 조건 : 노동조합 등 결사체들이 지탱하는 민주주의

기본 소득 비판 중에는 이 제도가 애초 제안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자본과 국가에 시민들을 더욱 종속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자동화로 생산 활동에서 배제되고 기본 소득이라는 사실상의 생계 보조금으로 연명하게 된다. 파업이나 단체 협상으로 자본 독재에 개입할 여지는 사라지는 대신 당장 보조금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2등 시민이 넘쳐나게 된다. 국가에 생계비를 의존하는 2등 시민들은 정권에 맞서기도 힘들어진다.

사회과학 고전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퍼뜩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떠오를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분석 대상 중 하나는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의 스피넘랜드 법이다. 이는 생계비에 못 미치는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표준 생계비와 임금의 차액만큼 공적으로 부조해주던 제도다. 보편적 기본 소득은 아니다. 하지만 현금 급여형 복지의 한 원형이라고는 할 수 있다.

스피넘랜드 법에 대한 폴라니의 입장은 복잡하다. 그는 이 제도가 인간 노동을 상품화하는 노동 시장의 등장을 막으려던 최후의 안간힘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제도를 긍정적으로 기술하느냐면 그렇지 않다. 스피넘랜드 법 덕분에 악덕 자본가들은 더욱더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을 수 있었다. 자부심 넘치던 장인들은 부자의 적선에 의존하는 빈민 무리로 전락했다. 노동의 상품화를 막으려던 제도였지만 역설적으로 노동의 위상을 추락시켜서 노동 시장이 등장할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것은 스피넘랜드 법 같은 복지 제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가? 폴라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스피넘랜드 법 자체보다는 그것이 또 다른 조치와 결합된 데 있었다. 스피넘랜드 법 실시와 동시에 당시 영국 지배 계급은 노동조합을 금지했다. 이들은 중세 장인의 전통을 잇는 생산 현장의 결사체들을 파괴해버렸다. 이 조치와 스피넘랜드 법이 한 쌍을 이룬 덕분에 경제적 토대뿐만 아니라 지적, 도덕적 전통마저 상실한 노동 빈민이 양산된 것이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의 제7장 '1795년, 스피넘랜드'의 부록에서 스피넘랜드 법 시기의 영국과 '붉은 빈'을 비교하면서 이 논지를 분명히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빈 시정부를 통해 선구적인 복지 정책들을 펼쳤다. 그래서 '붉은 빈'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붉은 빈'의 정책은 어찌 보면 20세기판 스피넘랜드 법이었다. 하지만 빈에서는 대중의 지적, 도덕적 수준이 추락하기는커녕 "서양 역사에서 가장 대단한 문화적 승리의 장관"(<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 2009년), 275쪽)이 이룩됐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나타났는가? 폴라니는 빈의 산업 노동 계급이 "고도로 발달된 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276쪽). 빈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문화클럽, 사회민주당 지역 조직 등으로 촘촘히 조직돼 있었다. 100년 전 영국에서는 스피넘랜드 법과 노동조합 억압이 결합된 반면 빈에서는 공공 복지 제도와 함께 노동 대중의 다양한 결사체들이 발전했다. 덕분에 대중은 보조금에 의존하는 빈민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지 제도로부터 힘을 얻어 "어떤 산업 사회의 인민 대중도 다다르지 못했던 높은 수준"(276쪽)에 도달했다.

이로부터 기본 소득의 또 다른 필수 전제 조건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associations, 다르게 옮기면 '연합')로 지탱되는 민주주의다. 자본주의 역사상 이런 결사체의 대표적인 형태는 노동조합이지만, 이에 더해 협동조합, 시민단체, 대중 정당 등도 있다. 미래에는 또 그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결사체들이 등장할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결사체와 이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사회 내 권력을 분점하고 있어야 한다. 자본,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자본, 국가의 기성 권력에 맞서는 대항력을 형성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만 기본 소득은 민주주의 혁명을 부단히 더욱 진전시키려는 대중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이 여전히 생산 활동에 대한 개입력을 지닐 경우에만 기본 소득은 노동 시간 단축-자유 시간 확대의 지렛대가 될 것이다. 강력한 시민 사회가 존재할 경우에만 기본 소득 때문에 시민들이 정권의 눈치를 보는 일을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당장 노동조합 권리 보장이 시급하다. 초기업 단위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활동, 산업별 단체 협상, 파업권 등이 보장돼야 한다. 이 과제는 기본 소득 논의와 결코 동떨어진 게 아니다. 기본 소득이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이런 권리가 먼저 확립되지 않는다면, 기본 소득도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보는 종합 처방으로 승부해야 한다

외국의 기본 소득 논의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기본 소득 구상의 발상지인 서유럽과 한국의 역사적 차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공세가 남긴 상처가 아무리 크더라도 서유럽과 한국 사이에는 여전히 시차가 있다. 서유럽 여러 나라의 복지 제도가 손상됐다고 해도 골격은 남아 있고 노동조합 운동이 후퇴했다고 해도 한국보다는 강력하다. 그래서 기본 소득을 논하면서 위의 두 전제 조건을 우리만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2016년 한국 상황은 다르다. 주택, 의료, 교육 등의 탈상품화, 탈시장화와 노동조합 등 결사체들의 발전이 기본 소득 도입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시야가 다음 선거를 넘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기본 소득을 들고 나오더라도 진보 세력이 이 장단에 놀아날 수는 없다. 기본 소득을 신앙하는지 아닌지, 누가 더 '센' 기본 소득을 주장하는지가 아니라 '기본 소득 있는(혹은 당분간 없을 수도 있는) 사회 국가의 혼합 경제' 청사진으로 승부해야 한다.

그 종합 처방은 준비되고 있는가? 어떠한 단편적 선동도 포획해서 소화해낼 수 있는 그런 종합 처방을 마련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하기 위해서도 진보 세력의 기본 소득 찬반 토론은 시급히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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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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