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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KTX 승무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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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KTX 승무원이었어"

[작은책] 인생에 '삭제' 버튼이 있다면…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집에 오니, 현관 앞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가까이 보니, '특별 송달된 우편물을 직접 수령하지 못했으니 다시 재방문하겠다'는 우체국의 안내장이었다. 순간 기운이 빠지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아이와 하하 호호 웃으며 즐겁게 집으로 왔는데…. 아이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 네 살 된 꼬맹이도 엄마 얼굴에 근심이 어리는 것을 봤는지 "엄마, 왜 그래?" 하며 눈치를 본다. 아이에게 또다시 미안해진다.

다음 날 오전에 다시 받은 우편물을 뜯어보니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보낸 것으로,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임금지급가처분에 대해 이의신청을 하면서 재판부의 결정에 따라 철도공사가 제공한 담보를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는데, '아직은 아니네…' 하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엄마인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행복한 우리 가족에게 걱정거리를 항상 던져 주고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따뜻한 사람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있다가도 문득 내가 처한 현실이 떠오르면, 소외감이 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요즘 내 마음에는 항상 거센 빗줄기가 흘러내린다. 시간이라는 건 흘러가는 법이 없다. '시간은 쌓여 간다'는 말이 진리인 것 같다. 지난 10년간 그럭저럭 흘려보낸 것 같지만, 아직도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얼마 전, 아이와 침대에 누워서 자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이었다. 누운 채로 실눈을 뜨고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내와 아이가 깰까 봐 조심조심 씻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그날 따라 왜 그렇게 마음을 시리게 하던지….

▲ KTX 승무원들은 2006년 코레일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프레시안

결혼 10년차, 내가 투쟁을 시작한 지도 10년째…. 2006년 3월에 철도 총파업에 동참하면서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한 달 뒤 4월에 결혼을 했다. 그 뒤로 약 3년 동안 합숙을 한다며 신혼생활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렇게 해고된 다음에도 생각보다 길어진 투쟁에 힘들어할 때마다 남편은 늘 곁에서 묵묵하게 힘이 되어 줬다. 결혼하고 7년, 거듭된 유산으로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을 할 때도 남편은 내게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2013년 3월 임신 테스트기 두 줄을 보고 펑펑 울며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 '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기를 주실 줄 알고 믿고 기다렸다'며 '그 기다림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행복했다'고 말하던 남편….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쓰러운 우리 남편…. 그리고 7년 만에 우리 곁에 찾아와 준 우리 아이…. 또 기적같이 찾아온 두 달 뒤에 태어날 둘째까지…. 난 이렇게 소중한 가족들을 볼 때마다 홀로 죄책감에 휩싸이곤 한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동료도 그랬을 것이다. 아이에게 빚이 상속되는 게 미안했다던 그 친구…. 판결이 나고 스무날 동안 걱정을 하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벌써 그 친구가 떠난 지 1년. 마지막 가는 그 순간의 마음, 그 마음을 떠올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엄마가 되어 보니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려고, 그 길을 막는 사람들에게 맞서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을 싸워 왔다. 결국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원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원치 않게 굽은 길에 들어서게 됐다. 요즘 가장 힘든 것은 '발을 잘못 디뎠다'는 생각에 걸어온 인생 자체를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다. 한 발짝 디뎠을 때는 몰랐던 많은 일이 그동안 우리에게 일어났고 지금까지 겪어 냈다. 남편과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걸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힘들다. 제발… 이제는 숨을 좀 쉬고 싶다.

인생에 'delete(삭제)' 버튼이 있다면 누르고, 아무 생각 없이 지워 버리고 싶다. 굽이굽이 굽은 이 길이 너무나 힘겹고 쓸쓸하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런 판결을 받고도 아직도 정신 못 차렸느냐'며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욕할지 몰라도,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다. 언제쯤 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지나가는 KTX를 바라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일이 없을까. 훗날, 훌쩍 자란 내 아이들에게 "엄마는 KTX 승무원이었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한 남자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 해고된 KTX 승무원….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이름 중 요새 가장 크게 와 닿는 건 아무래도 '10년째 해고자'라는 신분인 것만 같다.

월간 <작은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시사, 정치, 경제 문제까지 우리말로 쉽게 풀어쓴 월간지입니다. 일하면서 깨달은 지혜를 함께 나누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찾아 나가는 잡지입니다. <작은책>을 읽으면 올바른 역사의식과 세상을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바로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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