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8번 출구에 가면 고층빌딩 숲 사이에 에스키모들의 이글루같이 생긴 낮고 둥그런 비닐 천막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발전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현란한 강남 한복판에 선 이질적이고 왜소한 이 천막 안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기록적 한파가 닥쳤던 지난 겨울 내내 손바닥 만한 핫팩과 냉기를 막아줄 슬리핑백 한 장에 의지한 채 반올림 활동가들과 연대한 시민들은 2016년 3월 5일 현재 151일째 얼음장 같은 찬 바닥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선전전을 했고 저녁이면 초대 손님들과 이어말하기를 하면서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도록, 공명될 수 있도록 분투했다. 불편한 잠자리와 혹한을 감내하며 5개월째 고난의 행군을 이어온 그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는가?
지난 9년간 반올림의 줄기찬 요구는 크게 세 가지이다. 사과, 보상, 재발방지. 최근의 진척사항을 구글 자료검색을 통해 일별해 보면 일견 희망적인 변화가 있는 듯하다. 기사들을 통해 재구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4년 5월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가 기자회견을 통해 반도체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2015년 9월 삼성전자 사내 보상위원회를 발족했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착수했다. 2015년 12월31일까지 추가 피해자들의 보상신청을 받아 총 150여 명의 신청자 중 110여 명에 대한 보상에 합의했다. 2016년 1월 12일 세 협상주체는 재발방지대책에 합의했다. 2016년 1월14일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가 피해자들 직접 만나 사과하고 사과문을 전달했다. 재해예방대책에 대해 합의했던 2016년 1월 12일, 삼성전자 자사 블로그에는 "조정권고안의 기준과 원칙을 기초로 보상과 사과가 진행된 데 이어 예방문제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합의에 이르렀다"는 글이 게재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매체들은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보상 마침내 마무리"라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글루 모양의 텐트는 자리를 지켰고 반올림은 어제도 오늘도 강남역 8번 출구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급기야 몇몇 매체들은 반올림의 '몽니'를 비난했다. 혹자는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에게 삼성전자가 단돈 500만 원을 갖고 와서 회유, 협박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큰 변화가 아닌가 반문했다. 삼성전자의 '통큰 결단'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삼성전자가 세련된 방식으로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대책을 이야기 하고 언론에 홍보할수록 농성장을 지킨 반올림은 운동논리에 빠진 '전문 시위꾼'이나 몽니를 부리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비춰졌다. 그렇다면 반올림이 농성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본다.
2012년 11월 삼성전자가 반올림에 대화를 제안한 뒤 2013년 12월 본교섭이 시작되었다. 교섭과정에서 협상에 참여했던 피해당사자 및 가족들의 일부가 반올림과 의견 차이를 보이며 2014년 가족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주요 이견에는 재발방지대책과 공익재단 설립 등에 대한 우선순위가 포함되었다. 2014년 9월,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의 요구에 의해 3인의 조정위원회 (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가 도입되었고 조정위원회는 2015년 7월에 조정권고안을 발표했다. 권고안에는 사과와 보상, 재해예방대책이 포함되었다. 사과의 내용에는 노동건강인권선언, 작업장에 내재한 건강유해인자로 인한 위험에 대한 관리소홀 인정, 불행에 대한 배려와 조속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못함으로써 고통을 연장시킨 결과 인정이 포함되었다.(조정권고안 제 13조, 제 14조). 사과의 방식에는 공익법인에 의해 보상대상자로서 적격 판정받은 사람들에게 삼성전자가 서신의 형식으로 사과문을 전달한다. (조정권고안 제 14조). 한편 보상절차는 공익법인이 심의, 산정 지급한다. 보상내용에 포함되는 위로금은 공익법인이 정한다. 향후 조정에서 구체적 보상기준은 조정권고안 내용을 '최저' 기준을 하여 공익법인이 정한다. 조정권고안은 크게 건강하고 안전한 사업장 내부 체계 완성, 옴브즈만 제도 도입, 그리고 공익기구에서 영업비밀의 관리와 공개를 위한 구체적 규정 집행으로 나뉜다. 따라서 보상과 재해예방대책 의 주체는 독립된 사회적 기구(공익법인)이다. 공익법인 운영에 필요한 기금 1000억 원은 삼성전자가 기부한다.
그런데 조정위원회 권고안 발표 이후 삼상전자는 권고안을 따르지 않고 조정보류를 요청했다. 2015년 9월 3일 삼성전자는 사내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직접 보상을 시작했다. 가족대책위는 이에 동조했다. "최대한 많은 출연기금을 보상에 사용해야 하고 신속한 해결을 위해 당사자간 직접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삼성전자는 독립된 사회적 기구를 통하여 보상을 진행하라는 조정위의 권고안을 거부한 뒤 독자적으로 발족한 사내 보상위원회를 통해 보상에 대한 기준을 마련할 뿐 아니라 심사, 집행의 전 과정을 수행했다. 사과의 방식은 조정위원회 권고안에 따른 책임인정과 노동건강인권 선언에 바탕한 사과가 아니라 "아픔을 헤어리는데 소홀"했고 "진작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구체적 내용없는 공허한 사과였다.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대책의 세 가지 중 조정권고안에 가장 부합하고 반올림의 요구에 근접한 것이 재해예방대책이다. 조정위 권고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보상위원회를 구성했던 삼성전자는 조정위의 요청으로 추가논의를 했고 그에 따라 2016년 1월 12일에 재해예방대책에 대한 조정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조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건강하고 안전한 사업장 내부 체계의 완성. 둘째 내부 시스템 강화. 셋째, 옴부즈만 위원회 도입. 특히 옴부즈만 위원회의 도입은 삼성전자의 안전보건관리를 독립적 외부 전문가를 통하여 감시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보상, 사과, 재해예방대책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한 2016년 1월은 반도체 피해자들을 위한 싸움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안티클라이맥스였다. 피해를 입힌 당사자에 의해 기준이 정해지고 시행되는 보상체계, 조정권고안에 비해 협소해진 보상대상, 은폐된 보상과정과 보상신청 관련서류에 포함된 '비밀유지각서'까지, 삼성전자가 피해자들과 합의 완료되었다고 공표한 보상은 조정위원회가 권고했던 바 공익법인에 의한 공정하고 투명하며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보상체계와는 차이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삼성의 보상절차는 일방적이고 폐쇄적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설령 배제 없는 충분한 보상이 이뤄졌다 해도 보상의 전 과정을 외부의 공정한 감시 없이 기업에 맡길 수 없음은 자명하다.
요약하자면, 삼성전자가 최근 진행한 보상과 사과는 조정권고안에 따르지 않은 삼성전자의 독단적 방식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나마 진전이 있었던 재해예방대책과 그에 수반된 옴부즈만 위원회는 향후 전개를 지켜보아야 한다. 반도체 피해자 문제의 종결을 알리는 기사의 홍수 속에서 반올림의 '다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9년간 반도체의 피해자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것도, 반도체 작업장의 공정과정과 질병의 연관성을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시킨 것도, 삼성전자가 최소한의 변화된 제스추어를 취하게 했던 것도 반올림 덕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반올림 농성장을 한 점 섬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이며 그 섬을 인간의 존엄을 세울 변화를 추동할 요새로 탈바꿈 시키는 길이다. 노동자를 기계부품으로 취급하는 기업의 성장방정식을 멈추게 하고 노동과 시민과 정부 위에 군림하는 대자본의 힘을 억제하는 길이다.
반올림 농성이 몽니 아닌가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이들, 반올림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도 한번쯤은 강남역 8번 출구를 방문해 보면 어떨까. 3월 한달 동안 강남역 8번 출구에 고 황유미 사망 9주기 문화제와 산재사망노동자 추모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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