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후회한 적 없거든요. 그런데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나서 처음으로 후회했어요."
오미선 씨는 KTX 승무원이었다. 2004년 항공사 승무원과 KTX 승무원 시험을 같이 봐 함께 합격했지만, '공사'인 코레일을 선택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해서 보니 코레일 직원이 아니었다. 2년을 일하고 파업에 나섰다.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질 줄은 몰랐다. 비루한 그 시간들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한 번도 그때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KTX 승무원 2년의 경력은 사회에서 어떤 경력도 안 되더라고요. 다시 취직을 하려 해도 좋은 이력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때 그만뒀어야 했다는 후회를 한 번도 이제까지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 그런 후회를 했어요."
2008년 서울역 내 철탑농성을 마지막으로 '법정 투쟁'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가처분 소송까지 포함해 4번을 KTX 승무원이 이겼다. 그런데 마지막에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지난 2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결정이 나왔다. 그날의 마지막 판결이었다. 오미선 씨는 그 이야기를 종로 3가 전철역에서 들었다.
일부러 미적미적 거리며 대법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남편이 미선 씨 대신 아이 둘을 돌봐주기 위해 휴가까지 냈지만,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미선 씨는 말했다.
"좋은 소식은 좀 나중에 들어도 되잖아요. 그런데 나쁜 소식을 직접 듣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주저주저 하다가 종로 3가 지하철역에서 소식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파기 환송'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소송 결과를 기다리며 앞선 사건의 판결은 거의 다 '기각' 결정이 나는 것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낸다는 얘기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처음에는 좋게 해석했대요. 아, 우리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어려워서 돌려보내는가보다 이렇게요. 그런데 끝나고 나와서야 변호사가 좋은 게 아니라고 설명해줘서 그때야 다들 알았대요."
"대법원 판결문, 초등학교 6학년이 들어도 의심스러울 것"
그리고 오미선 씨는 곧바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정이 날 수가 있죠? 판결문을 읽어봐도 판사가 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도둑질은 했지만 도둑은 아니고,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뭐 그런 식이에요. 이례적인 상황에서 승무원들이 안전 업무를 했지만, 승무원들이 안전 업무를 담당한 건 아니다. 코레일 정규직인 열차팀장과 상호관계 속에 지시가 있었지만, 합법적인 도급이다. 너무 애매모호하잖아요."
대법원 제1부는 판결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열차팀장의 업무와 KTX 여승무원의 업무가 넓게는 KTX 차량이라는 동일한 공간 내에서 수행되고 서로 협조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각 업무의 내용이나 영역은 구분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열차팀장이 KTX 차량 전부를 순회·감시하면서 안전업무를 수행한 것과 비교하여, KTX 여승무원은 이와 별도로 각 담당 구간을 순회하면서 승객 응대 등의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 위탁협약에 의하면, 화재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KTX 여승무원도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및 승객대피 등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에 불과하고 KTX 여승무원의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
KTX 승무원 문제의 핵심은 이 업무가 도급이냐, 아니면 도급으로 위장한 불법파견이냐이다. 도급과 파견을 가리는 기준은 사실 모호하다. 업무 자체의 독립성, 사업체의 독립성이 있으면 도급으로 인정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는 파견으로 분류된다. 현대차에서 한쪽 바퀴를 정규직이 다른 한쪽 바퀴를 비정규직이 만드는 상황은 '파견'으로 법원도 인정했다. 쉽게 말해 비슷한 일을 하는데 누구는 정규직, 누구는 비정규직이면 파견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코레일의 정규직인 열차팀장과 다른 회사에 소속돼 있었던 KTX 승무원이 서로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분리된 업무를 하고 있었던 만큼, '파견'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오미선 씨는 대법원의 이런 판단을 반박한다.
"KTX 차량이 400미터나 되요. 만석이면 1000명의 승객을 태우고요. 발판이 내려오지 않거나 열차 객실문이 열리지 않거나 터널에서 차량이 갑자기 멈추는 등의 크고 작은 사고는 일상적으로 발생해요. 그럴 때면 열차팀장이랑 승무원들이 함께 상황 대처를 하죠. 그런데 이것이 이례적인 상황이라고요? 휠체어를 탄 승객을 인계하거나, 열차 내 갑작스럽게 환자가 발생할 때도 열차팀장과 승무원이 무전기로 상황을 공유해요. 열차팀장이 지시를 하고, 승무원들이 대응을 하는데 그 모든 일들이 다 이례적인 경우라고요? 초등학교 6학년이 들어도 의심스러운 판결이에요."
대법원에 앞서 이들이 승소했던 1심과 2심 재판부는 "KTX 승무원 문제는 안전 문제이자 비정규직 문제이고 여성 문제이자 공기업의 문제"라는 오미선 씨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첫 판결문은 '근로자 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가처분 소송'에서 먼저 나왔다. 2008년 12월의 일이었다. 이들이 코레일의 정규직 지위에 있음을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2년, 2010년 8월 서울중앙지법도, 2011년 8월 서울고등법원도 모두 승무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KTX 승무원들이 승소한 재판에서 법원은 이런 판시를 내렸다.
"코레일이 직접 KTX 여승무원을 평가·징계·교육했고, 코레일 직원인 열차팀장과 함께 조를 이뤄 일을 했으며, 홍익회 등 승무원을 고용한 회사는 별도의 물적 시설이나 장비 등을 갖추지 못해 해당 사업주로서 독립성이 부족한 점을 비춰 KTX 승무원 인사노무 관리의 실질적 주체는 코레일이다."
심지어 이들은 입사 전 코레일 소속으로 전환시켜 준다고 약속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코레일도 KTX 승무원 업무의 도급위탁에 앞서, 노동부로부터 "열차 승무원 중 안내원의 업무는 파견법이 규정한 파견 대상 업무에 해당하지 않고, 도급은 독립적 업무 수행이 가능한 업무에 한해 추진해야 하는데 요청한 업무는 독립적으로 업무 수행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받아 보기도 했었다. 이들이 입사하기 전인 2003년의 일이다.
대법원 외에 또 한 번 법원이 코레일의 손을 들어준 경우가 있었다. 2008년 처음 소송을 낸 34명 외에 별도의 115명이 같은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들이 1심에서는 이기고 2심에서 졌던 것이다. 오미선 씨는 "그런데 같은 내용의 재판이고 같은 2심인데, 우리(34명)는 이기고 그쪽(115명)은 진다는 게 말이 되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복직을 바라냐고요? 그저 그때 우리가 옳았었다는 걸 인정받고 싶었어요"
"판결 끝나고 용산에서 모였는데, 변호사가 1억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되물었죠. '변호사님, 그럼 저희 이혼이라도 해야 하나요?' 1억을 지금 선뜻 뱉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안 쓰고 모아놓은 사람은 없죠. 그런데 안 내면 연이자가 20%라고 하더라고요. 분납도 안 된다 그러고요. 거의 사채죠 뭐."
오미선 씨는 이렇게 말하며 웃고 있는데 같이 웃을 수가 없다.
"재판에서 진 것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1억까지 내야한다니. 과연 이 나라는 나에게 해준 것이 뭔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
'34명의 최종 목표가 코레일 정규직으로 복직하는 것이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건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들은, 솔직한 심정으로 치가 떨린다고 해요. 그리고 과연 코레일이 받아줄까요? 받아준다고 하더라도, 다시 어떤 명분으로든 내칠 것 같아요. 이미 다른 일로 자리를 잡은 사람도 있고요."
다시 물었다. 복직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면, 이 오랜 법적 투쟁의 이유는 무엇이냐고. 오미선 씨는 "저희는"이라는 단어를 꺼낸 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희 34명은… 이기고 싶었어요. 정당성을 찾고 싶었어요. 그때, 내가, 우리가 옳았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어요. 판결문이라고 해봐야 고작 종이 한장일 뿐이지만, 그 종이 조각으로라도, 우리가 옳았다고 인정받고 싶었어요. 밀린 월급? 그런 문제, 이제 다 필요없어요. 우리끼리는 '준다 그래도 받지 말자, 명분만 찾자'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10초만에 끝난 선고로, 우리의 싸움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 버렸어요."
"그저 정당성만 확인받고 싶었다"는 미선 씨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한동안 다음 질문을 찾지 못했다. 미선 씨가 계속 이야기를 했다.
"너무 화가 너고, 억울해요. (대법원 판결 이후)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저에게는 이번 판결이 마지막 희망이었거든요. 그것만 믿었는데, 너무 순진했죠. 왜 대법원이 그렇게 판단했을까? 왜? 그런 생각만 계속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보니,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1심과 2심에서 이겼는데 대법원에서 뒤집힌 사람이 우리 말고도 많더라고요. 가장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는 곳인데, 정치적 논리에 영향도 많이 받는 것 같고요. 그러면 안 되지 않나요?"
같은 날, 같은 재판부가 현대차 비정규직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의 판결문도 내놓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승리였다. 역시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미선 씨는 "아마도 현대차는 사기업이고 코레일은 공기업이라서 다른 판단이 나온 것 아닐까"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이 KTX에서 벌어진다면, 당연히 승무원들이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주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그때 승무원들이 판결문처럼 안내 방송만 하고 가만히 있는다면, 사람들이 그 승무원들을 비난하지 않겠어요?"
"마지막 희망이었던 법이 강자의 편이다? 너무 슬프지 않나요"
KTX 승무원 파업이 한창일 때, 오미선 씨를 자주 만났다. 2008년 철탑 농성을 끝으로 그들이 법정투쟁으로 전환한 뒤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7년만에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세월이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고,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가장 예쁘고, 가장 꽃 같았던 시기였는데, 차가운 바닥에서 모포 한 장 덮고 버텼던 거잖아요.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그 시절을 그렇게 보냈어요."
미선 씨는 철탑농성을 마치고 오랫동안 연애하던 남자 친구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프리랜서로 서비스 관련 강의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키웠으니, 다시 일을 하고 싶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졌고, 며칠 밤을 잠 못 드는 미선 씨에게 남편은 "이 문제 다 해결하고 나면 이민 가자"는 말을 했다.
"세월호도 그렇고 이 땅을 믿고 아이들 키우기 힘들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민은 뭐 쉽나요? 돈이 있어야 이민도 가지."
미선 씨는 다시 웃었다.
"지고 나니까, 누가 저희에게 그러더라고요. '너희가 너무 순진했다'고. '법은 약자와 약자, 혹은 강자와 강자가 싸울 때만 정으로운 것'이라고요. 강자와 약자가 싸울 때, 법은 강자의 편이라고요. 너무 슬픈 얘기죠? 저희에게는 그때, 법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미선 씨는 "그런데 법이 공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고,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냐"고 말했다. 그때 정부도, 회사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곳이 법원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여성 대통령이어서 주부들이 희망을 갖고 있잖아요. 저만해도 파업하고, 아이 둘 낳고 키우고 다시 사회에 나가기가 너무 어려운데, 여성이 대통령이 되어서 거는 희망이 있었어요.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져보는 거예요."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못하고 있던 마지막 질문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이냐고.
"저도 궁금해요. KTX 비정규직 문제로 제가 10년을 싸웠어요. 스물여섯이 10년을 싸워 서른 여섯이 됐네요. 앞으로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KTX 승무원 문제는 어떻게 돼 있을까요?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의 척도라고 생각해요. 정부와 코레일이 나서서 해결해주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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