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문제에 관한 새누리당의 적반하장이 도를 넘었다. 박대출 대변인은 23일 새정치민주연합을 향해 "기초선거 무공천을 통합의 유일 고리로 삼아 출발하더니 비례대표에 대해서는 공천을 하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면서 "돈 공천은 비례대표 공천 과정에서 개입될 소지가 훨씬 더 높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국민을 속이는 것이 새 정치는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에 앞서 홍문종 사무총장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연대의 첫 조건으로 내세우던 민주당이 지방선거를 70일 남겨두고 이를 철회하려 한다. 민주당의 안면몰수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나 황당하기는 매한가지"라고 했다. 그는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의 국민 기만극"이라고도 했다.
새누리당의 이 같은 공세는 보수언론의 엄호사격을 등에 업고 있다. <조선일보>는 사설로 새정치민주연합에 무공천을 압박하는 한편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시장·군수·구청장 후보를 '비공인 인증'해주는 편법과 꼼수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무공천의 우회로까지 사전 차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협공은 기초선거 정당공천 제도에 관한 진지한 성찰의 결과가 물론 아니다. 야권을 '약속 프레임'에 가둬 '기호 2번'이 사라진 지방선거를 손쉽게 독식하려는 속내가 너무 빤하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폐기한데 대한 해명이나 사과는 일언반구도 없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안면몰수'와 '국민 기만'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원조라는 얘기다. 새누리당이 이제라도 무공천 약속을 지킨다면 기초선거를 둘러싼 혼란은 말끔하게 해소된다. 약속은 쌍방 합의니까.
하지만 한 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그 가치조차 바닥에 내동댕이친 약속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사인 간의 약속과 달리 국민들이 고스란히 뒷감당을 떠맡게 되는 정치의 속성 탓에 문제는 더욱 간단치 않다. 특히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에 유리한 룰로 치러지는 선거는 유권자 표심의 왜곡이라는 대의 정치의 본질에 대한 훼손으로 이어진다. 새누리당이 버티는 상황에서 야권의 약속 지키기는,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하더라도 공정한 선거에 관한 유권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고심은 이해할만 하다. 야권 분열이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벗어나고자 '무공천'을 매개로 손을 잡은 게 엊그제인데, 이제와 무공천을 없던 일로 되돌리기가 면구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합당 결정이 김한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의 결단으로 외화됐을지라도 야권의 재편을 바라는 지지자들의 압력이 실질적인 배경이었던 것처럼, 기초선거 공천 문제도 지지층의 이해를 읽어야 할 책임은 궁극적으로 지도부에 있다. 어떤 심모원려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핵심당원들을 탈당시켜 패배가 뻔한 선거에 내모는 지도부의 결정은 그 자체로 무책임하다.
이는 비단 야당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독주를 비판하면서도 행정권력과 의회권력에 이어 지방권력까지 갖다 바치겠다는 논리에 유권자들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정당공천을 하지 않겠다는 건 유권자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견제 기능이 상실된 권력 편중이 야기할 가공할만한 상황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된다. 무공천이 곧 반(反)정치가 되는 역설이다.
안철수 의원의 개인 브랜드에 머물던 '새 정치'가 새정치민주연합의 집단적 가치로 승격되려면 그 속에 숨은 반 정치의 속성을 걷어내는 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당리당략에서 자유로운 외부인들로 구성된 '새정치비전위원회'조차 당장의 후폭풍을 의식해 무공천 문제에 관한 논의를 회피해선 힘이 실릴 수 없다. 가뜩이나 정당 공천 폐지는 정당정치의 밑동을 흔들고 지방행정을 토호들의 주머니 속 공깃돌로 전락시킬 것이란 우려가 많아 이에 관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잘못된 약속의 덫에서 스스로 빠져나와야 할 이유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무공천의 후과를 상쇄할만한 대안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면, 저간의 사정에 대한 해명과 솔직한 사과를 하면 된다. 그것으로도 새누리당의 후안무치와 대별된다. '안철수 현수막', '문재인 현수막'을 내걸고, 파란 옷을 입고 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기호 2번'을 대신하려는 미봉책보다 그게 더 정정당당하다.
그 대신, 누구나 공감할만한 진짜 기득권 포기의 결단을 감행해보라. 가령, 합당의 여파로 변화와 쇄신의 무풍지대가 되어버린 호남의 기득권 체제를 뒤엎을만한 혁신적인 공천을 한다면 새 정치의 진정성은 그로부터 되살아날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한길 대표도, "정치는 결과를 내는 것"이라고 했던 안철수 의원도 이제 새 정치와 반 정치는 구분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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