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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세계문화유산 등재, 한중관계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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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세계문화유산 등재, 한중관계를 돌아보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이전투구와 상부상조 사이에서

지난 6월 22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열린 제 38회 세계유산대회에서 중국의 대운하(大運河)와 비단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운하는 중국이 단독으로, 비단길은 키르기스탄, 카자흐스탄과 공동으로 신청하여 이루어졌다.

대운하의 이유있는 등재, 중국사 속의 대운하

대운하는 현재까지 등재된 중국의 46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총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수당 시기 뤄양(洛陽)을 중심으로 한 수당운하(隋唐運河)와 원명청 시기 베이징(北京)과 항저우(杭州)를 연결하는 경항운하(京杭運河), 항저우에서 바다 비단길의 시점인 닝보(寧波)를 잇는 절동운하(浙東運河)의 세 가지이다. 

우리는 중국의 대운하라 하면 일반적으로 수를 멸망으로 몰았던 수 양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대운하의 처음은 춘추전국시대의 고사인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오나라 왕 부차(夫差) 시기부터라고 한다. 기원전 486년, 부차가 한성(邗城, 현재 장수성(江蘇省) 양저우(揚州))을 지으면서 인공수로인 강회수도(江淮水道, 현 장수성 경내 위치, 대운하의 일부)를 만들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약 250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차 이후 대운하는 천여년의 긴 시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소규모 인공수로가 만들어졌지만,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수 나라 때부터이다.

수 양제는 고구려 침공의 실패와 대운하 건설로 수의 멸망을 자초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 사실 수 양제의 대운하 건설은 그의 아버지인 수 문제의 것을 그대로 이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왜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면서까지 대운하를 강행했을까? 이는 수나라 이전의 특수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수나라가 세워지기 이전, 중국은 위진남북조라는 긴 분열기에 처해 있었다. 남북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당시 선비족 등의 유목민족이 지배하는 북조와 한족들이 지배하는 남조로 나뉘어 있었다. 황하 유역을 근거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한족들은 위진남북조 시기 북방에서 굴기한 유목민족들에 의해 남방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이들은 이 지역에서 다시금 그 문화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방에 이주해 왔던 한족들이지만, 남방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자원을 발견하며 빠른 속도로 개척해 나갔다. 

중국 북방의 기후는 매우 건조하며, 현재 사막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반해 남방은 수많은 하천과 고온다습한 기후로 1년 2모작, 3모작이 가능하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 조건과 한족들의 선진 기술이 결합하여, 본래 중국의 역사에서 정치·경제·군사·교육 등 모든 면에서 중심이었던 북방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최소한 경제 면에서는 점차 남방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수 양제는 바로 남방의 풍부한 물자를 끌어오기 위해 대운하를 건설했던 것이다. 

대운하의 건설은 비록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고역이었지만, 후대의 왕조들에게는 매우 큰 은혜였다. 실제로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서는 북송 시기 대운하를 통해 들어오는 많은 배들과 물자를 볼 수 있다. 당말 황소의 난, 원말 홍건적으로 난 등에서는 대운하가 막혀, 조정이 극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이다 얼마 못 가 멸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운하는 중국의 역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왔고, 현재도 중국 내 물류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여,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손색이 없다.

비단길의 등재, 공존과 화합으로

이번 세계유산대회에서 중국은 대운하 외에도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비단길' 역시 성공적으로 등재하였다. 비단길은 고대 비단을 중심으로 하여 동방과 서방이 교역했던 길이다. 비단길이라 해서 길이 비단처럼 고울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중국에서 제조된 비단은 현재 중국의 시안(西安)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나아가며,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의미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해발 5000m로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 '촌초난장(寸草難長, 작은 풀도 자라지 않는다)'의 백룡퇴(白龍堆) 등을 거쳐야만 비로소 로마에 이르렀다. 비단길은 고대 동서교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며, 인류의 문화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위대한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비단길 등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앞서 '중국'이 이번 비단길의 등재에 성공했다고 했지만, 사실 이는 중국이 아닌 '키르기스스탄'의 이름으로 등재한 것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은 과거 비단길의 주요 경유지로서 이번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에 중국과 함께 손을 잡았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한 국가가 1년에 하나씩만 신청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이 양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단독으로 비단길을 등재하려고 했다면 내년 혹은 내후년 등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이번 중국의 비단길 등재의 양보는 1년에 하나라는 제도적인 한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여기에서 오히려 대국으로서 중국의 포용력이 느껴진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우리는 종종 역사적인 문제로 중국과 마찰을 겪고 있다. 중국과 우리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근현대사의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있어, 다른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민족주의가 강하다. 이 민족주의는 '내 것 지키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특히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 한중 양국의 갈등은 이미 생소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중국과 접경하며 수천 년간 관계를 이어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며, 그것을 우리의 것에 융합하고 발전시켜왔다. 반대로 중국 역시 우리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적지 않다. 이렇게 중국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되 주변국의 것도 서로 혼합된 문화, 즉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문화권에서 과연 문화의 원류들을 '너와 나'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정할 수 있을까?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비롯하여, 마치 내가 하루 빨리 등재하지 않으면 빼앗긴다고 생각는 것, 이것이 바로 한중간 역사 마찰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 등재해야할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들이 많다. 중국과 문화재 등재를 두고 '진흙탕의 개싸움(이전투구·泥田鬪狗)'이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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