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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의 '브라더', 철도 노조와 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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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의 '브라더', 철도 노조와 닮았다고?

[철학자의 서재] 라이너 촐의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

다시 책을 펼치다

지난 11월 말, 한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주제였는데 전문가들의 발표를 들은 후, '연대(solidarity)'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철학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일까, 서로 다른 전공 영역 때문일까, 사람들의 질문이 오갈수록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했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뒤풀이까지 마치고 집에 와서 '연대'라는 두 글자를 머릿속에 새긴 채 잠이 들었다.

▲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라이너 촐 지음, 최성환 옮김, 한울 펴냄). ⓒ한울
다음날 책꽂이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전 사놓은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라이너 촐 지음, 최성환 옮김, 한울 펴냄)를 찾아 책장을 펼쳤다. 내 기억에 5년 전 이 책을 살 당시 나는 사람 관계에 지쳐있었다.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다시금 마음을 잡고 사람들과의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구입한 책이었으나 인생살이에 책이 바로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다시 책을 펼쳤다. '연대'의 개념사가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지만 학술서인지라 어렵다. 더군다나 이 책은 재미도 없다. '연대(solidarity)'라는 무거운 주제를 쉽게 전달하고 재미있게 쓰기는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사회철학 전공자도 아닌 사람이 학술서를 소개한다는 부담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이유는 5년 전 번역된 이 책이 오늘날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불편한 시작

그러나 시작부터 불편하다. 충격이 밀려온다. 개념사를 읽다보면 어떤 개념이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르게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연대' 개념도 마찬가지다. 내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연대'라는 개념에 점점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연대 개념은 원래 '연대보증'을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 법에서 유래한다. 연대 개념은 1830~1840년대에 굉장한 이력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공동체의 책임'은 로마법의 전문 용어로서 프랑스 법에서 '연대'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법적인 의미를 유지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저술로 꼽히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는 연대를 "여러 채무자가 그들이 빌렸거나 빚진 액수를 되돌려줄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어떤 의무의 성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1~32쪽)

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연대보증'의 폐해 때문일까?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불리는 '보증'이 곧 '연대'의 어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우면서도 불편하다. 그리고 현실의 기사와 마주쳤을 때 불편함은 가중된다. 인터넷에서 "쌍용차 노조 46억 배상판결"이라는 기사를 접했다. 요지는 지난 2009년 대규모 정리 해고에 반발해 77일간 옥쇄 파업을 벌였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회사와 국가에 46억여 원을 손해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연하지만 연대와 공동체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라고 믿고 있었다. 노조는 노동자라는 약자들의 연대다. 촐이 말하는 '오래된 연대'이자 '기계적 연대'인 노조의 한계가 드러난 것일까? 사회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필자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연대보증'에서 출발한 '연대' 개념에 문제가 이미 배태되어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법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나서서 쌍용차 노조연대에게 46억 '연대보증'을 서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헤이 브라더!

나는 허심자(虛心者)는 못되는 인사다. 책이 어렵다보니 자꾸만 딴생각을 하게 된다. 책 읽기를 잠시 멈추고 영화 한 편을 봤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때는 그 영화가 가진 매력이 많다는 뜻이다. 황정민의 구성진 연기 속에서 또 다른 단서를 찾았다. 영화 <신세계>에서 황정민은 이정재를 부를 때마다 '브라더'를 외친다. "헤이 브라더!"

▲ 영화 <신세계>. ⓒ사나이픽쳐스

'연대' 개념의 형성에도 '브라더'가 중요했다. '연대보증'에서 시작된 '연대' 개념은 '형제애(Brüderlichkeit)'를 통해 그 도덕적 의미가 확충된다.

처음에는 형제애였다.(51쪽)

물론 깡패의 형제애가 '연대' 개념 형성의 형제애와 도덕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황정민은 이정재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지 못하고 살려둔다. 영화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실은 그들의 형제애가 긴 시간적 유대를 통해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형제애가 '연대' 개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형제' 개념이 오랜 시간 동안 문화적으로 반영되며 공유하는 감정의 원칙으로서 형제애가 탄생했고 '연대' 개념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후 '연대'라는 개념은 차츰 우리가 추상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개념으로 변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연대라는 단어는 1830~1840년대에 사회적 집결의 의미로 도입되었고, 1860년대에 이르러 노동자 연대라는 의미가 관철되었다.(69쪽)"

새로운 연대를 꿈꾸는 사회철학자들의 고민

이유야 어찌됐던 '연대'라는 개념을 떠 올리면 노조가 먼저 생각이 나는 것은 '연대'라는 단어가 노동자를 중심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에서 노조 관련 소식을 듣는 것이 불편하다. 전교조 문제를 비롯해서 철도 노조까지 지지와 반대의 목소리가 각종 소식통에서 흘러나온다. 촐이 지적하듯 '기계적 연대'를 넘어서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일까?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유기적 연대'가 더욱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술대회에서도 '잉여'들의 연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문득 술자리에서 노동자도 되지 못하는 '잉여'들의 연대를 얘기하던 선배의 모습이 떠오른다. 새로운 유기적 연대는 '잉여'들도 포함한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연대(solidarity)'라는 사회철학적인 개념을 잘 알지 못한다. 책을 읽고 어느 정도의 단편적인 지식만을 습득했을 뿐이다. 책을 다시 읽게 된 동기가 학술대회에서 논의되는 '연대' 개념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시대 새로운 연대를 꿈꾸는 사회철학자들의 실천 노력이 부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역자 서문에도 사회철학자들의 고민이 담긴 글귀가 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하면서도 사회적 안전망과 같은 연대의 틀을 부단히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인간적·사회적 연대가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11쪽)

학술대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한 사회철학자들도 같은 고민 속에 있었다. 약자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안전망으로서의 연대가 점점 약화되는 현실 속에서 '연대'에 대한 고민이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라이너 촐이 오래된 연대를 넘어 새로운 연대를 얘기하는 것도, '기계적 연대'를 넘어 '유기적 연대'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도, 이 시대에 필요한 연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비록 사회철학자들의 속 깊은 고민은 잘 몰라도 그들의 부단한 노력이 나를 "오늘날 진정 필요한 연대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빠지도록 만든다.

무식하게 연대(solidarity)를 이해하는 자의 변명

책 읽기는 항상 독자의 지식수준을 반영한다. 내 지식이 일천한 것이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서술을 하는 것이 편한 법이다. 물론 원문을 오독한 것으로 치부될지라도 말이다.

사회철학자들의 '연대' 문제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그것을 진사회성(eusociality) 문제로 파악했다. 인간은 지구에 사는 생물 중 사회성이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 중 하나다. 그런데 인간의 진사회성은 다른 동물과 차이가 있다. '혈연공동체'를 넘어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게랄트 휘터의 표현을 빌리면 그 집단(community)은 '고난공동체'와 '불안공동체'다.

'고난공동체'는 전시와 재건의 시대, 또는 자연재해를 당한 직후에 인간이 보여주는 공동체의 특징이다. '불안공동체'는 주관적인 불안 요인들로 인해 그 불안요인을 막고자 형성되는 공동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고난공동체'의 연장선에 있다. '불안공동체'는 그 형태가 너무나 다양하고 많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대부분 '불안공동체'의 속성을 지닌다. 문제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에 있다. 매일 같이 뉴스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기사를 본다. 그 불안을 조장하고 확장하려는 세력들도 가끔 눈에 보인다. 불안요인이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불안요인이 제거되면 연대도 사라질까? 아니면 또 다른 연대가 생겨날까? 연대는 사회적 안전망일까? 불안으로 비롯된 공동체에 불과할까?

오랜만에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배우고 있는 것으로 글을 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영역을 이해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 진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가 아프다. 역시 자신을 수준을 넘어서 뭔가를 이해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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