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페소화가 달러 대비 환율이 일주일만에 15%나 폭등하면서 지난 주말 '심리적 저항선'이라는 '1달러=8페소'를 넘어섰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물가상승률은 25%를 넘어섰다. 시민들은 추락하는 페소화를 달러화로 바꾸기 바쁘다. 환율 폭등이 물가 폭등, 다시 환율 폭등을 부르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달러를 풀어 환율을 방어하느라 외화보유액이 2006년 11월 이후 처음으로 300억 달러를 밑으로 떨어졌다.
아르헨티나의 현재 상황은 2001년 비슷한 악순환이 벌어지면서 끝내 2002년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수준을 넘어 사실상 디폴트(채무 불이행)까지 간 사태가 재연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10년 주기 경제위기설'이 현실화됐다는 얘기들이 파다하다.
글로벌 경제가 아르헨티나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이유는 '전염 가능성'이다. 터키, 우크라이나,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러시아 등도 통화가치가 폭락세를 보이는 등 아르헨티나와 비슷한 위기에 빠진 신흥대국들로 거론되고 있다. 터키의 리라화도 9일 연속 통화가치가 하락하면서 2001년 이후 최장기 환율 상승 기록을 세우고 있고, 우크라이나의 화폐 그리브나의 가치도 4년래 최저치로 하락했다.
글로벌 경제 쌍두마차 G2가 신흥국 경제위기 주범
이들 신흥대국들의 금융불안이 고조된 배경으로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이른바 'G2'가 꼽히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를 이끌 쌍두마차로 기대를 모은 G2가 현재 신흥대국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꼽히는 것은 역설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미국은 돈을 찍어서 경제를 부양하는 정책에 제동을 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환차익을 노린 투기자본들이 달러 가치 상승 기조를 예상하고 대거 자본이 이탈하고 있는 것이 신흥대국들의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이유라는 것이다.
여기에 세계 최대의 원자재 수입 시장이라고 할 중국 경제가 둔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신흥대국들에게 직격탄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브라질, 남아공, 러시아 같은 신흥대국들의 주요 수출품인 원자재의 세계 최대 수요국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외부 변수에 따른 타격은 물론 나라마다 다르다.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곳으로 꼽힌다. 원자재 수출에 대한 의존이 크면서 내부 정치 상황이 엉망인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7일 <뉴욕타임스>는 "아르헨티나는 2002년 위기 이후 가정용 전기료 동결과 저소득 가정 보조금 등 사회복지 지출을 늘리면서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통화를 증발하면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됐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이 일정 규모 이상을 유지한다면 사회복지 지출은 빈부격차가 심한 이 나라의 상황으로 볼 때 '좋은 의미의 포퓰리즘'일 수 있다. 하지만 올해 아르헨타나의 경제성장률은 2.8%에 그치는 등 최근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자본 이탈이 지속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외국자본이 대주주인 최대 석유업체인 YPF 등을 국유화하면서 외국자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아르헨티나의 자본이탈은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보다는 오히려 '외국자본의 복수'라는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정도로 지속적이고 심각하다.
아르헨티나는 주요 도시들이 무정부 상태에 빠질 만큼 사회적으로 혼란하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뇌수술로 몇 달 동안 국정에 손을 놓았고, 지난해 12월 경찰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한 틈을 타 식료품점 약탈이 전국으로 번졌다. 조만간 노동계의 임금 협상이 본격화되면 인플레이션 문제로 노사 갈등이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전염'에 취약한 신흥대국들
내부 정치상황이 경제위기를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되는 신흥대국들로는 아르헨티나 말고도 이른바 ' 5대 취약국'이 있다. 총선이나 대선을 앞둔 인도, 인도네시아, 터키, 브라질, 남아공 등 다섯 나라다. 또한 현재 두달 째 친러시아와 친서방으로 국론이 분열돼 유혈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역시 온 나라가 친정부와 반정부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태국도 '아르헨티나발 경제위기'의 연쇄파장을 일으킬 후보들로 꼽히고 있다.
일단 우리의 관심사는 '아르헨티나발 경제위기'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아르헨티나발 위기가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정부는 지난 26일 '긴급 경제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현재까지는 제한적이지만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면밀하게 모니터링을 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보였다.
당장 한국의 금융시장도 요동치는 모습이다. 27일 코스피는 장중 1900선이 무너지는 등 글로벌 증시가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엔화는 강세로 돌아서고, 원화는 약세로 돌아서는 등 환율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6거래일 동안 연속 상승하면서 23.9원이나 올라 27일 1083.6원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신흥시장의 차별화가 본격화되는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은 3500억 달러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외환보유액과, 지난해 700억 달러의 사상 최대 경상수지 흑자 등 '펀더멘털'에서 신흥시장에서는 돋보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평등이 글로벌 경제위기 진짜 주범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도미노에 휩쓸리지 않는다면, 툭하면 불거지는 '경제 위기설'과 관련해 경계할 점이 있다. 아르헨티나발 위기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면서 '한국 경제 위기설'을 앞세워 정부와 재계가 경제개혁을 피해가는 구실로 삼을 가능성이다.
이 점에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진단이 주목된다. 그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양상은 대공황 식이 아니라 지지부진한 장기침체가 될 것이라는 점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루비니 교수는 "신흥시장에서 지난해 벌어진 일들이 올해도 반복될 것"이라면서 "지난주 글로벌 시장에서 벌어진 일은 '작은 폭풍우'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신흥시장뿐 아니라 선진국 증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정말 강조한 것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이다. 지난 25일 나흘간 일정을 마치고 폐막한 올해 다보스 포럼에 참석했던 그는 "기술혁신에 대한 찬양이 넘쳤다"고 꼬집었다.
그는 "IT와 에너지, 바이오테크, 로봇 등의 기술혁신이 많이 거론됐지만, 이런 혁신이라는 게 자본 집약적이고, 결과적으로 노동 수요를 줄이는 것"이라면서 "일자리 창출에 구조적인 문제가 초래되고 있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책적 노력의 방향에 대해서 그는 고용을 늘리기 위한 급여세 인하 등 노동을 위한 세제정책, 교육 투자, 직업훈련을 강조했다. 기술 발전에 치중하다가 일자리 창출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형성돼 갈수록 총수요가 줄어들면 글로벌 경제성장이 더욱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총수요가 줄어드는 과정은 불평등이 확대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루비니 교수는 "자본의 수익이 임금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늘어나면, 소비가 부족해지고, 결국 자본주의 스스로 파멸할 것이라는 마르크스 이론를 떠올리게 하는 얘기"라면서 "카를 마르크스의 통찰이 100년 전 못지않게 지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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