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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운동권 xx들, 변한 것 없네"를 넘어서

[기고] 운동사회 성폭력, 그 식상함과 새로움의 사이에서

지난 달, 한 진보논객으로부터 데이트 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여성의 글이 공개되면서, 봇물 터지듯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들의 'speak out(공개적으로 말하기)'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소속과 직업은 다양했지만, 그 도화선이 된 사건들은 소위 '진보'라 부르는 운동사회 구성원들이었다는 점에서, 운동사회 성폭력에 대해 지금, 다시 점검해볼 때가 된 듯하다.

운동'권' 성폭력?


처음 데이트 폭력 사건들이 폭로되기 시작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운동권 xxx들, 변한 것 하나 없네'라며, 그 식상함에 치를 떨었고, 말과 말들은 '운동권'에 대한 비난과 함께 십 여 년 전의 '그 사건'을 기억하게 했다. 운동사회는 그 내부의 특수한 문화들로 인해, 사회 속의 또 다른 사회로 존재한다. 그간 운동사회에서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있었지만 조직 보위 등을 문제삼아 사건들은 가려지기 일쑤였고, 15년여 전, 이를 문제 삼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운동사회내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백인위)'를 만들었다. 이들은 본인의 신상을 밝히지 않고 '게릴라'적 방식으로 운동사회 내 성폭력들을 접수받았고, 폭로했다. 이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파장은 대단했는데, 평등과 차별을 부르짖는 운동사회에 얼마나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인식들이 팽배해있는지를 점검하는 계기였다.


그리고 지금, 무엇이 변화하고 무엇이 변화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운동권 남성'과 '운동권 문화'에 회의를 느끼며 선을 그었고, 누군가는 제2의 백인위원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해봐야 하는 것은 '누가 운동권인가'이다. 사실 '운동권'이라는 말은 내부에서 본인들을 지칭했다기보다 외부적으로 주어진 말이다.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세력들을 '특별한' 것으로 규정하고, 소위 '선량한 일반인'과 구별짓고자 하는 시도로 사용된 것으로써 썩 지향할 만한 표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운동권에 해당되는지를 규정하기 힘들다. 집회에 몇 번 나가면 운동권인가? 그렇기에 애초에 '운동권 성폭력'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적일 뿐 아니라, 개인을 전체화함으로써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운동권 여성'이 비운동권 여성과 특별히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여전히 조직 내에서 '여성적' 역할을 담당하고, 직장인 남편을 돌보듯이 데모하는 남편을 돌볼 뿐이다. 그러나 '운동권 남성'은 무언가 비운동권 남성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정의로울 것이라는 기대는 오히려 '운동권 남성'의 영웅주의와 선민의식을 복돋울 뿐이다. 그들은 일반 한국사회 남성들과 똑같은 문화를 경험하고, 또 어쩌면 더 폐쇄적인 '운동 사회'에서 조직적이고 군사적으로 행동하는 '남성'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무언가 기대할 시간이 있다면, 오히려 붙잡고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 한 자라도 더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해 경험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과거의 운동사회 성폭력 사건들에서 피해자는 드러나지 않고 가해자만을 공개하는 경향이 존재했는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라 불리우는 원칙 때문이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가해자, 강자의 시선에서 파악될 수 없는 피해자, 약자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으로 '약자의 시선이 더 객관적'이라는 산드라 하딩(1993)의 인식론을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면서 지나치게 피해자의 의견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공동체 내 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반성폭력 운동은 개인적인 요구사항의 처리 과정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우려되는 것은 이것이 지나친 피해자 보호 담론에 입각하면서 피해자의 고통을 지나치게 단일하게 강조하고, 오히려 주체적인 사건 해결자로서 피해자의 위치를 사장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현재 강조되고 있는 성폭력 트라우마 담론은 반성폭력운동이 제기했던 정치성을 탈각하고, 개인의 고통과 치유의 문제로 병리화하면서 피해자를 '환자'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이때 피해자들은 성폭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운동가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으로서 타자화된다. 그렇기에 피해자를 무조건 '보호'하거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의 경험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반성폭력 운동을 비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경험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에 대해 분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재정의하자는 것이다. 즉, 성폭력 피해자의 주체성은 동일한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아니라 특정한 경험과 맥락을 통해 구성된 어떤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의 피해 '경험'은 법정에서 하나의 자료로서, 사건해결 과정의 '증거'로서가 아니라 어떤 증거가 어떻게, 채택되고 전유되면서 또 다른 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최근 한국성폭력상담소(2015)의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에게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는 것은 가해 유형의 정도가 아니라 피해 이후 주변인들의 지지와 비난의 정도에 따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주변인들의 도움과 태도, 인식에 따라 치유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피해의 경험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사회와 공동체는 피해자가 기존의 '순결한 피해자 통념'에 맞춰 자신을 재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자신의 복잡한 경험을 검열하게 만드는 제약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경험을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있다.


성폭력은 유교적 보호주의와 자유주의적 성담론, 운동사회의 가부장성과 반성폭력 운동의 급진성 등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의미 투쟁의 '장'이다. 어떠한 경험과 정체성도, 심지어 '피해'라 할지라도 고정된 의미가 아니며, 그것은 획득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과정 중에 존재함으로써, 그 위치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향후 성폭력 담론은 고정된 이미지로서 '고통스러운'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를 넘어 다양한 주체와 정체성들이 만들어지는 내부적, 외부적 특수한 맥락과 과정에 대해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해 다중적 주체로서, 기존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반성폭력 운동의 전략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성폭력 담론에서 재현되는 피해자 경험의 작동에 대해 분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경험은 언제나 이미 하나의 해석인 동시에 해석의 필요가 있는 어떤 것'(Scott, 1992)이기 때문에, 피해 경험에 덧씌여진 지배담론을 균열할 수 있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피해자의 경험들이 언어화되어야 할 것이다.

제2의 백인위를 넘어서


최근의 데이트 폭력 사건이 폭로되면서 그 중 몇 명은 공교롭게도 한 진보정당 소속의 사람들이었고 당 차원에서 특별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본 사건들 이후 운동사회 성폭력을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들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과거 백인위나 대학내 반성폭력운동에서 공개사과나 실명공개 등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과도기적 운동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성폭력이 가해자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 문화의 문제이며, 이를 통해 구성원들이 경각심을 갖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안된 것이다. 또한 가해자 실명공개는 '약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이후 2차 가해나 역고소, 명예훼손 등의 문제가 발생되면서 성폭력 사건 해결은 피해자 보호주의, 비밀주의의 원칙을 갖게 되었다. 이는 피해자가 불필요한 논란과 2차적 피해에 놓이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필요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피해자의 보호를 강조하면서 공동체 내의 담론을 구성하거나 변화를 만들어나가기는 힘들었다.


백인위는 그것의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이 팽배한 공동체 문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만 했던 선택이었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남겼다. 내부적으로 피해 여성들을 여성보호의 맥락으로 진행한 점, 이들의 활동방식이 운동사회로부터 성폭력을 더 이해받지 못하고 폭력적, 위협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여 성폭력에 대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 점(황정미, 2001), 내부/외부적 소통과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고,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는 '해결'의 문제로 관행화된 점(엄혜진, 2009) 등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즉, 성폭력을 토론하고 의제로 삼을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단호한 처벌과 피해자 보호의 이중 구조만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사회 내에서 성폭력 문제는 건드리거나 개입하면 '큰일' 나는 '무엇'으로 음지화되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른바 '영페미 운동'이나 대학내, 운동사회내 반성폭력 운동이 다소 주춤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공동체/운동사회 내 많은 사건들에서 2차 가해 신고가 많아졌다는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차례의 반성폭력운동이 훑고 지나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비밀주의, 피해자의 고통 강조, 기계적으로 처리되는 사건 해결 관행들이었고, 행간의 논쟁들이나 소통, 정치적 의미들이 사라지면서 피해자의 '불편함'이 모두 가해로 설명되고 '처리'되어 버리는 일들이 잦아진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주체성, 정체성, 이미지가 고정된 모습으로 획일화되면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고통'스러운 피해자라는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성폭력처럼 복잡한 의미 투쟁의 장이 논의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사건을 폭로한 피해자들이 본인의 실명을 공개하면서까지 사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인고의 시간과 용기에 대해 진심으로 지지를 보낸다. 또한 사건들을 묵인하지 않고, 함께 지지하고자 하는 개인과 단체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은 사실 더 섬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무조건 공격하거나, 무조건 보호하거나, 특정한 일부를 적으로 전체화하면서 경계를 규정짓고자 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하여 과거의 폭로 차원의 운동을 넘어서 소통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의 운동들이 생산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백러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는 피해자의 폭로에 복수의 칼을 갈지도 모르겠다. 운동사회 성폭력은 운동사회만의 문제가 아니고, 남성과 여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운동사회 내에서 급진적인 반성폭력운동의 언어들이 공유되고 실천되어 왔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경계를 구분하고 너와 나를 단정짓는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 탈경계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희망 역시,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운동사회 성폭력, 그 식상함은 그렇기에 언제나 새롭다. 처단과 복수가 아닌 각성과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간들을 기다려 본다.

<참고문헌>
엄혜진(2009), "운동사회 성폭력 의제화의 의의와 쟁점 : '100인위' 운동의 수용과 현재적 착종", 한국여성연구소, <페미니즘 연구>, 제9집 1호.
한국성폭력상담소(2015),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 성폭력 통념 비판과 피해 의미의 재구성", 연구포럼 자료집.
황정미(2001), "성폭력의 정치에서 젠더 정치로", 한국산업사회학회, <경제와 사회>, 제49호.

Harding, Sandra(1993), "Rethinking Standpoint Epistemology: What Is Strong Objectivity?", Linda Alcoff and Elizabeth Potter (eds.), Feminist Epistemology, New York: Routledge. pp.49-82.
Joan Scott(1992), "Experience", in Judith Butler and Joan W. Scott eds. Feminism Theorize The Political,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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