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1960년대 문학예술 속의 추한 미국
1. 1960년대 한국 정치와 미국 (1)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50년대 말부터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1958년 1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시 위반이라 하여, 1948년부터 이승만 정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뒤 국회부의장을 맡기도 하고 1952년과 1956년 대통령선거에 나서기도 했던 조봉암 대표를 비롯한 당 간부들을 검거하고 1958년 6월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1958년 8월 자유당은 야당과 언론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비해 이적행위의 개념과 적용 대상을 확대하면서 몇 가지 처벌 규정을 추가한 것이었다. 야당은 이 개정안이 "공산 분자를 더 잡을 수 있는 이점(利點)보다는 언론 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의 공사 생활을 위협할 해점(害點)이 심대하다"며 법조계 및 언론계와 함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여당은 "반공 투쟁의 태세를 가일층 강화하여 일체의 용공 회색적 정치 세력을 타도한다"며 야당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반대에 반공이란 명목으로 위협을 가했다.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회 법사위에서 야당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데 이어, 본회의에서는 무장 경찰관들이 국회의사당을 에워싼 가운데 경위권을 행사하여 농성 중인 80여 명의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안까지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1959년 4월 당시 일간지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하며 이승만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국가 안보'를 구실로 폐간시켰다. 1959년 7월엔 조봉암이 결국 사형에 처해졌고,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며 평화통일을 지향하던 진보당은 해산되었다. 참고로, 당시 '사법 살인'이라고 국내외에서 비판받았던 조봉암 처형 및 진보당 해산과 관련하여, 대법원은 50여 년이 흐른 2011년 1월 무죄를 선고했다.
1960년 3월 15일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 온갖 폭력과 위협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진 정·부통령 선거는 4월 혁명을 불러왔다. 학생들이 주도한 혁명이었지만, 미국 국무부 비밀 외교문서가 드러내듯, 미국 정부가 이승만 하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인들의 피와 돈이 투자된 남한에 안정적인 친미 반공 정부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주한미국대사관은 독자적인 정보활동을 통해 늦어도 1960년 2월 말부터 자유당의 부정선거 운동을 파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 운동과 관련해 최초로 데모를 일으킨 다음 날부터 미국대사관 직원들은 일주일간 남부지방을 정찰한 후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투표 이전에 선거 결과를 결정짓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투표일을 사흘 앞둔 3월 12일에는 9명의 대사관 관리들이 5명의 유엔 한국통일 부흥위원회 (UNCURK) 참관인들과 각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관찰하기도 했다. 투표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 데모가 일어남에 따라 그날 밤 한국 군부는 주한 유엔군사령부에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하며 데모 진압을 위한 한국 병력의 투입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자 유엔군사령부는 허락했다.
4월로 접어들자 주한 미국대사관은 미국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의 사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17세 소년 김주열의 주검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뒤 대규모 시위가 다시 전개되기 시작하자, 미국 관리들은 미국의 국익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긴장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결정했다.
4월 19일,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에 직면해 이승만 정부는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주한미군 당국은 유엔군사령부 이름으로 한국군대가 시위에 대처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매카노기 (Walter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는 이승만을 찾아가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가담하고 있지 않지만 신속한 대응책이 취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폭발적인 현 상황을 이용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책임이 "(한반도에서) 안전하고 안정된 작전 기지를 유지하는 중대한 이익을 미국에 제공하는 것"인데 이것이 위험에 빠져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신속한 수습 정책을 취하라고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에서는 국부무 장관이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미국 정부가 한국 안보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며 '매우 강경한 외교각서'를 건넸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정선거에 책임있는 정부와 당 관리들을 제거할 것, (2) 선거법 개정을 검토할 것, (3) <경향신문>을 복간시킬 것, (4)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철회할 것, (5)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국가보안법 조항들을 폐지할 것.
4월 21일, 매카노기는 이승만을 다시 만나 수습 조치를 즉각 취하도록 모든 미국 정부관리들이 원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한미 양국이 공산주의 위협에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가까운 동맹국에게 지시하는 게 아니라 조언하는 것"이라며 외교각서에 담긴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정신을 이승만이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면서, 국무부 장관으로부터 받은 외교각서 전문을 읽어주었다.
4월 25일, 200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데모에 다시 불이 붙었다. 다음날 주한미국대사관은 언론에 성명을 발표했다. 시위대는 질서를 지키고 당국은 정당한 불만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를 즉시 취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이승만은 "모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6일, 매카노기는 이승만의 성명이 애매하다고 간주하고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다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승만에게 국민의 뜻을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며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성명을 발표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국의 귀중한 가치뿐만 아니라 미국의 근본적 이익도 위험에 처해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에 비유하며 "한국 민족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치켜세우며 다음과 같이 회유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그 책무로부터 벗어나서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고, 특히 지금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의 부담을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국민이 믿는 때 (when people believe that elder statesman, having carried so many burdens for so many years, should step away from his responsibilities, retire to position respect, and turn burdens government, especially in these complicated and difficult times, over to younger men)"가 한국에 도래했다. 그의 사임을 직접적으로 권유한 것이다.
4월 27일 이승만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듯 이승만의 하야에는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책임자까지 깊이 개입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4월 27일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개입과 관련해,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 (no interference of any kind was ever undertaken by the United States)"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4월 28일 대통령 대행이 된 허정 외무부 장관은 매카노기를 초청하여 미국의 내정간섭을 자청했다. 이틀 전 경무대에서 대사의 신분으로 주재국의 노련하고 완고한 대통령을 위압적으로 굴복시키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그로서는 미국의 실체와 위력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허정은 매카노기에게 미국과 밀접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협조할 의도를 밝히고 "모든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앞에 소개한 아이젠하워의 4월 27일 기자회견과 관련해 미국의 행위는 내정 간섭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적절한 충고"였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자신이 "미국의 충고와 도움"에 지속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했다. 이에 매카노기는 허정에게 언제든 자유롭게 지속적으로 조언해줄 수 있다고 약속하면서도 이러한 조언이 한국인들에게 '내정 간섭'으로 비추어지지 않도록 극도로 신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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