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있을 잔혹한 고문, 그리고 예정되어 있는 처형, 이런 상황에서 반역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행복할 수 있는 권리는 자살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국가로서는 반역자가 행복한 꼴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자살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이 순간 반역자가 바라는 행복은 자살이고, 피하려는 불행은 자살하지 못하는 것이다.
▲ <행복할 권리>(마이클 폴리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펴냄). ⓒ어크로스 |
폴리는 이런 부조리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분석과 종합의 정신을 따르는 현대 물리학자들은 실재의 본성의 찾으려고 미시 세계로 더 파고 들어갔다. 미시 세계에서 안정적인 궁극적인 원소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결합시키면 우주를 다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미시 세계에서는 물질을 이루는 궁극적인 요소를 찾으려다가 그것을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뿐만 아니라 우주를 이루는 궁극적 실재도 우주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은 행복을 포기하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폴리는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부조리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폴리에게 특히 영감을 주었던 것은 알베르 카뮈와 그의 책 <시시포스의 신화>다.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바윗덩이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고 그것을 다시 언덕 밑으로 떨어뜨리는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는 일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윗덩이를 언덕 정상에 올려놓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시시포스의 오산이다. 언덕 정상으로 밀어 올린 돌은 불행히도 다시 언덕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폴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신이 시시포스에게 바윗덩이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언덕 밑으로 떨어뜨리라는 명령만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시시포스는 다양한 것을 결정해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는 언덕 밑에서 정상까지 바윗덩이를 밀고 갈 수 있는 다양한 경로들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다. 혹은 실수인 척 가장하여 바위를 중간쯤에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
폴리가 스토아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우리의 내적 힘이 본성에 진실하다면, 그것은 항상 상황이 제공하는 가능성에 적응할 것이다. 미리 결정되어 있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있다. 장애물은 활용할 수 있는 재료로 전환된다."
폴리의 이야기는 매우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거대한 행복은 포기하고 깨알 같은 행복을 얻자는 것이다. 왜 폴리는 깨알 같은 행복을 얻자고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있는 개인이란 지평에서 사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회사에 근무하는 회사원이 한 명 있다. 그는 지혜롭게 자신의 힘과 조직의 힘을 계산해보고, 자신의 힘만으로 조직을 개선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일을 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실 그가 회사를 떠날 각오로 부조리에 맞서지 않으려는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상황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고 미리 포기할 때, 우리는 주어진 상황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회사원의 판단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인들을 파편화시키면 자본이나 권력은 수월하게 개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법이다. 당연히 자본이나 권력은 파편화된 개인들에게 깨알 같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마저 주지 않는다면, 개인들은 행복할 권리를 요구하며 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황마저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 아닌가? 누구도 죽음이란 부조리에 저항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회적 억압이란 부조리에는 저항할 수 있다. 결국 생명체로서 가진 한계는 극복하기 힘들겠지만, 인간이 만들어온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한계는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법이다.
오솔길에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 바위 때문에 상당히 많은 거리를 우회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거대한 바위를 들 수 없다. 단지 나에게는 다양한 우회로를 고민하여 우회로를 만드는 방법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우리'는 그 거대한 바위를 충분히 들 수 있다.
모든 '나'들이 바위를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로 경험한다면, 그 바위는 영원히 그 자리에 박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나'들이 '우리'로 연대한다면, 아주 가볍게 그 바위는 옮겨질 수 있다. 바로 이 순간이다. 폴리가 제안했던 '깨알 같은 행복'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폭로된다. 이것이야말로 폴리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카뮈의 생각 아니었나?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에 등장하는 카뮈의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개인의 '깨알 같은 행복'은 우리라는 커다란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진정한 바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