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농민이 사라진 중국, 그 미래가 무섭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농민이 사라진 중국, 그 미래가 무섭다

[최성흠의 문화로 읽는 중국 정치] 탈농업 사회와 중국 정치

중국은 근대화가 시작될 무렵까지 농경 사회였다. 그것도 상업농이 아닌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가 주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농사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 생존 활동 그 자체였다. 농사에 실패하면 다음해에는 농노가 되거나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굶어죽는 수밖에 없는 절실한 문제였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봄에 모내기를 조금 이르게 하거나 늦게 하면 쌀의 상태가 나빠지고 수확량도 확연히 줄어든다. 비단 쌀뿐만이 아니라 모든 농작물이 파종이나 수확 시기를 못 맞추면 생산량이 줄거나 열매의 상태도 나빠지게 된다. 살기 위해서는 천지자연의 질서를 반드시 이해하고, 그 변화에 맞추어 생활해야만 한다. 그러니 때를 아는 것 다시 말해 하늘의 움직임을 아는 것은 바로 생존의 지혜였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천륜이며 인륜이었다.

농경 문화에서 비롯된 오래된 정치 문화

한 집안에서 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농사 경험이 가장 많은 아버지 아니겠는가. 아침 일찍, 자는 아들을 깨워 논으로 밭으로 가서 이것저것 시키며 한해 농사를 이끌어 가는 아버지는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만 아니라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별 문제없이 내년을 보낼 수 있는 식량을 수확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나이 때 했던 일과 나의 아들이 내 나이가 되면 할 일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지식은 경험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형제 중에서 한번이라도 농사를 더 지어본 맏형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권위를 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선조들의 효성이 지극한 이유는 그들의 본성이 우리보다 특별히 착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버지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의 농경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었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와 자식이라는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이를 중심으로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되고, 나아가 이미 가족들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망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그 관계망의 총체인 인간 세계가 질서 있게 운행되도록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천지의 조화로운 운행과 합치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향한 효(孝)는 아무런 의심 없이 군왕에 대한 충(忠)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사는데 지장이 없듯이 하늘의 덕을 깨우친 군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 세상은 질서정연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는 이러한 농경 사회의 삶이 체계화된 것이다.

농민은 항상 피동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도 없었으며 참여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농민이 관심을 받게 되는 때는 농민 봉기가 발생했을 때인데, 그때에도 대부분은 주도 세력이 관료이거나 이민족이었다. 서한(西漢)의 유방(劉邦)이나 명(明)의 주원장(朱元璋) 등이 하층민의 농민 봉기가 성공한 예이긴 하지만 그들은 다시 황제가 되었을 뿐 농민의 보호자가 되지는 않았다. 농민들은 다시 효심 가득한 충성스런 백성이 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오쩌둥과 신중국 세운 혁명의 주체, 농민

그러다 새로운 농민의 대변자가 등장했다.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그의 첫 번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호남 농민 운동 조사 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1927년)에서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농민 봉기를 훌륭하기 그지없는 혁명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농민 혁명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마오쩌둥은 끝까지 농민 주도의 혁명을 밀고나가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농민은 인민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노동자, 농민, 민족 자본가, 도시 소자산가 등 네 계급을 인민이라 칭했다. 중국의 국기에 그려져 있는 5개의 별은 왼쪽 위에 그려진 큰 별은 공산당이고 나머지 네 개는 인민을 뜻하는 것이다. 농민은 네 개의 별 중에 두 번째 별로서 사회주의 국가의 어엿한 인민이 되었다.

건국 직후인 1950년, 중국의 농촌인구는 거의 5억 명에 달했고 도시 인구는 6000만 명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이 절대다수의 농민에게 인민이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마오쩌둥은 충성스런 백성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은 절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주도적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헌법 제1조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 계급이 영도하고, 노동자·농민 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 민주 국가이다"라고 되어 있듯이 농민은 다시 하위 계급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불편할 것은 없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효도하듯이 나라님에게 충성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농업 국가에 변화가 찾아왔다. 개혁 개방이 실시된 것이다. 개혁 개방 후 30여 년 만인 2011년에 드디어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보다 많아졌다. 이제 아버지가 했던 일과 내가 하는 일이 달라졌고, 또 내가 하는 일과 아들이 하는 일도 달라지게 됐다. 효의 의미가 달라졌다. 그저 나이가 많다고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렵 또는 유목 사회처럼 경험과 연륜보다는 사냥하거나 가축을 모는 실질적인 능력이 더 중요하게 됐다. 그래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경험과 지혜를 조금이라도 더 전수받기 위해 그들을 받들어 모시던 농경 시대로부터 나날이 변해가는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농민 사라진 중국 정치의 미래

게다가 2014년 한 해에만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른바 농민공(農民工)의 수가 2억7000만 명이 넘는다. 그만큼 관계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상황이 늘어난 것이다. 그들은 낯선 대도시의 외곽에 동향촌(同鄕村)을 이루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했다. 농민공들은 일정액의 관리비를 내고, 동향 조직은 고향 사람들의 안전과 이익을 음성적으로 책임진다. 이러한 거점을 중심으로 농민들은 정기적으로 대도시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중국의 농민이 마치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 같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신유목사회(neo-nomadism)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가치관이 무너지면 효의 의미가 변하고, 효를 근본으로 해서 파생된 사회 관계가 변하면 종국적으로 충의 의미도 변할 것이다. 단순히 군왕이기 때문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를 잘 살게 해주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를 따르고자 할 것이다.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사회를 원할 것이고,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권력자에게 저항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막 변화의 진입로에 들어선 중국에서 당장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의 지도층과 기성세대들은 과거의 문화에서 살았고 교육받았으므로 스스로 변화의 선두에 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농경 문화가 중국의 주류 문화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농사가 중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 활동이 아니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므로 역사적 경험에서 앞으로 벌이질 일의 단초를 찾기도 어렵다. 유목 문화가 중국의 농경 문화에 동화된 적은 있어도 중국이 농경 문화를 버린 적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도 중국의 농경 문화에 동화되어 '마오쩌둥주의'가 되었으니까.

이제부터 중국은 진정한 격동의 시대에 접어들 것이다. 90여 년 전 5.4 운동, 50년 전 문화 대혁명, 20여 년 전 문화열(文化熱) 등의 바람이 불었을 때도 농경 사회라는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이제 구조가 변하고 있다. 중국의 백성들이 진정한 인민이 될지 아니면 시민이 될지 조심스럽게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중국의 권력이 그들을 여전히 백성으로 묶어두고자 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정치적 불안정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최성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국 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대륙연구소, 북방권교류협의회, 한림대학교 학술원 등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다. 중국의 관료 체제에 관한 연구로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중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연구로 건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 권으로 읽는 유교> 등의 번역서와 <중국 인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