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이 사용하는 의료비 규모는 크지 않다. 2011년 우리나라의 국민 의료비 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 대비 7.4%로, OECD 회원국의 평균인 9.3%보다 낮다. 구매력지수로 환산한 1인당 국민 의료비는 2198달러로 34개 국가 중 26번째이다.
국민 의료비 중 공공 재정 비중이 낮은 것이 문제
이렇게 우리나라의 국민 의료비 비중은 낮지만, 개인과 가계의 부담은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 매우 높다. 국민 의료비 중 공공 재정의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2011년 우리나라 국민 의료비 지출 중 공공 재원에 의한 지출은 55.3%를 차지했다. 이는 OECD 회원국 평균인 72.2%보다 크게 낮다.
그래서 국민 의료비 중 가계 부문의 지출은 35.2%에 달한다. OECD 평균인 19.6%보다 약 1.8배 높은 수준이고, OECD 34개 회원국 중 가계부담률 수준이 3위이다.
이에 따라 의료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우리 국민의 70%가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한국의료패널 자료에 의하면, 2010년 기준으로 현재 가구당 평균 3.8개의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고, 월 평균 23만 원을 지출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의료 보장 대선 공약 두 가지
이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으로 나타났다. 크게 두 가지인데,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 부담' 공약이 하나이고, '저소득층 및 중산층의 환자 본인 부담 의료비 경감' 공약이 다른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내걸었던 두 개의 의료 보장 공약으로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높여서 국민의 의료 불안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첫 번째가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 부담' 공약인데, 전체 중증질환의 76%인 4대 중증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 질환)의 보장률(비급여 부문 포함)을 2013년 85%, 2014년 90%, 2015년 95%, 2016년 100%로 확대하겠다는 약속이 그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직 인수위 단계에서 4대 중증질환의 보장에서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비, 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제외되었다. 4대 중증질환 이외에도 고액 진료비를 부담하는 다른 질환들이 많은데 이들 질환을 차별화한다는 큰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국민이 이 공약에 박수를 보냈던 것은 전반적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13년 6월에 발표한 정부의 보장성 강화 계획에 의하면, 초음파와 심장질환에 대한 MRI, 생존률 개선 효과가 큰 고가 의약품, 수술 치료 재료 등 비급여로 분류되었던 항목들을 필수 급여로 지정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현재 76% 수준인 4대 중증질환의 보장률이 2016년 이후 82~83%가 되어 지금보다 6~7%포인트 정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4대 중증질환에 해당되지 않는 상위 50위 고액 진료비 환자들의 보장성은 낮아져서, 본인 부담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비급여 본인 부담률이 계속 높아지고 있는데, 4대 중증질환 이외의 고액 진료비 환자의 비급여 본인 부담금을 낮출 계획은 없기 때문이다.
보장성 강화를 위한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공약은 '저소득층 및 중산층의 환자 본인 부담 의료비 경감' 공약이다. 이는 현재 1년간 총 본인 부담 급여 진료비가 건강보험료 하위 50% 계층은 200만 원, 중위 30% 계층은 300만 원, 상위 20% 계층은 400만 원을 초과할 경우 초과한 본인 부담 금액을 국민건강보험에서 부담하고 있는데, 현재의 3계층에서 소득 수준에 따라 10등급으로 구분하여 저소득층에게 더 유리하도록 '본인 부담 상한제'를 운영하겠다는 공약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인 부담 상한제에서 본인 부담은 법정 본인 부담 비용을 말하는 것으로, 비급여 본인 부담 비용을 제외한 법정 본인 부담 비용 내에서 상한을 정한 정책을 말한다. 법정 본인 부담만 낮추는 공약으로는 저소득층의 의료 비용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없다. 2011년도 건강보험 환자 진료비 실태 조사에서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전년도에 비해 낮아진 원인은 비급여 본인 부담률이 커졌기 때문이다.
비급여 뺀 '본인 부담 상한제'로는 제도의 취지 달성 못 해
비급여 본인 부담률을 낮추지 못하고 현재와 같이 법정 본인 부담 비용 내에서만 '본인 부담 상한제'를 적용한 상태에서는, 총 진료비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을 개선할 수 없다. 결국, 이들은 고액 진료비 부담으로 경제적 파탄을 겪은 후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쉽다.
이는 실증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임승지·김승희·백종환·김나영, <저소득층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정책 개선 방안>, 건강보험정책연구원, 2013). 건강보험에 가입된 1912만5386가구를 대상으로 의료비 부담을 알 수 있는 2개의 변수를 측정한 연구이다. 이 연구에서는 소득 대비 의료비 부담률과 비급여 포함 본인 부담이 소득의 10%, 20%, 40%를 초과하는 재난적 의료비 경험 가구의 비율을 측정한 후, 2008년과 2011년의 변화를 비교하였다.
정부는 2009년부터 형평적 본인 부담 경감을 위해 소득 수준을 3단계로 나눠 차등화된 본인 부담 상한제를 적용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으로 의료비 부담의 소득 수준별 불형평성이 개선되었는지를 계량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2008년과 비교해 2011년의 소득 대비 의료비 부담률이 모든 소득 분위에서 증가하였다. 특히, 최하위 소득 구간의 경우, 직장가입자는 소득 대비 의료비 부담률이 2008년에 15.3%였는데, 2011년에 17.6%로 증가하였고, 지역가입자는 2008년 20.3%, 2011년 27.7%로 지역가입자의 의료비 부담률이 더 많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지역가입자의 경우, 최하위 소득 구간과 최상위 소득 구간 간의 격차도 3.3배에서 4.1배로 증가하였다.
둘째, 비급여 포함 본인 부담 의료비가 소득의 10%, 20%, 40%를 초과하는 재난적 의료비 경험 가구의 비율도 모든 소득 분위에서 증가하였다. 그리고 최하위 소득과 최상위 소득 간 재난적 의료비 지출 경험 가구 비율의 격차가 직장과 지역가입자에서 모두 2008년과 비교해 2011년에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2009년부터 형평적 보장성 확대를 위해 적용된 소득 구간별 본인 부담 상한액을 적용했음에도, 2008년보다 2011년 의료비 부담률이 증가하였다. 재난적 의료비 경험 가구의 비율도 증가하였으며, 최하위 소득 구간과 최상위 소득 구간 간의 소득 대비 의료비 부담률 및 재난적 의료비 경험 가구 비율의 격차가 증가하였다.
우리나라의 미충족 의료 경험률, 유럽연합 평균의 2.9배
재난적 의료비의 발생은 미충족 의료를 야기한다. 미충족 의료란 의료적 필요가 있어도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국민건강 영양 조사 결과, 2011년 우리나라의 미충족 의료 경험률은 18.7%로 유럽연합 평균 6.4%의 2.9배였고, 소득이 낮을수록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더 높았다. (☞ 유럽연합 통계데이터 바로 가기)
미충족 의료 경험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높은 의료비 부담과 같은 경제적 이유이다. 보장성 수준이 높으면 그 만큼 미충족 의료 경험률을 낮출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본인 부담 비중이 높기 때문에 유럽에 비해 미충족 의료 경험률이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법정 본인 부담 내에 국한된 '본인 부담 상한제'만으로는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 없다. 오히려 의료비 부담의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저소득층을 포함하여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이려면 비급여 비용을 포함하여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본인 부담 상한제'를 기획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기대가 무망하다. 올해는 건강보험료가 1.7% 인상에 그쳤다. 지난해 6월 정부가 건강보험 정책 심의 위원회를 통해 그렇게 정한 것인데, 가입자의 입장에서는 보험료 인상분이 작아져서 좋을지 모르지만,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늘릴 수 있는 보험 재정을 확보할 수 없어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 없게 된다.
정리해 보면, 박근혜 정부가 내세웠던 대표적인 2개의 의료 보장 공약으로는 국민의 의료 불안을 해결해 주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소득 계층별로 의료비 부담의 격차를 크게 만들어서 저소득계층의 미충족 의료를 늘릴 뿐만 아니라, 고소득층을 포함하여 전 소득계층이 재난적 의료비 부담을 경험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누적 적립금 사용 방안은 지속 가능하지 않아
보장성 강화는 건강보험 재정 확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그렇게 할 의향이 없어 보인다.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정부가 제시한 재원 확보 방안은 누적 적립금 사용과 재정의 효율적 관리에 국한되어 있다.
물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최근 3년간 누적한 건강보험 적립금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재원 확보 방안은 상당히 단기적이어서 지속가능성이 높지 않다. 국민건강보험의 당기 수지가 최근 3년간 흑자를 기록한 이유는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2010년 유럽 발 국가 부채 위기로 인해 불황이 지속되면서 가계의 실질 소비가 5분기 연속 감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민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재정 흑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앞으로 경기가 회복되고 보장성 확대 정책이 추진된다면, 국민건강보험의 당기 수지는 다시 적자로 돌아설 것이 뻔하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올바른 해법
우리 국민이 건강보험료를 더 내자고 정부에 제안해보자. 나는 이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는 2010년 출범한 이래 '건강보험료 더 내기' 운동을 해왔다. 2014년 기준으로 건강보험료를 24%를 인상하여 월 평균 1만 원의 건강보험료를 더 내고, 종합 소득과 금융 소득 등의 소득에 대해서도 건강보험료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부과체계를 개편하고, 국고 지원 사후정산제 등의 시행을 통해 14.3조 원을 확보한다면, 비급여 본인 부담을 포함하여 '100만 원 본인 부담 상한제'를 실시할 수 있고, 간병 비용도 건강보험이 책임질 수 있다.
건강보험료는 올해 6월에 결정될 예정이라서 곧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라는 합의 기구에서 건강보험료 인상률과 더불어 건강보험 보장율과 급여 범위도 결정한다. 여기에는 25인의 위원이 참여하는데, 위원장(보건복지부 차관) 한명, 정부 및 공익대표 8명, 의사협회 등 의료 공급자 8명, 그리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농민단체, 기업대표 등 가입자 대표 8명으로 구성된다.
그동안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논의 과정이나 내용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정책 결정도 정부의 의도대로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국민을 대표하는 가입자 대표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 공급자들도 보장성 강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의료 민영화 반대 투쟁을 통해 국민을 대표하는 가입자 대표들과 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 공급자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가입자 대표들과 의료 공급자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증가시키는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 설립 허용이나 원격 의료 허용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대 투쟁도 중요하지만, 반대 투쟁만으로는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일 수는 없다.
가입자 대표에게 요청한다. 올해 6월 건강보험 정책 심의 위원회에서 건강보험료를 올릴 테니 건강보험 하나로 의료비 걱정을 해결할 수 있도록 보장성을 확대해 달라고 건의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 공급자에게도 요청한다. 건강보험료 인상을 통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방안을 지지해주기 바란다. 보험료 인상을 통해 확보된 건강보험재정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는 것 이외에도 적정 수가 보장을 통해서 과잉 진료를 하지 않고 환자를 중심에 두고 진료할 의료 환경을 갖추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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