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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왜 걷는가

[함께 사는 길] 인간의 걷기는 '행동한다·실천한다'

걷기 위해서는 인체의 700여 개의 근육과 206개의 관절 모두가 다 필요하다. 그래서 걷기는 가장 완벽하고 본원적인 움직임이다. 특히, 인류의 조상들이 숲에서 초원으로 걸어 나오던 시절부터 생각한다면, '본원적'이라는 말은 수사가 개입할 여지 없는 단순하고 극명한 '사실'이다.

진화의 걷기

98퍼센트(%)의 유전적 일치를 보이는 인간과 침팬지는 둘 다 직립보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직립보행할 때 침팬지는 뒤뚱거리고 비틀거린다.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들의 대퇴부는 무릎으로, 다시 발바닥으로 수직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대퇴부는 똑바로 서면 무릎이 자연스럽게 닿을 정도로 몸의 중심선에 무릎이 모여 있고 그 무릎에서 발까지는 수직으로 연결된다. 즉 대퇴부가 무릎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덕분에 배꼽 아래의 인체 중심을 인간의 다리는 수직으로 지탱할 수 있지만, 영장류들은 좌우로 벌어진 두 발과 골반 부의 무게중심이 삼각형을 이룬다. 위 꼭지점 위치에 존재하는 무게중심을 받치며 걸어야 하니, 당연히 좌우로 앞뒤로 뒤뚱거릴밖에.

기울어진 대퇴골로 이뤄낸 직립보행은 인간 진화의 핵심적 추동력을 만들었다. 20세기 초까지 인간 진화의 시작은 큰 뇌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론이었으나, 발굴된 화석들의 연대 측정 결과, '뇌보다 발이 먼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직립보행이야말로 인류를 만든 첫 번째 능력이었다. 인간이 숲에서 산다면 발로도 나뭇가지를 잡을 수 있는 존재로 사는 게 나았을 것이다. 걷는 행위는 걷는 장소를 전제로 한다. 평지, 숲에서 나와 사바나로 걸어 들어가는 최초의 인간은 왜 사바나로 가야 했을까? 500만 년 전 인류가 원숭이에서 분리되기 시작했을 당시 지구의 기후는 건조대가 넓어져 숲이 축소되고 있었다. 더 이상 풍족하고 안전한 숲의 생활이 가능하지 않자 인류는 먹이를 찾아 더 넓은 곳으로 나가야 했다. 걷기란, 생존을 위한 기술이었던 것이다.

사실 네 발로 뛰는 것이 두 발로 뛰는 것보다 에너지 효율적이며 해부학적으로 보아서도 더 빠르다. 직립보행은 고속행동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의 이동에 적합하다. 그런 걸음은 고속행동이 가능한 네 발로 뛰는 맹수들의 사냥감이 되기 좋은 속도다. 인류는 위험을 피해 수직으로 달아날 나무가 없는 평지에서 무엇으로 도리어 맹수를 사냥하는 존재로, 진화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을까? 무리! 사바나로 걸어나온 인류는 혼자가 아니라 최소한 20~30명에 이르는 직립보행인들의 연대체였던 것이다. 네발로 날뛰는 맹수를 포위한 두발 직립인들의 손에 들린 돌과 나무창은 인류의 걷기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초(<인류 진화의 역사>(로빈 매키 지음, 이충호 옮김, 다림 펴냄))일 것이다.

인간의 걷기란, 인간다움에 관한 육체적 비밀의 열쇠이며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기술에 대한 비밀의 열쇠이다. 직립하여 더 멀리 내다보는 시야와 협동하여 생존의 길을 모색한 존재, 인간이다. 우뚝 선 개별자들의 연대, 그것이 인류의 걷기에 담긴 가장 오래된 비밀의 정체다.

최신 건강법?

걷기 열풍이 분다. 건강을 위해 걸으라는 걷기 전도사들의 각양각색 전언이 흘러넘친다. 온갖 매체들이 걷기가 건강에 얼마나 필수적이고 유용한지 의학적 증거들을 대며 보도하고, 설득한다. 그 설득의 심리학은 매우 단순하다. 걸으면 건강해진다. 건강해야 삶을 즐기며 장수할 수 있다. 대개 그런 전언들의 말미에는 좋은 운동화와 좋은 먹을거리를 소개하는 상자글이 붙어 있다. 한때 불었던 웰빙(well-being) 열풍의 복사판이다.

그렇게 사시를 하고 볼 건 없다고? 오해 말라. 걷기 자체를 경시하거나 그 건강효과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건강은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건강만을 강조하는 걷기는 기쁜 일이 없어도 웃으면 건강해지니 웃으라는 의학적 충고에서 느끼는 허망함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얘기다.

'기분이 꼭 좋지 않아도, 부러 웃는 표정만 지어도 뇌가 기쁨과 행복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래서 실제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내장 혈관과 모세혈관이 확장되고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몸의 말단까지 영양분이 공급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이런 웃음 사용법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뇌에 사기 치기!'다.

이런 얘기도 있다. '가슴 떨리는 설렘은 비단 사랑에 빠졌을 때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뇌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과 걷기의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의 뇌 반응은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걷기의 유용성에 대한 뇌 의학자의 옹호론이지만, 달리 보면 사랑조차 대체 가능한 것이며, 걷기를 뇌를 자극해 사랑의 감정을 자의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랑은 무엇보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다. 걷기를 통해 느끼는 뇌 자극은 자기애로 귀결된다. 그곳에 타자를 향해 열리는 연대의 싹이 자랄 가능성은 타자들 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연대보다 작을 수밖에 없다. 걷기와 사랑은 다르다. 그것은 '뇌 반응의 유사성과는 무관한 진실'이다.

정신과 연계되지 않는 육체의 자극만으로도 정신을 건강하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여기는 일이다. 운동을 불행한 정신의 좌약으로 여기는 이런 태도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걷기는 결코 정신과 육체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나의 유익과 쾌락만을 위한 걷기는 말초적인 중독만 남을 뿐이다.

▲ 2003년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한 삼보일배. ⓒ함께사는길(이성수)

다른 걷기

욕망의 충족을 위한 걷기와는 다른 걷기를 한 사람들도 많다. 멀리 그리스의 산책하는 철학자들 무리(소요학파)로부터 스스로를 산책 철학자로 자인한 루소나 시계보다 정확한 산책가 칸트,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 침묵하라던 묵언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면면부절(綿綿不絕)이다. 이들과도 다른 걷기도 있다.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 영혼의 스승들이 가르치신 걷기다.

인신의 가능성을 궁구한 부처께서는 출가 이후 좌선 수행도 많이 했지만, 그의 삶은 제자들과 함께 탁발하는 여정이었다. 열반한 뒤 관 밖으로 그가 내밀어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탁발의 검은 발바닥이었다. 예수께서도 목수 일을 그만두시고 나선 공생애(公生涯) 내내 늘 여로(旅路)에 있었다. 부활 이전 그의 최후 또한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걷는 것이었고, 그의 죽음은 두 발에 못이 박히는 순간 이루어졌으며, 부활 또한 그 못이 뽑혔을 때였다.

그리고 또 다른 걷기도 있다. 1930년 3월 12일. 마하트마 간디는 사바르마띠아쉬람에서 단디 해변에 이르는 387킬로미터(㎞)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식민 치하 인도에 부과한 소금세를 거부한 그 행렬은 애초 78명으로 시작해 400여㎞의 여정을 통해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이 거쳐 온 여로에서는 그 몇백 배의 민중들이 인도의 독립이 왜 필요하며, 영국의 식민지배가 왜 부당한지에 대해 각성하는 역사가 벌어졌다.

우리에게도 그런 행진의 경험은 많다. 2003년 새만금 갯벌 간척반대운동이 개발동맹의 역풍에 휘말려 난관에 봉착했을 때였다.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김경일 교무, 이희운 목사를 비롯한 삼보일배단이 전북 부안 해창갯벌에서부터 청와대 앞까지 세 걸음을 걷고 한 번 절하며 65일, 309㎞를 걸었다. 삼보일배단은 '자연은, 생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그들은 또 우리에게 '걷는다는 건 이런 것'이라는 메시지도 전했다.

사람들의 세상에서 자연으로 걸어간 행렬도 있다.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지자체와 중앙 정부의 계획이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조현철 신부, 박성율 목사, 박그림 설악산 산양 지킴이 등이 지난 8월 10일 설악산 오색탐방로 입구에서 시작해 '설악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오체투지'를 하면서 대청봉까지 걸어 올랐다. 아니 절하며 산에 몸을 던졌다. 자연의 신성을 지키려는 걸음이었다. 환경부와 국립공원위원회처럼 '자연을 지키고, 산을 지키라'고 만들어진 국가기구들이 되려 산을 죽이는 자들일 때, 시민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보여준 걸음이었다.

새로운 걷기를 위하여

'인간은 자연환경에 친연성을 느끼고 선호하는 성향을 가진 채 태어난다(biophilia hypothesis)'고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은 주장했다. 인간의 자연친화성은 학문적 입증이 불필요한 수준의 명백한 진실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가 건설한 사회환경은 철저하게 반자연적이어서 진실을 사회적 사실로 바꾸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 걷기는 단지 건강을 위한 좌약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사람과 자연을 향해 가는 행동이어야 옳다. 180센티미터(㎝)의 러닝머신 위의 걷기는 운동법이지 걷는 법은 아니다. 진화의 걷기가 품은 연대의 씨앗을 품고, 나를 성찰하며, 결국 나를 둘러싼 사람과 자연을 향해 가는 걷기라야 나와 세계를 함께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걷기는 운동법 이상이다. 걷기란 가장 적극적인 생각, 의지의 표현법이고 필연적으로 연대에 이른다. 표현이 공감을 불러오고 공감한 자들이 행렬에 참여한다. 사람과 연대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사람과 자연을 지키는 삶을 향해 걷는다. 걷기는 '행동한다, 실천한다'로도 번역된다. 그것이 인간의 걷기다.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바로 가기 : <함께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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