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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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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96>

흰 그늘

달이 천심(天心)에 이르렀나보다.

나의 회상은 어쩌면 '흰그늘'을 천심으로 하는 달의 한 주기(週期)였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에겐 그 시학의 유일화두(唯一話頭)가 바로 천심이다. 예컨대 고독이라든가, 그리움이라든가, 민중이라든가, 님이라든가…… 내겐 '흰그늘'이 분명 유일화두다.

범박하게 말해 '흰빛'은 신성한 초월이요 평화이며 광명이다. 그것은 또 우리 민족의 빛이니 '킢'이요 '?'이요 '불함(不咸)'이다. 그것은 깊숙한 빈 방에서 일어서는 것임에 다름아닌 '무늬(文, 紋)'다.

안에 안에, 속에 속에 숨어 있다는 그 무늬, '흰빛'이 배어나오지 않는 그늘은 감동을, 새 차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늘은 물론 신산고초요 고통이고 어둑어둑함이며 피를 쏟고 뼈를 깎는 극한적인 독공(篤工)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그 스스로 슬픔과 기쁨, 골계(滑稽)와 비장(悲壯), 이승과 저승, 남성과 여성, 주체와 타자를 아우르고 있는 움직이는 '모순동거'요 혼돈한 '모순어법'이다.

아무리 소리좋고 너름새 훌륭한 소리꾼이라하더라도 그 소리에 그늘이 없으면 이미 끝이다. 민족은 전통예술의 큰 미학적 원리를 '신명'이나 '활동하는 무(無)'나 '한(恨)'이나 '시김새(삭임)'나 '멋'과 '엇' 그리고 '울림' 등과 함께 또한 이 '그늘'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늘은 삶의 태도이자 아름다움의 조건이다. 예술의 윤리적이면서 미학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바로 '그늘'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그늘도 흰 그늘이 되지 못하면 창조적인 새 차원을 열지 못한다. 그것은 기존 차원의 이중성, 양면성, 모순과 일치일 뿐이다. 기존 차원 밑에 숨어서 그것들을 추동, 비판, 제약하고 마침내는 때가 차서 그 스스로 현현(顯現)하는 새 차원과 양면적인 기존 차원의 창조적 얽힘, 엇섞임, 그것이 '흰 그늘'이다. 중력의 밑으로부터 현현해 나오는 은총이자 초월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아우라'요 '무늬'다.

그러나 나의 천심월(天心月)은 이런 역리(易理)나 모순어법이나 생명논리에 의한 설명 따위로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오랜동안 고통스럽게 생성하고 분열하고 얽히고 설키면서 통합되었다. 그것은 나의 환상이요 정신병이요 정신현상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그 정신병의 치유요 극복이었다.

4 ·19 직후 서울농대에서 겪은 스무살 때의 아득한 흰 밤길의 한 환상, 민청학련 무렵인 서른세 살 때의 우주에의 흰 길의 한 환상, 재구속되어 옥중에서 백일참선에 돌입했던 서른여덟 살 때의 흰 빛과 검은 그늘의 교차투시, 해남에서 두 계열의 연작시 〈검은 산과 하얀 방〉의 분열구술, 목동 시절의 컴컴하고 침침한 '쉰'의 그늘과 일산 이사 직후의 그 눈이 멀 듯한 〈일산 시첩〉의 흰빛들의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날카로운 모순 대립.

그리하여 단기 4332년 서기 1998년 가을, 한참 율려운동을 제창하던 무렵 어느 한날 낮잠에서 막 깨어날 때 눈앞에 문자계시(文字啓示)와 형상계시(形象啓示)가 나타났다.

한글로 '흰 그늘', 한자로 '백암(白闇)' 영어로는 'White Shadow'였다. 형상은 거뭇거뭇한 한 돌문 안에서 흰빛이 처음으로 배어 나오는 마치 '슈르' 계열의 그림 같았다. 이것이 이른바 '여율적 율려(呂律的 律呂)'라는 것이었다.

나의 책 《율려란 무엇인가?》와 《예감에 가득찬 숲그늘》은 모두 이 '흰 그늘'을 테마로 한 것들이다.

나의 분열은 통합되었는가?

나의 정신병은 치유되었는가?

모른다.

그 뒤에도 환상과 환청, 환영들이 있었으니 지금의 평정을 어찌 항구적이라 믿겠는가? 그렇지만 '흰 그늘'의 계시는 내 정신의 분열, 내 상상력의 균열에 하나의 통합적 근거와 창조적 방향을 주었다.

'흰 그늘'은 나의 미학과 시학의 총괄 테마가 되었다. '흰 그늘'을 통해서 '님'과 '틈'과 '무(無)'와 '신명'과 '한(恨)'과 '이중성' 및 '생성' 등을 이해하고 정지용 시인을, 그리고 신세대를 이해한다.

그 스스로 '흰 그늘'이시었던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선생이 김일부 선생에게 내린 수수께끼 화두인 '그늘이 우주핵을 바꾼다(影動天心月)'의 바로 그 '그늘'은 '흰 그늘'이 아니었을까?

흰 그늘은 후천개벽의 상징이다.

그것은 궁궁(弓弓)이자 태극(太極)이다.

그것은 여율(呂律)이자 율려(律呂)다.

그러매 그것은 협종(夾鍾)이면서 황종(黃鍾)인 '새로운 차원의 본청(本淸)'이다.

'흰그늘'은 생명문화운동의 새 구호(口號)다.

그리고 내 삶이요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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