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3일 오후 9시50분께 홍익대를 다니던 조중필(당시 22세)씨는 여자친구와 함께 이태원 햄버거집에 왔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좁은 화장실에서 그는 소변기 앞에 섰다.
그러나 곧바로 조씨를 따라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미국인 10대 2명이었다. 둘 중 접이식 칼을 손에 쥔 한 명이 조씨의 뒤에 다가갔다. 그러더니 아무 이유도 없이 칼로 오른 뒷목을 찌르기 시작했다.
피는 화장실벽에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조씨는 돌아서서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가슴팍과 왼쪽 목을 8차례 더 찔렸다. 조씨는 피범벅이 돼 화장실벽에 고개를 기댄 채 쓰러졌다. 10대들은 도망갔고 조씨는 병원 이송 중 눈을 감고 말았다.
10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붙잡혔다. 재미동포 에드워드 리와 미군 군속의 아들 아더 존 패터슨이었다. 그러나 17세 동갑내기 이들 중 누가 조씨를 찔렀는지 밝히는 데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심규홍 부장판사)는 29일 진범으로 기소된 패터슨(37)의 살인 혐의를 인정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혈흔분석 등 새 증거를 통해 패터슨이 리의 부추김에 조씨를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판단했다.
애초 살인범으로 기소된 건 리였다. 사건을 초동수사한 미군 범죄수사대(CID)는 패터슨을 지목했지만 한국 검찰은 '조씨에게 반항흔이 없는 만큼 그를 제압할 정도로 덩치가 큰 사람이 범인'이라며 180㎝·105㎏의 리가 범인이라 판단했다.
당시 국내엔 혈흔분석기법과 같은 과학수사기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패터슨은 진실 반응이, 리는 거짓 반응이 나왔다. 리는 살인 혐의로, 패터슨은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1심과 2심은 두 사람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리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20년을 받았다. 패터슨은 1심 징역 1년6월, 2심 장기 1년6월·단기 1년형에 처해졌다. 정의는 그렇게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1998년 4월 대법원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리를 무죄로 판단하며 상황은 달라졌다. 리는 1999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뒤늦게 패터슨을 재수사하려 했지만 그는 석방된 후 검찰이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은 틈을 타 미국으로 도주했다.
영구미제가 될 뻔했던 사건은 2009년 10월 한국-미국 법무부 공조로 패터슨의 소재가 확인되며 10년 만에 해결 실마리를 찾았다. 패터슨은 20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체포됐고, 그해 12월 한국 검찰은 살인 혐의로 패터슨을 기소했다.
패터슨은 자국에서 인신보호청원을 제기하는 등 송환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2015년 9월23일 양손이 묶인 채 국내로 송환됐다. 1심에서 검찰 구형대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패터슨은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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