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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택한 독일이나 이명박근혜 택한 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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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택한 독일이나 이명박근혜 택한 우리나…

[독서통] <비상경보기>

연일 공천 파동이 이어지더니 4.13 총선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분 있나요? 야권 분열, 새누리당 진박 논란, 더불어민주당 공천 파동…. 우리 삶은 빠른 속도로 와해하는데, 민생 이슈는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내가 좋아하는 후보가 당선된다 한들, 정말 내 삶이 나아질까요? 아니, 지금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가 조금이라도 개선될까요?

답답합니다.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시대, 낙관보단 절망이 지배하는 시대, 모두가 나의 적이 되고 나의 경쟁자가 되어가는 시대.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지금 이 상황을 놓고서 "비상경보기를 울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강 박사가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100년 전에 언급했던 '비상경보기'를 새 책의 제목으로 택한 이유입니다.

29일 김종배 <시사통> 대표와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가 진행하는 '독서통'은 <비상경보기>(동녘 펴냄)를 쓴 강신주 박사를 모시고 절망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를 진단했습니다.

강신주 박사가 제시한 해법은 간단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단, 그가 말하는 사랑은 예수의 사랑이 실종된 교회, 또 부처의 자비가 사라진 사찰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카페에서 남녀가 커피를 같이 마시며 사랑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강 박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가능한 공동체의 복원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절망과 희망을 오간 강신주 박사와의 한 시간 동안의 폭풍 대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 "지금 한국 사회에는 두 가지 가치가 경쟁 중." ⓒ프레시안(최형락)



"작가가 비상경보기 켜야 하는 시대"

김종배 : 매주 화요일 찾아뵙는 독서통 시간입니다. 이번 주에는 어떤 저자를 모셨습니까?

강양구 : 제가 나오는 책마다 사서 정독하는 저자의 새 책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가 아닐까요? 바로 강신주 박사입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펴냄), <강신주의 감정 수업>(민음사 펴냄) 등으로 많은 독자를 만났죠. 또 강연으로도 여러분과 만나고 있고요.

그런데 강신주 박사가 최근에 <비상경보기>를 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고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기자로 일하면서 긴장하고 세상사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더군요. 안이하고 나태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서 많이 배웠고, 또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을 배운 게 참 많습니다.

김종배 : 책이 제법 두꺼워요. 하지만 읽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서로 다른 주제를 담은 60개 꼭지의 글을 모아뒀기 때문에, 한 꼭지 한 꼭지의 글은 앉아서 단숨에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 기자 말대로, 한 꼭지 한 꼭지 글의 여운이 상당합니다.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 많습니다. 먼저 인사부터 하죠. 강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강신주 : 네, 안녕하십니까.

김종배 : 제목이 왜 비상경보기입니까?

강신주 :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가운데 발터 벤야민이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시대의 위기를 알릴 수 있어야 저자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경보기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

진정한 저자라면 위기를 다른 이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거죠. 벤야민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나치가 집권한 시기에 살았습니다. 바로 그런 엄혹한 시기를 살았기에 벤야민은 작가의 의무로 비상경보기 역할을 상정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그때의 독일과 비슷합니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의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물론, 모든 작가가 벤야민처럼 비상경보기를 켜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일부러 비상경보기를 끄는 저자도 있어요.

김종배 : 왜요?

강신주 :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비상경보기 소리를 싫어하잖아요. 심지어 '삐삐삐' 울리는 소리가 싫다고 비상경보기를 꺼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일이죠. 비상경보기 같은 말과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말과 글을 싫어합니다. 지금이 비상상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하죠.

그러니까 비상경보기를 울리는 저자는 좋은 소리를 듣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와의 불화도 감수해야죠. 벤야민도 바로 그랬죠.

김종배 : 한국 사회가 비상경보기를 울려야 할 단계에 처했다고 보시는 거군요?

강신주 : 그렇죠. 저는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전두환 독재 정권 때였고, 1987년의 민주화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기인 이한열이 목숨을 잃는 것도 지켜봤죠. 하지만 당시와 비교해서 지금이 나아졌나요? 저는 오히려 나빠진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때는 존재했던 공동체가 지금은 붕괴했다는 겁니다.

철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가장 큰 위기가 뭘까요? 예수의 사랑, 불교의 자비, 공자의 인(仁) 등 여러 가지로 얘기가 됩니다만, 딱 한 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지금 사랑은 얼마나 작아졌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면 고작 카페에서 시시덕거리는 커플이나 결혼한 부부, 혹은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만 떠올리지 않습니까?

세월호 사고 같은 끔찍한 사건도 남 일입니다. 마치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보듯이 한 번 놀라고 지나갑니다. 다들 애도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자기 일처럼 절실하게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의 아픔에 공감한 사람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저는 한국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서 절실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가치가 사라진 사회, 공동체가 파괴된 사회가 바로 한국입니다. 아파트의 옆집 사람이 죽었어요. 하지만 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수천 년 전의 철학자가 되뇌던 그 가치(사랑)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두 가지 가치가 경쟁 중입니다. 경쟁과 사랑!

강양구 : 이 책에 선착순 얘기가 있죠?

강신주 :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을 촉발하는 거예요. 경쟁하면 유대하지 못하거든요. 역사적 공식이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억압적 사회에서 다수를 지배하는 방법은 경쟁을 부추기는 거예요. 사랑하지 못하게. 혁명이라는 게 다수의 유대 속에서 일어나는 거잖아요. 경쟁은 그걸 못하게 하죠.

지금 정치 사회 분위기를 보면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죠. 총선도 있습니다만, 힘들어요. 모든 것들이 그래요. 경쟁 체제를 정당화하는 문화가 소비되죠.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토건 사장의 강력한 이미지를 한반도 대운하 공약으로 연결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강신주 박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등장을 파시즘의 전조로 해석했다. ⓒ프레시안

파시즘 사회로 치닫는 한국

김종배 :
아까 독일의 나치 얘기도 나왔습니다만, 책 곳곳에서 파시즘 이야기를 하세요.

강신주 : 우리가 깨알같이 쪼개졌잖아요. 다들 겁냅니다. 스스로는 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해요.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노동자가 연대해서 돌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연대하지 않으니, 깨알같이 쪼개진 노동자 개인은 겁만 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강력한 누군가를 원해요. 깨알같이 작은 사람은 이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줄 누군가가 등장하기를 갈구합니다. 파시즘이 바로 그렇게 등장하는 거예요. 박근혜 대통령을 보자고요. 아버지의 아우라(경제 개발)를 가지고 당선되었어요. 많은 사람이 박근혜를 메시아처럼 생각한 거죠.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아버지처럼 해결하겠다고 '뻥' 쳐서 당선된 거잖아요.

강양구 :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 당선도 파시즘의 전조로 설명하셨어요. 해당 부분을 잠시 읽어 볼게요. 지금 말씀하신 바로 그 내용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 우리는 바깥에서 구원을 기다리게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맡길 수 있는 그 무엇, 메시아와 같은 존재를 고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번식하기 좋은 조건이 확실히 갖추어진 셈이다. 현대건설의 '중동 신화' 아우라로 무장한 건설사 사장 출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도, 자본주의 시스템을 우리 땅에 이식시킨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강신주 : (파시즘의) 전조죠. 이명박이 어떤 사람이었나요? 박정희가 군사 독재를 했다면, 토건 독재를 했어요. 당선 전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했죠(한반도 대운하). 그런 강력한 이미지에 사람들이 열광한 거 아닙니까? 갈수록 이렇게 강력한 자,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누군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요.

강양구 : 사람들이 연대해서 팍팍한 삶을 바꿔 가려 하지 않고, 강력한 누군가가 우리를 구원해주길 바란다는 거죠.

강신주 : 그런데 진실은 정반대죠. 바로 그 누군가가 우리를 연대하지 못하게 하는 주범입니다. 독일이 이런 악순환에 빠지는 걸 벤야민이 본 거잖아요. 그래서 비상경보기를 그렇게 울려댔지만, 결국 독일은 파시즘의 길로 빠져들었죠.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벤야민이 지금 한국 사회에 살았다 하더라도 이런 책을 썼을 거라고.

저는 지금 한국 사회가 민주 사회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간신히 유지되는데,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주길 원합니다. 이에 호응해 메시아를 자청하는 사람이 계속 등장하는데 어떻게 민주 사회라 말할 수 있겠어요?

김종배 : 어느 순간부터 특정 정치인 팬덤 현상이 한국 정치의 특징이 되었어요. 이런 현상도 같은 맥락입니까?

강신주 : 그렇죠. 많은 사람이 한때 노무현 대통령 좋아했잖아요. 지금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은 앞장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정규직 법 개악, 집시법 강화 같은 정책을 펼쳤죠. 노무현 대통령이 보수 정당이 해야 했을 정책을 펼쳤어요. 그런데 팬 눈에는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의 잘못은 안 보여요.

그러니 팬덤은 위험합니다. "저 사람 모세다!" 하며 쫓아가는 것 말이죠. 언젠가부터 한국 정치를 보면 마치 1990년대 후반에 H.O.T를 좋아하느냐, 젝스키스를 좋아하느냐 가지고 팬들이 싸우던 모습과 비슷해졌어요. "우리 오빠를 공격하면 안 돼!" 이렇게요. 이런 식은 한국 사회, 한국 정치는 물론이고 그 정치인에게도 독이죠.

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왜 진보 정치인도 까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이 있어요. 까긴 뭘 까요? 또 왜 까면 안 됩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 까도 되죠. (웃음) 이런 반응에도 밑에는 "우리 오빠는 건드리면 안 돼!" 이런 정서가 깔린 거예요. 이런 식은 정말 곤란합니다.

강양구 :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면 좋지만, '나의 정치인'은 건드리면 안 돼?

강신주 : 거기서부터 파시즘이 시작되는 겁니다.

김종배 : 어느 순간부터 '빠'와 '까'의 싸움이 되어 버렸죠.

강신주 : 그렇죠. 오빠 좋아하는 사람들 특성이 또 하나 있어요. 갈아타요. (웃음)

그러니 계속해서 새로운 (메시아) 정치인이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처음 정치권에 나타났을 때 기억나시죠? 그때도 그랬어요. "어, 우리 오빠 상태가 안 좋네?" 그런데 새로운 오빠(안철수)가 등장한 거야. 지금은 이제 그 오빠도 낡아 보입니다. 또 새로운 오빠를 기다리는 거죠. 이러다 허경영 씨한테 갈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김종배 : 갈아탄다는 건 (특정 메시아 정치인에 관한) 몰입과 함몰과 추종을 제어할 최소한의 장치가 작동한다는 증거 아닌가요?

강신주 : 아니죠. 더 완전한 메시아를 찾는 거예요. "우리 오빠를 가까이 보니까 나랑 너무 닮았어. 내가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네?" (웃음) 이러며 갈아타는 겁니다.

김종배 : 50미터 미남, 1미터 추남이군요. (웃음)

▲ 사람들은 어느새 끊임없이 메시아를 갈구하게 됐다. ⓒ프레시안(최형락)

"'멘토' 찾지 말고 스스로 결정해라"

강양구 :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가 되어서 끊임없이 신상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네요. 책에서 멘토 현상도 파시즘의 전조로 거론하셨어요. 멘토를 상정하고 강연을 쫓아다니는 것 역시 정치인 '오빠'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고요.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멘토들의 판단과 생각에 열광하고 있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보다 멘토들의 생각과 판단이 더 탁월하다는 군색한 변명은 하지 말자. 그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위한 멘토가 되지 못하고 멘토를 찾아 헤맬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파시즘이란 괴물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강신주 : 벙커1에서 고민 상담 강의 '다상담'을 진행하다가 그만둔 이유가 있어요. 처음에는 진지한 고민이 오갔어요. 그러나 한참 지나고 보니 제가 마치 스님처럼 소비되고 있더라고요.

강양구 : 사람들이 직접 자기 고민을 찾고 해결하길 원했는데, 강사에게 답을 구하기 시작한 거군요.

강신주 : 그렇죠. 그때 강의를 <강신주의 다상담>(동녘 펴냄)이라는 책으로도 냈는데, 더는 그런 상담 강의를 안 하기로 하면서 에필로그에 그런 얘기를 솔직히 썼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게 제 강의를 자주 찾는 사람이에요. 강의만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들. 미친 거죠!

김종배 : 그렇게 얘기할 것까지야. (웃음)

강신주 : 철학자는 사람들을 고민하게 하고 사유하게 하는 사람이지,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렇게 저만 쫓아다니다가 제가 죽으면 어떻게 살려고요? 제가 늘 강조하는 게 "제발 다른 사람을 따르지 말고, 네가 생각하고 네가 결정해라. 관습도 좇지 말고 네 삶에서 결정해라"는 거예요.

물론 강연 한 번 들었다고, 곧바로 이렇게 살 수 없죠. 그러면 강의를 또 찾아와요. 마치 교회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주일 내내 탐욕스럽게 살다가 교회에 하루 나와서 회개하는. (웃음)

제가 재작년에 실수한 적이 있어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 김어준 씨와 함께 '킬링 캠프'라는 토크쇼를 진행했어요. 끝나고 나서 제가 느낀 게 뭐였는지 아세요? '여기에는 나와 김어준을 좋아하는 사람뿐'이라는 거였어요. 마치 스타 가수의 콘서트를 찾듯이 말이죠. 느낌이 안 좋더라고요. 자위행위? 종교 행위?

토크 콘서트 같은 걸 될 수 있는 대로 안 하려는 이유가 이런 겁니다. (내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와 상관없이) 나 좋다는 사람이 우르르 와서 돈 내고 앉아 있는 것, 얼마나 끔찍한 일이에요. 내가 그렇게 싫어하고 비판하는 모양을 내가 흉내 냈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인문학자는 혼자여야 합니다. 팬 같은 걸 거느리고 다니면 안 돼요.

강양구 : 팬들이 이 방송 들으면 서운할 것 같아요.

강신주 : 서운해도 어쩔 수 없죠. 이제 정신 차려야죠. 사랑의 가치는 그 사람이 외로워지더라도 내게서 떼놓는 거예요. 자유롭고 당당해지도록. 아이러니하지만 제가 책 쓰고 강의하는 이유는 다시 찾아오지 마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 강의마다 오는 사람이 있어요. 서울에 사는 게 분명한데, 여수에서 하는 강의에 찾아와서 해맑은 미소로 앞자리에 앉아있어요. 무섭습니다. (웃음)

우리는 사랑하고 있을까?

강양구 : '왜 결혼한 사람이 사랑하기가 어려운가'를 책에서 이야기하셨어요. 읽으며 무릎을 쳤습니다.(웃음) 사랑은 상대방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유지되는데, 결혼 제도로 그 자유가 박탈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는 거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려는 이유는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에게 지금처럼 기쁨과 행복을 안겨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이제 유하가 왜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이야기했는지 분명해진다. 결혼은 직간접적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이 나의 남편이나, 혹은 나의 아내라는 일종의 소유관계를 공적으로 인증 받으려고 한다. 이런 소유관계는 나는 어느 집안의 며느리이거나 아니면 사위가 되는 소속관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결혼은 최종적으로는 사랑의 감정마저도 식어 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강신주 : 책에 '일반사랑론', '특수사랑론' 두 꼭지가 있죠? 우리가 사랑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 두 꼭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이에서부터 나이 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랑이 일반사랑론이라면, 특수사랑론은 결혼한 지 한 20~30년 된 사람들, 상태 안 좋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죠. (웃음)

강양구 : 저는 특수사랑론에 더 공감이 가던데. (웃음)

강신주 : 책 중간에 암벽 타는 사람 이야기를 했어요. 정상을 향해 두 사람이 교대로 암벽용 못, 즉 하켄을 박아 로프를 연결해 올라갑니다. 그러다 박아 놓은 하켄이 빠지면 두 사람이 모두 로프에 연결된 채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릴 때가 있어요. 경험해 본 사람은 알아요.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습니다. 하켄이 두 사람의 몸무게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이때 위와 아래에 있는 두 사람에게 마지막 윤리적 의무가 기다리고 있어요. 위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아래에 있는 사람과 연결된) 로프를 끊어서는 안 돼요. 둘이 함께 죽을 각오로 아래에 있는 동료와 함께하려 해야 해요. 이게 바로 위에 있는 사람의 의무입니다. 그럼, 밑에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밑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로프를 끊으려고 해야 해요. 묘하지 않나요?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사람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의 손을 뿌리치려고 해야 하고. 바로 이런 관계일 때 그 둘은 사랑하고, 연대하고,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겁니다.

이 원칙이 암벽 등반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남편이 실직했어요. 그러면 남편이 바로 아래에 매달린 겁니다. 부인이 그렇다고 남편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그게 둘이 사랑하는 건가요? 아이가 심하게 아파요. 혹은 대학을 못 가요. 그렇다고 부모가 이 아이를 놓아버린다면 그게 사랑하는 건가요?

정리 해고도 마찬가지예요. 경영 상태가 최악입니다. 그렇다고 회사가 정리 해고로 노동자의 손을 놓는다면 이건 연대하는 건가요?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밧줄로 끝까지 함께하려는 관계를 맺고 있는 자가 주변에 있는지. 그럼, 당신은 사랑하며 사는 겁니다. 그게 없다면? 그럼, 자신은 기껏해야 주고받는 교환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죠.

강양구 : 그렇게 위아래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면서요?

강신주 :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래 있는 사람에게 "내가 밑에 있었으면 스스로 줄을 끊었을 것"이라고 말해선 안 돼요. 아래 있는 사람은 "내가 위에 있었으면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냥 자기 위치에서 연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역지사지, 이런 말 많이 하죠? 제가 싫어하는 말이에요. 거짓말입니다. 사장이 그런 말 많이 하죠? "나도 노동자 심정 알아." 개소리예요. 자기가 무슨 수로 노동자 심정을 알아요? 이런 말 자주 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합니다. 사장은 사장으로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노동자 손만 안 놓으면 됩니다.

강양구 : 사실 공동체의 가치를 얘기해야 하는 건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의 몫이죠.

강신주 : 책에서도 써 놓았잖아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보수가 없어요. 보수는 다 붕괴했어요. 진짜 보수는 공동체의 가치, 사랑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이에요.

▲ 소셜 미디어가 정말 소통의 도구일까? ⓒpixabay.com

오늘도 '좋아요' 찾는 당신, 소통하고 있습니까?

강양구 : 그런데 많은 사람이 파편화되었음에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때문이죠.

강신주 : 제일 문제가 연대의 제스처예요. 연대했다는 착시 효과. SNS의 가장 큰 문제는 소통한다는 착각이에요. SNS 자주 하는 사람 가운데 대인 관계 안 좋은 사람도 많아요. (웃음) (SNS는) 실제로 제대로 소통하지 않았는데, 소통했다는 허구적 관념을 줘요. 지금 많은 청소년이나 젊은이가 이 허구에 빠졌죠.

강양구 : 실제로는 사랑받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마치 사랑받는다거나 사랑한다고 착각한다는 거군요.

강신주 : 그렇죠. 지금 사람들이 쪼개졌으니 소통의 도구로 SNS를 활용하려 하는데, 그 매체를 쓰는 순간 더는 가까워지지 못하죠.

김종배 : 어떤 분이 페이스북을 '디지털 교회'로 비유하셨더라고요. '좋아요'는 디지털 세계의 '아멘'이고요.

강신주 : 젊은이들이 교회나 성당, 혹은 사찰에 다니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그들은 스마트폰을 성소로 삼아 무의식적이나마 종교 행위를 하는 거죠. 이런 현상은 신랄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통했다' 혹은 '참여했다'는 착각을 얻고자 '좋아요'를 누르죠. 아무 의미가 없어요. 뭔가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강양구 : 자기 마음에 드는 이야기 혹은 뉴스를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 오늘 할 만큼의 저항을 했다고 만족해버리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거죠?

강신주 : 그렇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죠. 배를 탔다면 강 건너로 가서 배에서 내리기까지 해야 해요. 배에서는 안 내리고 왔다 갔다만 하면서 '좋아요' 누르는 게 어떻게 강을 건너는 거예요? 만약 SNS에서 "광화문에 모이자" 해서 광화문에 모이는 사람이 많으면, 그때야 비로소 SNS가 소통의 도구 역할을 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로 SNS가 그런가요?

우리 시대를 이렇게 정의해도 되겠죠. 소통의 제스처, 사랑의 제스처는 난무하고 정작 소통도 사랑도 이뤄지지 않아요.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남남일 뿐이죠.

우리 세대는 글렀다. 아이들이 미래!

김종배 : 문제는 연대의 복원 아니겠습니까? 그 가능성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강신주 : 힘듭니다. 19세기~20세기 초 혁명이 이어질 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뭘까요? 농촌에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도시에서 폭동은 일어나도 혁명으로 이어진 적은 별로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도시의 삶은 기존 체제에 훨씬 더 속박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농촌의 삶은 기존 체제에서 비교적 독립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전자공학과 나와서 회사에 취직했어요. 무슨 연대를 해요? 공장이 무너지면 자기도 굶습니다. 투덜투덜할 수는 있겠죠. '좋아요'도 누를 수 있어요. 하지만 연대는 안 돼요. 우리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깨알처럼 흩어진 채 조직의 부품으로서 자라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는 쉽지 않아요.

반면에 농촌의 삶은 다르죠. 자기가 직접 먹을거리를 길러서 먹을 수 있다면, 기존 체제로부터 절연되어도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습니다. 변화를 꿈꾼다면, 기존 체제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그 체제에 기생해서 먹고사는 삶을 끊고 살 물질적 조건이 얼마나 마련되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농촌에서 시작한 혁명이 성공한 원인이 바로 이 때문이죠.

강양구 : 물질적인 조건이 가능할 때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얘기군요.

강신주 : 맞아요. 배고픈데 둘이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영양 상태가 되고 안정적이어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어요.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정신적인 결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물질적인 토대가 마련된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물질적인 토대 자체가 기존 체제에 속박된 상황을 보내고 있죠.

김종배 : 체제로부터의 이탈, 체제와의 단절을 (깨알처럼 흩어진) 개인에게 요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강신주 : 지금 현실은 혁명이 불가능하다, 아니 조건 자체가 어렵다, 바로 여기서부터 아프게 자각했으면 좋겠어요. 중병에 걸렸다면 중병임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세대는 이미 체제에 속박되어 자유인이 되기는 글렀어요. 그러니 우리 다음 세대는 독립된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길러야 합니다.

기존 체제에 기생하는 삶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도록 만들지 말고, 다르게 길러보자는 거예요. 방학 때는 농사도 짓게 하고, 몸을 써서 땀을 흘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강양구 : 깨알처럼 흩어져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법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줘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김종배 : 삶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기도 하고요. 먹고사는 데서 얼마만큼 공통분모를 만들어 갈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강신주 : 그렇죠. 그래서 자꾸 대안적인 삶, 예를 들어 중심이 없는 협동조합 같은 모습이 늘어나야 합니다. 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김종배 : 그런데 이런 건 어떻습니까? 소박한 차원에서 몇 사람이 의기투합해 작은 공동체 마을을 일구자고 농촌으로 내려갔어요. 처참하게 실패했죠. 산산이 부서졌어요.

강신주 : 제스처의 문제입니다. 소통의 제스처만 취하고, 공동체가 절박하지 않았던 거예요. 자기밖에 없었던 겁니다. 몸은 농촌에 갔는데, 도시적 삶을 그대로 가져간 거예요.

강양구 : 저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농촌에서 공동체를 꾸리고 나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다 함께 홈스쿨링하기로 했대요. 그런데 그런 실험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하찮게 보이는 옆집 부모가 우리 아이를 가르치는 게 못 미더워서 랍니다. 그런 갈등 때문에 공동체 교육이 안 된다고요.

강신주 : 도대체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가요? 저희 아버지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셨어요.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저희 아버지가 무식하다, 이런 생각을 감히 할 수가 없어요. 자기만의 삶에 대한,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으셨어요. 단지 입바른 지식인처럼 세련되게 표현을 하지 못할 뿐이죠.

공동체가 자꾸 실패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런 생각이죠. '도시에서 우글거리며 사니 모양이 안 좋네. 난 모던한데, 진정한 공동체? 내가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내려가니 그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죠. 각자 작은 독재자가 되려고 모이는 겁니다. 독재자들의 공동체…. (웃음)

▲ "모두 함께 한 발 내딛는 게 진보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확 달라진다'는 사람, 경계해야

강양구 : 책에서 "오십보백보는 다르다"고 하셨어요. 흔히 같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울림이 컸습니다.

대표자를 뽑는 일체의 선거는 신념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삶의 문제다. 이미 우리는 과거 정부들에서 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그리고 집권당이 어떤 당이냐에 따라 대표자의 임기 동안 우리 삶은 상당한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이념에서 50보 물러나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50보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49보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100보 물러서 있는 후보를 뽑는 순간, 우리가 똥줄 빠지게 한 걸음을 내딛는다고 해도 99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삶에서 50보와 100보는 상해죄와 살인죄의 차이처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인문정신 발터 벤야민도 말하지 않았던가.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강신주 : 책에서 배운 게 아니고요, 제가 산을 좋아하는데 산에서 배운 거예요.

벤야민이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라고 했어요. 진보는 1보예요. 한 걸음 못 걷고 어떻게 두 걸음 걸어요? 문제는 진보 내부에서도 파시즘적 경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단박에 3보 갈 수 있어." 이런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안 돼요. 제일 어려운 게 한 보 내딛는 거예요.

김종배 : 에필로그에서 한 얘기와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법"이라고 하셨어요. 그 대목에서 우리 앞에 두 개의 현실이 있다고 하셨어요.

강신주 : 이렇게 얘기해 봅시다.

한 아이가 "난 나중에 나사(NASA)에서 일할 거야!"라고 할 수 있잖아요. 만일 그 아이가 이상주의자라면? 진짜 그 꿈을 이루려 한다면? 나사에 가기 위해 준비해요. 국어도 공부하고, 수학도 공부하고, 과학도 공부하고, 영어도 공부하고. 꿈을 이루려 안간힘을 쓸 거예요.

반면 이런 아이도 있어요. 나사 간다고 얘기하고는 국어 공부를 안 해요. "어차피 미국 가니 우리말 안 써!" (웃음) 개꿈이죠. 꿈과 현실이 분리된 거죠.

이상을 강하게 품으면 현실이 보여요. 내가 꿈꾸는 모습이 되는 걸 가로막는 걸림돌이 보여요. 제가 책에서 설악산 대청봉 꼭대기에 오르는 거로 비유했어요. 진짜 대청봉에 오르려 하면 산길이 보입니다. 또 저곳에 오르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가 떠올라요. 반면 올라갈 생각을 접으면 산이 풍경으로만 보여요.

꿈을 가져야 보이는 현실이 있고, 꿈이 없는 사람이 그냥 받아들이는 현실이 있어요. 후자가 끔찍한 거예요. 그냥 체념하는 거죠. 이렇게 우리에게 두 가지 현실이 있는 거죠. 이상을 가진 사람이 접하는 극복해야 할 현실이 있고, 이상이 없는 사람이 체념하고 순응하는 현실이 있죠.

그러니 지금 이상이 있는지도 되물어 봐야 해요. 또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꿈을 가져라!" (웃음) 진짜로 프랑스에 여행갈 꿈을 꾼 사람은 디테일하게 다 계산해요. 어떻게 할까, 어디로 갈까. 반면 이런 사람도 있어요. "언젠가 프랑스 갈 거야!" 그리고 준비는 안 해. (웃음)

김종배 : 삶의 공유도 중요하지만, 이상의 공유도 중요하겠네요.

강신주 :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잖아요. 서로 사랑하고 유대하자. 옛날부터 다 한 말 아니에요.

여러분 교회 다니시잖아요? 예수의 사랑이 카페에서 커플끼리 커피 마시는 거였나요? 아니잖아요. 불교의 자비, 그거 아니잖아요. 그 가치를 다 무너뜨려 놓고 교회 다녀 뭐할 거고, 사찰 가서 뭐할 거예요? 절에 가서 하는 짓이 기와에 자기 아이 이름이나 쓰고 있고. 차라리 거기에 노숙자를 돌봐 달라고 써야 자비죠.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 여러분은 이미 망가졌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노력해도 다르게 살 가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사회를 뜯어고치는 걸 시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아이, 여러분의 손자가 결국 그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할 겁니다.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김종배 :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강신주 박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책에 나온 얘기의 10분의 1도 채 얘기를 못 나눈 것 같아요.

강양구 : 사실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는 시사 이슈를 소재로 한 글이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어요. 그런데 글 한 편 한 편에 들어간 생각의 깊이가 만만치 않아서 죽비를 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독자 여러분은 철학자 강신주와 한 번 겨뤄본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으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김종배 : 이제 마무리할까요. 책 한 권을 탈고하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 <비상경보기>(강신주 지음, 동녘 펴냄). ⓒ동녘
강신주 :
책을 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이제 됐다' 싶죠. '이제 됐다.' 이 느낌.

철학자가 해야 할 역할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것(시사 문제)을 써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 빈틈이 많은 거예요. 기자도 많고, 평론가도 많고, 사회학자도 많은데 말이죠.

강양구 : 그러고 보니, 이 시대의 저널리스트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일침을 놓으셨더라고요.

강신주 : 너무 현란함에 빠지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네온사인에 빠지듯 화려함에 물들어서 문제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연대의 공동체를 누가 훼손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 뒤에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사랑과 연대 속에 살도록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보의 잣대는 사랑이에요. 그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김종배 : 오늘 <비상경보기>를 낸 철학자 강신주 박사와 귀한 말씀 나눴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신주 :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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