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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치와 야합은 '한 끗' 차이다

[민교협의 정치시평] 협치의 이데올로기와 '87년 체제' 극복의 과제

최근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협치'라는 말이다. 총선 이후 갑자기 부각된 이 용어는 20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여야 한목소리로 강조되고 있고 여론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양상이다. 박근혜 대통령부터 국회 개원연설에서 국회와의 '협치'를 내세웠고 이후 각 교섭단체 정당 대표들의 연설에서도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협치 실현'을 정치권의 당면과제로 꼽았고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원장은 '협치 국회'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했으며,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자당이 협치의 진면목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야 의원들이 참여하여 최근 창립한 국회 내 '경제재정연구포럼'을 두고 심상정 정의당 대표도 국회가 '민생 협치'를 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이처럼 정부와 여야가 협치를 공통의 가치이자 목적으로 삼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지난 총선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민들이 여야 어느 쪽도 독주를 할 수 없는 균형을 잡아주었으니 협치는 바로 총선을 통해 드러난 국민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총선결과에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염증이 분명 작용했겠고 여소야대 국면 자체가 이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협치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동어반복에 해당한다. 협치는 실상 민주사회라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필요조건인 까닭이다. 협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 무성할수록 한국 사회가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왜곡되어 있는지가 더 분명해질 뿐이다. 협치를 말할 때는 우선 이 점부터 짚어두어야 한다.

다음으로 과연 총선의 민의란 것이 협치에 대한 요구에 그치는가 하는 물음이 따른다. 그동안 대통령을 위시한 정권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에 국민들이 분노한 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이 집권세력이 국민의 안전이나 국가 안보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한 공동체의 생존과 관련된 기본과제에서 너무나 무능했다는 점이다. 협치를 내세우든 강행일변도든 문제는 집권세력이 공동체의 공익보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더 지켜내고자 한 데서 발생한다. 그 방법이 더 부드럽고 말고의 차원이 아닌 것이다. 사실 대통령이 화합과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닐뿐더러, 알고 보면 늘 하던 소리다. 초점은 협력 여부가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위한 협치인가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초등돌봄교실을 방문했다.(청와대 제공)

협치라는 말은 영어의 거버넌스(governance)의 역어로 흔히 쓰여 왔다. 통치(government)와 대비되어 쓰이는 이 말은 민주사회에서 일방적 통치는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화되었다. 거버넌스는 정부, 국회, 시민사회가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에 같이 참여하는 그런 지배구조 및 운영방식을 지칭한다. 말하자면 거버넌스는 민주사회의 기본 틀인 셈이다. 총선 전 일각에서 우리 사회에 "저강도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경고가 잇달아 나온 것처럼 실제로 집권세력의 의도는 민주주의의 형식인 선거를 통해서 더 공고하고 장기적인 기득권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이번 총선결과가 그들의 뜻대로 나왔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 기도가 일단 좌초되고 이들조차 협치를 말할 수밖에 없게 된 점, 이것이 이번 총선의 역사적 의미라고 할 것이다.

문제는 협치라는 말이 국민통합이니 여야협력이니 소통이니 하는 그럴싸한 포장을 빌어서 실질적인 민의의 소재, 즉 양극화의 악화를 막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진정한 개혁의 요구를 약화시키고 회피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위험성이다. 경제문제든 국민안전의 문제든 모든 대립에서 기득권구조를 지키고자 하는 완강한 수구적 자세를 견지해온 것이 집권여당이며 그 구성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협치를 한다지만 재벌개혁이 되었든 세월호조사가 되었든 기득권 구조를 혁파하려면 불가피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무마하는 논리로 동원될 소지가 충분하다. 협치 국면이 오히려 민의를 배신하는 타협이나 봉합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협치의 본보기로 널리 알려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와 혁신을 대표하던 두 정치가 디스레일리(Benjamin Disraeli)와 글래드스톤(W. E. Gladstone)의 경우가 시사적이다.

1860년대 영국 정치권의 가장 큰 쟁점은 선거법 개정이었다. 선거권을 도시노동자에게까지 확대하는 개혁 법안으로 노동조합연합 등 진보진영이 이를 요구한 반면 보수기득권 층은 사회 안정을 뒤엎는 발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정작 개정선거법을 통과시킨 것은 진보적인 글래드스톤의 자유당에 이어 정권을 획득한 디스레일리의 보수정권이었다. 보수당은 자유당의 기존법안보다 더 진전된 개혁안을 추진하여 통과시켰고 이 과정에서 내부분열을 겪기도 했다. 더구나 이 선거법 개정에 따라 다시 치르진 총선에서 보수당은 자유당에 패한다. 보수당 정권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당시 협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디스레일리의 정치력이 발휘된 대목이지만, 다름아닌 다수 국민들의 민의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핵심은 형식상의 협치가 아니라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힘의 존재이며 그 밑바닥에 합치할 수 없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존재한다. 지난 총선을 읽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강고해지는 기득권구조를 혁파하라는 다수 국민의 요구가 폭발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 시점에서 '87년 체제'의 극복이라는 지난 대선의 명제가 다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0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87년 체제는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문민통치를 확립하였지만, 당시 야권의 분열로 구세력과의 어정쩡한 타협을 통해 유지되었다. 그 때문에 분단체제 극복이라든가 빈부격차의 완화 등 사회의 핵심과제는 진척되지 않거나 악화되어 왔다. 무엇보다 보수정권이 이어지면서 그동안 확보된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심각하게 훼손되는 퇴행을 겪었다. 협치를 통한 민주주의 회복도 물론 중요하지만, 단순히 87년 체제를 지켜내고 갈등을 수습하는 것이 총선의 민의를 살리는 길이 될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어떻게 87년 체제를 극복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기획을 세워나가야 할 시기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기성질서 내에서 조정과 타협을 추구하는 통상적인 의미의 정치를 '치안'(police)이라고 명명하고, 이와 대비하여 그 질서화된 구조를 변화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을 '정치'(politics)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진정한 정치의 차원에서는 봉합될 수 없는 불일치의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며, 갈등을 동반하는 이 불화의 존재들이 기성질서의 해체와 사회변화를 추동한다. 현재 정치의 현안인 경제개혁, 정치개혁, 세월호 문제 등 산적한 사안들에는 분명 기득권구조와 충돌하고 화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협치는 양날의 칼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리도록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라면 협치가 기성세력 사이의 야합으로 전락되는 사태를 막아내는 정치의 복원이 긴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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