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알렉산드르 티모닌 주한 러시아 대사가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 내용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는 우선 최근 북한이 잇따라 제기하고 있는 평화협정 논의 요구에 대해 "평양의 제안에 주목할 만하다"고 밝혔다. 이는 "비핵화의 초점을 흐리고 국제사회의 공조를 이완시키려는 의도"라며 북한의 제안을 일축한 한-미 동맹의 입장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티모닌 대사는 6자회담 재계와 관련해서도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전제조건에 대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5자가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설명해왔다. 여기서 전제조건이란 북한이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의 복귀를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러시아 대사는 "6자회담 재개가 전제조건과 관련돼서는 안 된다"며 조건 없는 회담 재개를 촉구했다. 중국 역시 6자회담 재개나 평화협정 논의와 관련해서 러시아와 비슷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마치 5자 간의 결속이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해왔던 박근혜 정부의 설명이 아전인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미 동맹과 러시아의 입장 차이가 표면화된 결정적 계기는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 제안에 있다. 한-미 동맹은 이를 일축한 반면에 러시아는 주목할 만하다고 밝힌 것이다. 북한이 애초부터 한-미 동맹이 평화협정 논의를 거부할 것을 알고 이를 5자 간의 이간책으로 삼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미 동맹의 경직된 태도가 5자 간의 균열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의도가 "국제사회의 공조를 이완시키려는 데에 있다"는 주장이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기실 한-미 동맹은 이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 가령 '조건 없이 6자회담을 열어 비핵화와 평화협정 등 상호간의 관심사를 함께 논의하자'고 제안했다면, 5자 간의 결속은 오히려 강해졌을 것이다. 강해진 5자 간의 결속은 비핵화에 다시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미 동맹이 북한이 내민 손을 뿌리치면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비핵화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은 바로 평화협정 논의 개시에 있다. 이런 가정을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6자회담이든, 남-북-미-중 4자회담이든 회담이 열렸는데, 북한이 비핵화 논의는 외면하고 평화협정 논의만 고수하면 어떻게 될까?
단언컨대, 5자는 이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북한이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5자 간의 결속 강화로 인해 국제적 고립과 압박에 더욱 직면하게 될 것이다.
2008년 6자회담 결렬 이후 한-미 동맹은 '북한' 없는 대북정책에 매몰되고 말았다. '대화를 위한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며, 대북 제재와 압박, 그리고 군사적 억제에 초점을 맞췄다. 5자 간의 결속을 주장하면서 때로는 성과가 있는 것처럼 부풀리고, 성과가 없으면 중국과 러시아 책임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그 사이 북한의 핵 능력은 고도화되고 말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한-미 동맹의 대북정책은 더욱 경직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과 한반도 정전체제를 이유로 한-미-일 삼각동맹을 비롯한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치우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여기에 속절없이 말려들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황망한 '북한 붕괴론'에 기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북한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실상 두 정부 임기 내에 비핵화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이고 박근혜 정부도 비핵화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MB 정부 때 북한의 핵 능력은 2배 정도 늘어났다. 아직 단정하기 힘들지만 이대로 가면 박근혜 정부 임기 내에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정치인의 업적은 의도나 말이 아니라 결과가 말해준다. 비핵화를 최대 공약으로 내세웠던 두 정부를 보면서 ‘보이스 피싱’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