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첫 국정 역사 교과서가 베일을 벗었다. '역사는 한 가지로 배워야 한다'던 교육부와 여당의 큰소리가 민망하게도, 이번에 공개된 국정 교과서는 '오류투성이'였다. 역사학자들은 교과서를 회수하거나 수정본을 만들어 각 학교에 뿌려야 할 지경이라며 한탄했다.
이번에 발행된 국정 역사 교과서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로, 당장 이번 학기부터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 보급돼 쓰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역사문제연구소 등 7개 단체로 구성된 역사교육연대회의는 2주 전 해당 교과서를 입수한 이후 상당수의 오류 발견, 7일 서울 종로구 흥사단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분석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자들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2013년 교학사 교과서가 심각한 사실 오류‧왜곡으로 뭇매를 맞은 데 이어, 지난해 12월 공개된 6학년 국정 <사회> 교과서 실험본도 숱한 오류로 지적받았다. 그럼에도 이번 교과서에서 과거와 비슷한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 역사교육연대회의는 "페이지마다 두 개가 넘는 사실관계의 오류는 그 자체로 충격"이라고 밝혔다.
신하 의복 입고 있는 태조 왕건?
이들은 우선 부정확한 역사 이해에서 비롯된 오류들을 다수 소개했다.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관리 등용 제도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이다.
"나라(신라)에서는 국학에서 공부한 학생들 중에서 시험을 치러 관리를 뽑으려고 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89쪽)
하일식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어떤 근거로 새로운 사실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도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고려에도 고위 관리의 자손에게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직을 주는 음서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공정한 시험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하여 광종 때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관리를 뽑게 되면서 고려에서는 가문이 좋지 않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89쪽)
이 위원은 "음서제가 생긴 다음 과거제가 실시된 것처럼 서술했으나 반대"라며, 또 "마치 고려 시대 때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과거제보다 음서제를 통한 관리 등용 사례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정도전에 대한 기술도 지적했다.
"정도전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누명을 벗게 되었고, 그의 저술을 모은 <삼봉집>도 간행될 수 있었다"(129쪽)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이미 태종 16년 정도전의 자손들이 금고에서 해제됐고, <삼봉집>은 태조 6년, 세조 11년, 성종 17년에 간행된 바 있으며, 정조 15년에 이를 증보하여 간행했다"며 "정도전이 조선 역사에서 차지하는 영향과 역할을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는 서술"이라고 꼬집었다.
"일본인이나 여진족이 조선에 올 때는 일반 백성의 집에 머물러 잠을 자지 못한다. 만일 마을이나 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거나 제멋대로 노는 자가 있으면 곤장 80에 처한다"(141쪽)
이는 교과서에 <경국대전> 번역문으로 소개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과는 달리 원문에서는 국가가 외국인을 직접 처벌한 게 아니라 조선인 관리인을 처벌하는 것으로 돼 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마치 조선이 외국인을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사료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그 외에도 <경국대전>이 1485년 반포가 아닌 '완성'으로 표기된 점, 고려 태조 왕건 삽화 속 인물이 왕건이 아니며, 심지어 의복은 왕이 아닌 신하들의 차림새라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위만 조선과 삼한 시대에 대한 설명은 통째로 빠져있다. 위만 조선의 경우,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을 위만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자를 붙였다'는, 고조선의 명칭에 대한 설명 속에서만 잠깐 언급될 뿐이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어디에도 위만 조선에 대한 설명이 없어 학생들이 위만 조선이 무엇일까 의문을 갖게 될 것이고, 선생님들도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고 했다.
"책 새로 찍어야 할 정도…교육부, 국정화 계획 접어야"
교육부는 2012년 '국민의 기초 소양과 기본 교육의 일정한 질을 확보하기 위한 국정체제 구축', '우수한 내·외형을 갖춘 국정도서 개발'을 목표로 교과서 발행 작업에 착수했다. 그 후 2년에 거쳐 9명의 연구진과 10명의 집필진, 21명의 심의진의 협업 속에서 탄생한 게 바로 이 교과서다. 그러나 결과물은 기본적인 문법조차 지키지 못한 오류투성이였다.
이들은 이번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 발행 시스템의 허점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며, 정부의 국정화 작업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방지원 신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교육부는 검정 교과서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들였고, 참여한 사람도 훨씬 많고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알 만한 분들의 역량을 결집시켰다"며 "그러나 (국정은) 좋은 교과서 만드는 제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저작권 가진 교과서라면, 결과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못된 걸 고쳐야 한다"며 "중고등학교까지 교과서 발행 제도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접는 게 마땅하다는 게 이번으로 확실하게 증명됐다"고 밝혔다.
이 위원도 "교육부도 책임지지 않고 집필자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 피해는 학생들에게 돌아간다"고 강조했다.
하 교수는 "책을 새로 찍어야 할 정도라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교사들도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다는 걱정이 든다"며 "소책자에 달하는 수정된 내용을 만들어서 교육부에서는 빠른 시간 내 배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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