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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시간을 견디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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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시간을 견디는 아이들

[민들레] 초등 돌봄교실 1년을 돌아보니…

돌봄교실의 현주소

아이들이 막 사라진 교실에 다시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놀이를 찾거나 뛰어다니며 비좁은 공간을 어지럽게 만드는 아이들도 있고, 책을 잡고 책상에 앉은 아이도 있다. 오전엔 서로 다른 반에서 공부하다, 하교 후에 20여 명의 아이들이 모여 지낸 지 어느덧 1년. 이곳은 바로 맞벌이 가정과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 돌봄교실이다.

현재 전국 각 초등학교에는 적게는 한두 개, 많게는 네 개 이상의 돌봄교실이 있다. 확대 시행되기 전, 한 개 정도의 돌봄교실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돌봄교싱 공간을 가정처럼 꾸미려 노력했다. 방을 만들어 작은 침대도 놓고, 부엌을 만들어 요리나 설거지가 가능하게 했다. 힘들면 누구라도 '쉴 수 있게 하겠다'는 의도로 설계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2014년 돌봄교실이 확대되면서 초등학교 1, 2학년 교실이 그대로 돌봄교실로 쓰이고 있다. 좁은 교실에서 20명이 넘는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떠든다. 한쪽에선 놀이를 하고, 한쪽에선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린다. 아무리 찾아봐도 아이가 편안하게 앉아 '쉴' 곳은 없다. 예산으로 구입한 놀이기구는 오히려 공간만 차지한다. 그래서 돌봄교실, 그곳을 지날 때면 안쓰럽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 박근혜 대통령 대선 공약이었던 무상 초등 돌봄교실이 예산 지원 문제로 운영에 파행을 겪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대전 가장초등학교를 방문한 정홍원 국무총리. ⓒ연합뉴스

그럼에도 시간이 흘러 돌봄교실도 어느덧 그들만의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돌봄교실은 개인의 스케줄에 따라 드나드는 일이 많기 때문에 돌봄교사 책상 앞엔 아이들 일정이 빼곡히 붙어 있다. 아이들 얼굴도 익히기 전인 학기 초, 돌봄교사들은 이런 일정을 챙기는 게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누구 엄마가 아이를 일찍 데리러 오는지, 어떤 아이가 혼자 집에 가야 하는지 등을 다 알고 있다.

아이들끼리는 가깝게 마음을 나누는 친구도 있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불편한 친구도 있다. 그래서 친구 때문에 돌봄교실이 좋다고 하는 아이도 있고, 친구 때문에 돌봄교실에 싫다는 아이도 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살펴 아이를 돕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맞벌이 부모는 아이가 돌봄교실이 싫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냥 참으라고만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아이의 불행은 치유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보육과 교육 사이, 늘어나는 학습노동

돌봄교실 아이들은 딱딱한 책걸상이 가득한 교실에서 놀이도 하고 간식도 먹고 특별 수업(종이접기, 리코더 불기, 독서논술, 전래놀이)도 한다. 돌봄교실에서도 '공부'를 하는 것이다. 오후 1시부터 5시 혹은 9시까지 이어지는 돌봄교실에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누가 판단했을까. 교육청에서는 프로그램 두 개에 한 해 지원금을 주는데, 부모가 원하면 비용을 내고 프로그램을 더 늘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아이가 놀거나 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여기기 때문에 프로그램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아이들의 학습노동도 늘어난다.

이렇게 돌봄교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한 효율적인 돌봄, 즉 '보육과 교육이 혼합된 형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놀다가 공부하고, 공부하다 논다. 여기에 아이의 선택은 없다. 집이라면 아이는 낮잠도 자고 혼자 조용히 쉬기도 하겠지만, 돌봄교실에서는 개인의 행동이나 선택이 자유롭지 않다.

아이들의 경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래서 또 견디기 힘든 아이들이 생기고, 이에 피로가 누적된 아이들끼리 서로 짜증을 낸다. 그래서인지 돌봄교실에선 아이들의 큰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이들의 목소리엔 많은 것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아이는 부모가 올 때까지 '그 시간'을 견디는 셈이다.

돌봄교실에 맞벌이 가정 아이만 있는 건 아니다. 집에서 감당하기 힘든 아이를 맡기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위험한 곳에 올라가는 등 거친 행동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함께 지내기 힘든 아이 1명으로 공동체가 소진된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안다. 게다가 돌봄교사들은 정식교사나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말할 처지가 아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정규직 교사들은 생각도 판단도 내려놓고 지내야 한다.

아이들을 그냥 집단적으로 수용해 놓은 곳, 그 이상이 되기엔 돌봄교실의 현실은 척박하다. 돌봄교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이 많다. 시간강사도 4~6시간 동안 혼자 아이들을 도맡기엔 힘에 겨운 노동이라, 늘 지쳐 있고 웃음도 생기도 없다. 그러니 외부 프로그램이라도 있어야 숨을 잠시라도 돌린다. 청소나 간식 준비·중간에 이동하는 아이를 챙기는 일 모두 혼자의 몫이니,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해 늘 동동거린다. 집에서 아이 1명을 돌보는 것도 힘든데,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도 아이나 부모가 돌봄교사를 대하는 태도는 정규 교사와 다르다. 아이들은 담임교사 말은 들어도, 돌봄교사 말은 '쉽게' 생각한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일로 전화하고, 자신의 아이만 특별 대우해 달라고 '쉽게' 요청한다. 부모들은 아이 말만 듣고 언어폭력에 가까운 폭풍 전화를 해댄다. 정황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함부로 말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문자를 보내며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 돌봄교사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돌봄교실의 풍경은 모두에게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는 지난 11월 6일 청와대 앞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돌봄교실 파행운영 실태를 증언하고 재정대책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하교 시간이 되면 풀이 죽는 아이들

하교 시간이 되면 돌봄교실에 남아야 하는 아이들은 풀이 죽는다. 집에 곧바로 가는 아이는 몇 명 없지만, 그래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은 공간이라도 바뀌니, 잠시의 '틈'이 있다. 그러나 바로 옆 반의 돌봄교실로 가는 아이들은 '학교가 끝났다'라는 해방감도 없다. 다른 친구들이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돌봄교실로 간다. 놀다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봄교사에게 혼난다. 돌봄교사는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개인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 여러 반에서 온 아이들이라 안 보이면 찾기도 힘들고, 혹시 사고라도 생기면 모두 책임져야 하니 늘 아이들을 단속한다.

겨울엔 해가 일찍 지고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돌봄교실에 오후 6시까지 남아 있는 아이들은 어둠이 내리고서야 학교 밖으로 나간다. 교사가 퇴근을 해도 학교에 남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하루가 얼마나 길고, 시간은 또 얼마나 더딜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아이를 두고 일해야 하는 부모 마음은 또 어떨까.

지난해 우리 반 아이 중 돌봄교실에 다니던 여자아이는 쉬는 시간이면 담임을 찾아와 인사하곤 했다. 그 아이만의 지루함을 견디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고작 내가 한 일은 작은 미소를 건네는 것인데도, 아이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교실을 방문했다. 돌봄교실에서 해질녘까지 지낸다는 건 에너지 넘치는 아이에겐 고문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늘 그 아이가 밤길에 안전하게 귀가하는지 걱정이 됐다. 아이는 씩씩했지만 그 씩씩함이 '어른의 부재'에서 온 것이라 짐작되니, 더 맘에 걸렸다.

우리 반 또 다른 아이는 돌봄교실 후에도 학원을 한두 개 돌아야 엄마가 퇴근한다고 한다. 아이가 하루 중 단 1시간도 혼자 쉴 수 없이 자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이런 삶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돌봄, 가정의 따뜻함으로 풀어야

이렇듯 보육과 교육의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돌봄교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파도처럼 떠다니고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초등학생 전체를 돌봄 대상으로 확대하겠다고 장담하더니, 집권 2년 만에 2015년 예산마저 불투명하다고 한다. 돌봄의 조건, 상황, 프로그램 모두 일방적이다. 게다가 생색은 정부가 내고, 처리는 일선 학교 책임이다. 그런데 학교는 책임을 질 수도 없다. 막대한 예산으로 유지돼야 하는 일을 무슨 수로 책임진단 말인가. 안타까운 아이들을 두고 학교는 결정권도 없이, 고민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돌봄이지만, 누구도 잘 모르게 '섬'처럼 돌아간다.

떠들썩하게 시작한 돌봄교실은 어느 새 '외주의 외주화', 교육과 돌봄의 '다단계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지금 교육은 제 몫도 다하지 못하며 비틀거리고 있는데, 보육 문제까지 넘겨받아 헤매고 있는 중이다. 보육은 안정적 보육시설 확대로 이어져야 하며 그것을 교육시설에 떠넘기고 얹어주진 말아야 한다. 국가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신뢰할 만한 보육시설이 곳곳에 있어야 하며 비용도 부담 없어야 한다.

돌봄교실 문제를 푸는 해법은 어쩌면 간단할 수 있다. 아침도 저녁도 없는 우리 삶을 살려내면 되는 것이다. 아이 보육을 부모가 편안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게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부모의 탄력근무를 보장하고 아이와 함께 지내게 하면 된다. 아이들을 딱딱한 시멘트 건물에 밤이 될 때까지 가둬두지 말고 안락한 가정으로 보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돌봄교사가 있다 한들, 부모의 손길보다 더 따뜻하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대체가능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부모의 사랑과 체온이다. 그것이 꼭 필요한 시기에 부모는 노동시장에서 아이를 그리워하고, 아이는 그런 부모와 격리된 채 시간을 견디며 기다려야 하는 것은 반인륜적이다.

결국 아이를 돌보는 문제는 부모들의 노동시간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외국처럼 노동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유연하게 적용하면서 불이익 없이 직장생활이 가능해야 아이를 어둠 속에서 기다리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보육은 국가가 복지 개념으로 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부모의 삶이 살아나야 아이들도 살릴 수 있다. 아이들을 '진짜' 돌볼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아직 우리는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다.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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