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후'로 시작된 절망의 시계가 5월 16일로 꼭 한 달을 가리킵니다. 굳이 '절망'이라고 쓰는 이유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관(官)과 일부 언론의 조용한 속삭임에 무참한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284명이 사망했고 실종자는 아직도 20명이나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 구조자 '0'이라는 무능의 총체만 선연해지는데, 벌써 아픔을 털어내자니요. 국가가 지켜낸 생명이 단 1명도 없는 현실의 비극을 가리고 덮어야 할 동기가 아니고선, 이 비인격적 희망론은 곧 '제2의 세월호'를 예비하는 주술의 언어일 겁니다.
'세월호 이후'로 우리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명제에 토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표현을 빌면 "세월호 사고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수준과 국민 안전 시스템을 근본부터 재점검하라는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선사의 실소유주로 알려진 유병언 일가도 철저히 수사해야 할 것이며, 공직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대대적으로 수술해 '관피아'를 뿌리 뽑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작업들을 종합한 용어가 박 대통령의 '국가 개조'일 겁니다.
"과거로부터 쌓여 온 잘못된 적폐"와 "악습과 잘못된 관행들"을 탓하는 이 국가개조론이 과거 정권이 나라를 망쳤다는 정치적 유언비어의 유포라는 비판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국민들은 '국민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국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데, 국가를 변신 로봇처럼 단숨에 개조해보이겠다는 박 대통령의 동문서답은 5.16 쿠데타 후 '국가 재건'을 주창한 부친과 너무도 판박이이기에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방향 또한 효율과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올려놓은 자신의 국정 철학에 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기에 오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조만간 권위적인 하향식 국가 개조 작업이 이어질 겁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박 대통령이 국가의 썩은 부위를 도려낼 만한 구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윤을 위한 경제와 정치의 동맹, 즉 기업국가에 포획된 통치자에게 '프리핸드'는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보여주듯, 이윤에 눈이 먼 기업에게 불법은 관행입니다. 사람 목숨 따윈 안중에 없습니다. 국가라는 공공의 체계는 사기업의 생산 활동을 위한 거대한 뒷배로 협력합니다. 관료들의 꼭대기에 있지만, 사실 박 대통령은 관료들에게 떠밀려 가는 구조적 협업자라는 겁니다. 기업국가의 구조 자체가 바로 케케묵은 '적폐'인 겁니다. "기업국가 해체를 위하여 다 같이 반란자가 되지 않으면, 구명보트를 탈 만큼의 특권층이 아닌 대한민국호 승객의 대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수장일 뿐이다"라고 한 박노자 교수의 '선동'이 정곡을 찌르는 이유입니다.
비극의 와중에 벌이는 국가 개조의 희극은 지난 13일 박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 자리에서 여실히 속살을 드러냈습니다. 일부 언론은 대통령이 세월호 후속 대책에 대한 숙제를 내자 장관들이 개혁안을 쏟아냈다고 보도했더군요. 대통령의 '깨알 지시'를 받아 적기에 급급하던 평소의 국무회의와는 분명히 다른 형식이었습니다. 청와대는 세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2시간 50분 동안 박 대통령은 듣고 장관들이 돌아가며 의견을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관들이 낸 의견은 대체로 공무원 임용 방식과 보직 관리 제도를 바꾸는 방안 정도였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이 이미 주요한 대책이라고 언급한 내용을 장관들이 길게, 돌아가며 얘기했을 뿐입니다. 기업국가의 '적폐'는 물론이고 '관피아'가 그런 간단한 조치로 해소될 리는 만무합니다. 국무회의도, 그에 앞서 휴일에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을 불러 모은 것도 모두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라는 화룡점정을 위한 보여주기 행사였던 겁니다.
더 이상의 오프닝 이벤트는 없습니다. 이제 관심은 대통령이 내놓을 대국민 담화와 인적쇄신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포장하건 내용물이 번지수 잘못 짚은 국가 개조인지라 솔직히 큰 기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국민 담화가 그나마 설득력을 얻으려면 박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과가 반드시 전제돼야 함은 물론입니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네 차례 내놓은 사과는 오히려 성난 민심에 불을 지핀 꼴이었습니다. 과거 정권 탓으로, 아랫사람 탓으로 책임을 돌린 대통령의 협량이 사과 발언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국민적 고통을 대하는 박 대통령의 공감 능력이 낙제점을 받고 있습니다. 소통의 기본은 공감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심퍼시(Sympathy)'에 그치다 보니 박 대통령은 자식 잃은 부모 앞에서 "나도 부모님을 다 흉탄에 잃었다"는 매우 부자연스럽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한 겁니다. 내면의 고통을 가슴으로 나누는 '엠퍼시(Empathy)'의 결여가 아니고선 박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자식 영정을 들고 찾아온 유족들을 청와대 앞 아스팔트 바닥에 밤새 세워두진 않았을 겁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이 난리에도 40% 대를 유지하는 지지율이 박 대통령을 여전히 굼뜨게 만든 요인일까요? 지지율이 줄곧 하늘을 찌를듯하던 때에도 '허상'이라고 했으니, 조금 떨어진 지지율을 빌미로 박 대통령의 처지를 조롱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지지율 관리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운 권력의 모습은 초라합니다. 그러니 국민과의 소통과 공감은 뒷전일 수밖에요.
같은 맥락에서 정부의 인적 쇄신도 미덥지 않습니다. 탕평과 통합을 지향하는 거국 중립내각은 야당이 주장합니다. 여당에서도 정부 책임론에 대한 최소한의 조치로 내각 총사퇴 요구가 나옵니다. 그러나 정홍원 국무총리가 사고 수습이 한창인 와중에 사의를 표명할 때부터 청와대는 여론 달래기용, 국면 전환용 개각을 준비하는 듯한 낌새를 내비쳤습니다. 내각과 함께 청와대 참모진의 개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지만 '쇄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새 인물이 등장할 징후는 아직 없습니다. 일각에선 후임 국무총리와 함께 국정원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이 개편에 포함될지, 남재준-김기춘과 다른 혁신적인 인물이 등장할지를 포인트에 두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박 대통령이 주도하는 '하향식' 국가 개조에 드리워진 불안한 징조의 다른 얼굴은 정부의 무능에 분노하는 민심의 흐름으로 드러납니다. 박 대통령의 국가 개조와 민심이 바라는 국가 개조 사이의 괴리가 확연하게 느껴진다는 얘깁니다. 국가를 실제로 개조해 나가는 힘은 아래로부터 솟아올라 권력의 결정과 집행을 강제하는 민심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민심이 권력을 견인하는 과정이 정치의 기능이고, 민심이 정치의 공간에서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선거입니다. 국민들은 지금 박 대통령의 '안전한 대한민국' 약속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마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게시글이 오르는 건, 대통령 끌어내리자는 투쟁의 구호라기보다는 그런 배신감의 발로로 읽어야 옳습니다.
결국 지방선거의 결과에 따라 박근혜식 국가개조냐 국민들이 권력을 재구성하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세월호에 분노한 민심이 현 정부에 대한 징벌적 투표로 이어질 것인지를 예단하긴 이르지만, 현재의 선거 분위기가 소위 '박심(朴心)'을 파는 후보들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줄곧 '박심' 논란을 일으켰던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비주류 정몽준 의원에게 참패했습니다. '박심'을 등에 업고 인천시장 후보로 출마한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장관의 지지율도 세월호 사건 이후 불안해졌습니다.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선 남경필 의원은 후보 선출 연설에선 "반드시 승리해서 박 대통령을 지켜내고 박 대통령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생명을 다하겠다"고 하더니, 요즘은 "사고 수습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실망을 드린 게 사실이고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고 뉘앙스를 달리했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 흐름은 40대 여성들에게서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40대 여성 유권자들은 50~60대 고령층에 이은 박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이었습니다(박근혜 55.6%, 문재인 43.4%). 취임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시간제 일자리 등으로 40대 여성층을 묶어놓으려는 노력을 지극정성으로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 세대는 가장 큰 낙폭을 그렸습니다(4월 4일 62% → 5월 2일 42%, 한국갤럽). 이들을 지칭하는 '앵그리 맘'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더군요. 주로 중고생 자녀를 둔 엄마들의 마음이 그런가 봅니다. 이들은 '내 자식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인가'라고 박 대통령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불편했던 걸까요.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이들에게 정치색을 씌웁니다. '엄마의 노란 손수건'이라는 인터넷 모임 회원들이 진도 팽목항과 경기도 안산의 세월호 사망자 정부합동분향소 등을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피켓 시위를 벌이자 좌파 세력이 벌이는 정치투쟁이라고 몰매를 퍼부었습니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세월호 사고를 정치적으로 악용 말라"고 하거나 청와대 대변인이 "순수한 유가족"이란 말을 입에 올린 것도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을 의심한 듯 한 말이었습니다. 자식 잃은 슬픔에 대한 이웃의 온정을 이렇게 취급한 대가를 선거에서 어찌 되돌려 받을지는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야당은 야당대로 '앵그리 맘' 표심 잡기에 부심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공보단장이 "앵그리 맘의 호소를 경청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방선거 전략의 방향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노한 '마더십'이 야당의 손을 들어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급증하는 부동층은 정치 전반에 대한 신뢰의 붕괴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상 처음으로 여성 의원이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돼 화제인데, 박영선 의원이 휘청거리는 정치의 '복원력'을 이끌어 낼지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정치를 향하고, 정치는 그 문제들을 해결해내는 생산력을 보여야 신뢰를 얻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도 서서히 국회를 향하고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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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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