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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탈핵 교재가 나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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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한민국 최초 탈핵 교재가 나오기까지…

[작은것이 아름답다] 탈핵을 가르치다

'탈핵'을 교실에서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고민이 없는 무채색 교실에서 핵은 딴 세상 언어이다. 하지만 올해 첫 학기부터 전북 지역 학교들에서 '탈핵'을 앞세운 교재로 공부하게 된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핵 없는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탈핵'을 말하지 않는 건 수상하다

그는 아무 문제 없는 듯 입 닫아버린 학교가 불편했다. 진실은 서둘러 감추고 실체를 가리는 데 익숙한 태도가 괴로웠다. 전북 군산영광여고 교사 김영진(51) 씨는 학교가 '탈핵'이라는 말은 물론이고 '핵'이라는 단어도 불편하게 여기는 탓에 핵발전소가 이렇게 밤낮없이 돌아가는 것일까 싶었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는 것을 다들 선명하게 봤는데, 죽음의 기운이 일본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걸 봤는데, 그걸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온갖 비리와 고장 탓에 위태위태한 핵발전소를 곁에 두고 있는 이 나라에서 '핵'이 두렵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에요. '탈핵'을 말하지 않는 건 더 수상한 일입니다. 탈핵을 말하지 않는 사회, 탈핵에 침묵하는 교육, 탈핵에 눈감아 버리는 운동은 '사기'예요. 생명과 관련한 절박한 일인데 고개를 돌려버리는 건 자기를 부정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살아갈 생물학적 토대가 망가지는 문제잖아요."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 '탈핵'을 입에 올리는 건 불온한 일이다. 핵이 위험하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다들 주춤주춤한다. 김 씨는 그래서 더더욱 교사와 아이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눈을 뜨게 만드는 '탈핵 교과서'가 교육현장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료 교사들과 상의하고 환경단체들과 생각을 모았다. 교육부나 교육청이나 지역사회가 알아서 나서지 않을 것이기에 마음을 모아 함께하자 제안했다.

▲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미래를 물려주려는 것일까. 만약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디스토피아는 온전히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현실이다. 불편한 교육을 해야 한다. 아이들과 솔직한 현실을 같이 얘기하는 게 제대로 된 교육이다. ⓒ작은것이아름답다(김기돈)

2013년 가을 즈음에 지역에서 탈핵을 고민해온 지역 환경단체들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함께하는 '탈핵전북연대'가 학교 현장에 탈핵 교과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전북교육청에 정식으로 건의했다. 다행히 평소 탈핵에 관심이 많은 김승환 교육감이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회의를 해보자고는 답을 주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지방의회가 예산을 삭감해 4000만 원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이 예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크지 않더라고요. 예산에 맞춰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집필진을 꾸리고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에너지정의행동 이헌석 대표가 전문가로 함께했고, 교육청이 추천한 교사들과 제가 추천한 교사들이 참여했어요."

집필진 회의를 처음 하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탈핵'에 대해 이해하는 수준이나 절실함 정도가 서로 크게 달랐던 것이다. 작업을 진행하기 전 공부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모임을 반복하면서 모두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하며 소중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집필진들이 군산, 부안, 서울 지역에 흩어져 있다 보니 한 번 만나기도 힘들었다. 날짜를 정해놓고 오후에 수업을 끝내고 달려온 집필진들이 만나서 4시간 정도 작업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이 대표 말고는 전공한 사람도 없고 내용을 이해하는 수준이 다 다르다 보니 분량에 맞춰 이해해서 글 쓰는 것도 내용을 수정하고 정리하는 것도 어려웠다. 교사 세 명은 과학 교사이고, 두 명은 국어과 교사여서 표현 방식을 맞추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달에 두세 차례 일요일 아침에 만나 밤까지 꼬박 시간을 들일 수 있게 마음을 모아주셔서 고맙게 생각해요. 처음에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암담했지만, 나중에는 되레 더 이분들이 크게 공감하고, '의미 있는 일에 함께하기 참 잘했다' 할 정도로 의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1년 동안 함께 주말을 통으로 반납하고 공부해가면서 집필을 하고 전문가 의견을 듣고, 통계와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오류를 잡아내 고치기를 반복하면서 주제를 하나씩 완성해갔다.

▲ 학교 현장에서 '탈핵'을 입에 올리는 건 불온한 일이다. 핵이 위험하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드러내놓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다들 주춤주춤 한다. 그래서 더더욱 교사와 아이들에게 지침이 되는 '탈핵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영진

'탈핵'이란 단어를 지켜라

2015년 2월 초 대한민국 학교 최초 교육용 탈핵 교재 <탈핵으로 그려보는 에너지의 미래>(전라북도교육청 펴냄)가 발간됐다. 아쉬운 것은 정식 교과서로 교육과정에 넣지 못한 것. 교육부나 학교 현장에서 교과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탈핵 교과서'가 아닌 '탈핵 교재'라는 명찰을 달게 된 이유다.

처음에는 '초등용'과 '중등용'으로 나눠 발간하려 했는데, 예산 문제 탓에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수준을 맞추고 고등학생까지 읽을 수 있게 하자 의견을 모았다. 예산도 없고 집필진 여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학생용으로 정하고 '∼습니다'체로 바꿨다.

"안타깝게도 실제 전북 초중고에 2부씩밖에 안 갔어요. 탈핵에 별로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자료가 없어 수업을 하지 못하는 교사들도 많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수업에 녹여내게 하자고 생각을 모았지요."

처음에는 학교마다 2부 정도밖에 갈 수 없는 예산이란 것을 알고 포기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교육 현장 공식 단위 이름으로 물꼬를 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년에 학교마다 한 학년 정도 학생들이 한 권씩 받을 수 있도록 예산을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일 계획이다.

집필진에 함께 했던 군산영광중학교 교사 정은균(46) 씨는 생존의 근간을 뒤흔들 핵발전소 문제를 학교 현장에서 전면에 내세운 교재가 인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성과라고 생각한다. 핵발전소를 둘러싼 핵심 쟁점이나 주요 사안들을 학생들 눈높이와 흥미도에 맞춰 간명하게 서술한 책이 그래서 소중하다.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칸트의 말처럼 제도권에서 최소한의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교재가 아이들이 꾸려갈 미래를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바꾸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교사들이 책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하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3월 중순에 교사 연수를 진행할 계획이다. 안전이나 평화는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관심 가져야 할 가장 기초 사안인데도, 핵 문제를 교육하는 걸 조심스러워 하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연수 받은 교사들이 많아지고 이해도가 깊어지면 탈핵 교육에 대한 당위성도 높아지고 이 탈핵 교재가 그 교사들의 방패막이 구실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교육청 실무 단위와 책 제목을 정하는 시점에서 '탈핵'이란 단어를 빼자는 말이 나왔다.

"'탈핵'이라는 단어가 안 들어가면 이 책은 의미 없다,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만약 이 단어를 뺀다면 이 작업은 의미를 잃는다고 말했어요. 교육감께서 이 생각에 동의해 주셔서 이 교재가 '탈핵'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수 있었지요."

가장 소중한 성과이다. '원전, 원자력'이란 단어를 모두 '핵발전소'로 바꿨고, 머리말과 꼬리말에 집필진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넣었다. 교재 PDF도 곧 공개될 것이다. 다른 교육청들이 이 교재를 가져다 쓰도록 추동할 것이다.

현실에 물음표를 찍는 교육이 절실하다

▲ 우리나라 최초 탈핵 교재가 <탈핵으로 그려보는 에너지의 미래>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작은것이아름답다(김기돈)
그는 교육 현장에서 '현실'이 사라져버렸음을 지적한다.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 교육인데, 삶이 거세된 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후쿠시마 사고가 난 뒤에도 이 사고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아요. 적어도 핵이 무엇인지, 핵발전소가 무엇인지 아이들과 이야기해봐야 하잖아요. 이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만들어지는 디스토피아는 온전히 아이들의 몫인데 침묵하는 거예요. 불편한 교육을 해야 하는 거죠. 아이들과 이 달라진 현실, 그리고 문제가 많은 현실에 대해 같이 얘기하고 공부하는 게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미래를 물려주려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너희 꿈과 공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미래가 안전하고 평화롭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닫고, 힘을 모아야 한다'라고 말해 주죠. 아이들은 다 이해해요."
실제로 집 옆에 쓰레기장이 들어온다고 해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어떤 영향이 있고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따져보고 고민하게 마련이다. 2005년 군산 핵폐기장 유치로 시끄러울 때 핵폐기장이 온다는 데 그 폐기물이 도대체 무엇인지, 지역과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거리에 만국기처럼 찬성 플래카드가 내걸렸어요. 그때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거의 90%에 육박하는 찬성률을 보고 교육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12년 정도 공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 대해 물음표를 찍어야 하지 않나요?"

교사들의 용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 용기를 내서 현실을 말하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강한 시민을 길러 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수업시간에 핵 문제나 우리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면 불순하게 여긴다. 정부나 공기업이 하는 일을 비판하면 그게 진실이든, 의미 있는 일이든 해서는 안 되는, 불온한 일이 되어버린다.

"이 불온성을 희석시킬 수 있는 교육 자료가 교사들에게 주어진다면 교사들이 현실을 이야기할 때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현재 우리 사회 문제점과 실체를 들여다보고 본질을 읽어내는 것이 지성이며 교육입니다. 현실을 읽어내는 눈을 갖지 못한 지성은 거짓이라고 생각해요."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탈핵'에 입을 닫고 있는 숨 막히는 현실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 탈핵 교재에 실린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핵발전의 대안은 '탈핵'입니다. 시한폭탄이 달린 안락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당장 그 의자에서 벗어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대안을 묻는다면? 그러면 누구나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대안은 그 의자에 앉지 않는 것이라고."

* 월간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19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 생태환경문화 월간지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한 이야기와 정보를 전합니다. 생태 감성을 깨우는 녹색생활문화운동과 지구의 원시림을 지키는 재생종이운동을 일굽니다. 달마다 '작아의 날'을 정해 즐거운 변화를 만드는 환경운동을 펼칩니다. 자연의 흐름을 담은 우리말 달이름과 우리말을 살려 쓰려 노력합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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