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가족들의 호소에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은 침묵과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는커녕, "가만히 있으라"고만 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는 그 답을 '공안마피아'에서 찾았다. 22일 저녁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의 강연자로 나선 한 교수는 친일파가 득세했던 이승만 정권이 당시 정권을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잡아들이고 죽이면서 공안마피아가 생겨났다고 진단했다.
한 교수는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지방으로 도망간 이야기부터 풀어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후 이틀 만에 서울을 빠져나갔는데, 서울시민에게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 폭파로 적게는 500명, 많게는 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3개월 뒤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피란행렬에 오르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들을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한 교수는 "부역자 5만5000명을 잡아들였다고 했지만 실제 조사한 사람은 55만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당시 서울에 남았던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잡아간 셈이다.
한국에서 가장 저명한 여류 독립운동가인 정정화 여사 역시 이 부역자 조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 여사가 조사를 받을 때 부역자 처벌을 맡은 인물이 김창룡이었다. 한 교수에 따르면, 김창룡은 해방 이전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고 죽인 전형적인 친일파였다. 해방이 됐음에도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들을 '공산당 부역자'로 잡아들이는 상황이 이승만 정권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처럼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득세한 친일파들이 중심이 된 정권이었다. 정권 정당성이 취약한 이들은 '빨갱이'라는 허물을 씌우고 사람들을 잡아들이며 자신들의 존립 이유를 확립해나갔다. 한 교수는 부역자 조사 사건이 "공안 세력이 득세하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친일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공안세력은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다. 1995년 세월호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역시 공안마피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삼풍백화점은 원래 4층 건물을 짓는 것으로 허가가 돼 있었다. 그런데 회사는 이 건물을 5층으로 증축했고,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기 위해 기둥을 하나도 세우지 않았다. 건물 위에 엄청나게 넓은 시멘트판 하나를 얹어 놓은 셈이 됐다. 거기다가 그 위에 600톤 분량의 냉각탑을 설치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식의 건설이 가능했을까? 이준 회장이 5.16 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 창설에 관여했던 핵심 실세였기 때문이다. 공안마피아였던 그의 권력 덕에 삼풍백화점은 불법증축·구조 변경이 가능했고 500여 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준 회장은 1940년대 일본의 정보부대에서 근무했던 친일파이기도 하다.
이같은 공안마피아는 2014년에도 한국사회 곳곳에 포진돼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한 교수는 "김 실장은 유신 정권을 떠받들던 중앙정보부,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대공수사국의 국장으로 4년이나 재직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김 실장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는 청와대와 현 정권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조사위가 기소권·수사권 가질 수 없다? 역사 공부하고 와라
세월호 유가족들은 성역 없는 진상 조사를 위해 조사위원회가 기소권과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권은 조사위가 기소권·수사권을 갖는 것은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유가족들의 이같은 '전례가 없는'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조사위원회가 기소권·수사권을 가진 사례가 있었다. 바로 이승만 정권 때 만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다. 반민특위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원하는 진상조사위원회보다 훨씬 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기소권·수사권은 물론이고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이승만 정권에서 반민특위가 제대로 가동되지는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만든 당시 의회 소장파 의원 15명을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라는 이름의 조작 사건을 만들어 구속시켰다. 이후 반민특위 소속 경찰을 쳐내 물리적으로 공백 상태를 만들었고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하면서 반민특위 폐지의 정점을 찍었다.
한 교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친일파 민족 반역 세력들이 쿠데타로 대한민국에 집권하게 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제헌헌법에 규정됐었던 대한민국이 없어지고 국보법으로 다스리는 친일파들의 나라가 된 것"이라면서 "사회가 민주화됐지만 민주화로 얻어진 것은 길거리에서 국가보안법을 아무리 비판해도 붙잡혀가지 않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한국 사회가 국가보안법으로 친일파가 다스리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뜻이다. 70년 전에 있던 공안마피아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고 제한적인 민주화만 이뤄진 한국 사회에서 사회 정의가 구현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둘러싸고 권력과 벌이고 있는 이 싸움이 오래갈 것 같다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대신 끈질기게 버티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8월 안에 세월호 특별법 통과시켜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아니라 긴 호흡을 갖고 이 싸움을 버텨야한다"면서 강연에 모인 시민들에게 앞으로도 세월호 특별법과 유가족 요구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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