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2014년 신년호로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나오길 바라는 미래의 책들에 대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일곱 명의 필자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책, 당신이 읽고 싶은 책, 번역되길 바라는 책과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울러 지난해 12월 13일 송년호에서 예고했던 페이지 개편은 기술적인 문제로 1월 17일부터 구현됩니다. 예고한 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 여러분, 2014년에도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묶여 따로 살다
우리는 집단을 이루고 그것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집단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는 고유한 개체로 삶을 영위한다.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개체라는 규정을 떼어버릴 수도 없다. 집단성과 개체성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의 실질이자 그것을 구성하는 두 축이다. 어느 하나만을 강조할 수도 없거니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대한 심층적 접근은 양자 공존의 불가피성과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한다.
집단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개인의 성향이나 특징·욕망·가치관·삶에 대한 편향적 이해로 이어진다. 우리는 집단과 관계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유함을 유지하거나 발전시켜 나간다. 집단에 의한 피규정성이나 그 구성원 간 집단 유사성만 고집할수록, 차별화의 계기를 그 자체로 안고 있는 개체성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자기인식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인간은 자신에게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자신을 인식과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자기 생각과 몸과 행동을 통제할 수도 있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주체로 여기는 경향도 강하다. 집단과 연관되어 있거나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동조를 얻기보다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개별성에만 매달리는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우선 한 개인이 속한 집단은 물론이고 그 구성원 간 집단 유사성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강하게 나타날 수도 약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집단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조차 부정하는 것은 개인에게 미치는 집단의 영향력을 아예 배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로 균형 잡힌 자기인식이나 자기반성은커녕, 과도한 주체성·능동성·자주성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집단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그 구성원 간 집단 유사성을 외면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집단성의 경시는 온전한 자기성찰을 위협하는 치명적 함정을 잉태한다.
공존의 방식과 양상은 무엇보다 개인과 연관된 집단의 성격과 범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집단은 집단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다양한 차원과 종류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거나 주고 있는 집단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집단 지향성(의도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모두 포함)의 대상이 되는 집단도 가족·직업·성별·이익, 친구 혹은 또래·장애인·학교·사제지간·학문 혹은 사상·정치·지역·민족·국가·인종·인류·생명체 등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이처럼 복수의 그리고 서로 겹치는 집단과 관계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큰 영향을 미치는 집단, 강한 지향성을 보이는 집단, 제어 혹은 통제 가능한 집단의 인지 등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밖으로 안을 보다
▲ <오체 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창해 펴냄). ⓒ창해 |
출간 후 좋은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 자신 역시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쿠라다 쥰의 문제제기는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하다(이 이야기는 오토다케 히토타다의 다음 책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전경빈 옮김. 창해 펴냄)에 실렸다). 집단성과 개체성의 문제 해법에 유의미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까닭이다.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는 곱씹어볼 만하다.
하나는 <오체 불만족>의 성공 배경에 대한 그의 불편한 지적이다. 요컨대 '다른 세계에서(장애인) 보내는 통신'에서 보이기 마련인 '어두움·그늘·괴로움' 대신에, '밝음·양지·즐거움'이란 부분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 성공 이유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이 장애인의 '어두움·그늘·괴로움'을 덮어버림으로써, 그 반향이 장애인에 대한 새롭지만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우려이다.(<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141~142쪽)
사쿠라다는 이 책의 이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말마따나 새로운 형태의 장애인 통신은 상업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오토다케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저 썼을 뿐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자기 입맛대로 써 먹을 수'있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그 책의 성공은 마냥 좋은 것이 아닐지 모른다. 장애인의 실상과 고통을 덮어버리는 데 일조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약화시키거나, 새로운 편견을 만들어내는 한 원인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오토다케 자신도 후속작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에서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오체 불만족>이 크게 성공하자 그것이 미칠 파장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쿠라다가 말하는 새로운 고정 관념은 오토다케 자신의 성장 및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그의 가치관에 기인한다. 오토다케처럼 열심히 노력해 성취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어느 정도 환상을 갖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집단을 과소평가하거나 그것과의 동일시를 강하게 거부하곤 한다. 주체성과 자기인정을 넘어 자기중심성이 강해질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자수성가형이 종종'밖의 힘'을 놓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혹여 이런 연유로 오토다케가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에게서 상대적으로 자주 혹은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는 성격적·정서적 문제를 그들 개인 탓으로 돌린다면, 편협함의 때를 벗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성취감과 자립심이 약하다 해서 그것을 그들 개인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에도 역시 그렇다.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 물리적 장벽, 마음의 벽, 심리적 위축과 좌절 등은 그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곤 한다. 그들 역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온 개인일 터, 고통의 크기, 삶의 무게, 의지력의 정도, 희망의 가능성 등은 서로 다를 것이다. 역경에 맞서 싸워 이기는 사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자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사람도, 동정을 구걸하거나 고통을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저 다양한 차이를 가진 개인'으로 덮을 수는 없다. 굳이 사회적 차원에서 그들을 배려하고 조력해야 할 필연성이 사라질 수 있다. 오토다케 역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이런 '그저 다양한 차이'에만 주목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모양으로 색을 놓치다
오토다케는 유난히 개체성을 강조한다. 그 성격이나 종류를 막론하고 집단 그 자체에 대한 귀속감이 강하지 않았으며 의식적인 집단 지향성 자체는 아예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쿠라다의 발언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력이나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집단을 기준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그다. 장애인이라는 요소에 그를 과하게 얽매는 것도, 그것에 얽매이는 것도 강하게 마다한다. 장애라는 요소가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없으며, 심지어 친절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장애인에게는 동정조차 필요 없다고 한다. "혹시라도 그 장애인이 '차별하지 말라'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분명하게 가르쳐주기 바란다. '네 성격이 나쁘기 때문이야.'"(<오체 불만족>, 280쪽)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자립, 도전, 열린 마음 역시 오토다케가 늘 강조하던 덕목이었다. 장애가 장벽이 될 수도 있지만 장애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의존하려는 마음이 더 큰 방해물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물론 그 자신이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무언가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강하게 경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스스로의 노력과 도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지 모르며 어떤 흥미로 어떤 도전을 할지 어떤 가치를 지향할지 확신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지속적 실험의 의지를 다질 뿐이라고 역설한다. 장애 여부를 떠나 누구라도 보여주기 쉽지 않은 패기와 적극성이요, 도전정신과 모험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천부적이라 할 만한 긍정성과 낙천성 역시 그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대개 장애를 고통의 원천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만, 그는 달랐다. 사쿠라다를 재반박하면서 자신은 장애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사쿠라다의 말처럼 그에게서 '어두움·그늘·괴로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애와 그로 인한 고통을 대하는 태도가 여느 장애인하고 달랐던 탓이리라.
저 정도의 긍정적 태도가 그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인지 그리고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의문을 유보한다면, 그가 사쿠라다와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장애인이지만 "사쿠라다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147쪽)라는 확언도 수용해야 할 성싶다.
▲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창해 펴냄). ⓒ창해 |
그는 어쩌면 유독 튀지만 넓게 보면 가끔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거나 혹은 그것에 전면적으로 어긋나지 않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삶을 음미하고 즐기는 그리 흔하지 않은 유형 말이다.
장애인 세계에서 보내는 통신이 모두 똑같을 이유는 없다. 발신자가 서로 다른 개인인 탓에, 모두가 어두움·역경·불행의 이미지로 자신들의 삶을 표현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동일하거나 흡사한 색깔로 자신들의 삶을 포장할 필요도 없다. 한 개인을 그와 연결된 특정 집단에 강하게 결속시키거나 그것에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면, 집단 정체성이나 집단 유사성으로 그를 평가하기는 쉽다. 그것에 어긋나는 개인의 언행을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인의 잠재력이나 주체성, 개성을 외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면 극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누군가가 평범하지 않게 장애를 즐기고 있다고 솔직하게 선언한다면, 평범한 시각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이 과연 충분할까.
화가라고 잘 그릴까
스스로 화가가 되어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는 일은 정말 소중하다. 오토다케는 분명 훌륭한 인생 화가이다. 심각한 장애가 무색하게도 그는 온갖 영역에 도전해왔다. 야구, 줄넘기, 달리기, 산행, 수영, 농구(휠체어가 아닌 맨몸으로), 문화실행위원, 미식축구, 영화 제작 및 감독, 사회운동, 해외여행, 강연, 방송 활동(취재, 편집, 리포팅) 등. 실로 놀랍다. 이 삶의 방식과 여정이 그의 정체성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인간의 자기실현은 무릇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거짓으로 이익을 취하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그려간다. 그것을 의도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반복되는 특정 유형의 삶은 개인의 정체성 및 자기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거시 및 미시 환경은 때론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더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오토다케에게 장애 환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자립심과 자립 능력을 키워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지혜로운 부모와 선생님,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았던 가정, 뛰어난 운동 신경 등의 생물학적 요인, 높은 지능, 왕따는커녕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친구들, 나아가 그를 배척하거나 방해하지 않았던 교육 및 사회 환경도 존재한다.
청소년기까지의 성장 환경은 특히 개인의 감성과 정서, 가치관과 인격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초년기의 부모와 선생님은 더욱 그렇다.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밀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치관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탓이다. 오토다케 자신도 이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성격과 정서, 인격과 행동 양식에 성장 환경이 어떻게 얼마큼 영향을 끼쳤는지 심층적으로 파헤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한 축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나 진배없다.
특정 집단(들)은 개별적이거나 복합적으로 개인의 정서, 생각, 행동, 정체성에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는 집단성을 중시하는 입장의 요지이기도 하다. 오토다케는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이를 모르고 있음 자체가 그에게 큰 힘을 행사한 집단(들)의 존재 때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근원적이거나 내밀한 것, 당연하거나 진부한 것의 힘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 마련이니까.
이런 경우 통상 개체 중심 정체성을 옹호하고, 그것이 개인의 자기인식을 좌우한다. 집단 정체성이나 집단 유사성에 대한 심층적인 접근은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다. 장애인에 대한 오토다케의 판단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장애 환경을 쉽게 여기거나 그것에 얽매이는 게 싫어 집단성 자체를 배격한다면, 솥뚜껑 보고 웃은 마음 자라 보고 비웃는 격이 아니겠는가.
노력 자체보다는 때론 그 향방에 관심과 열정을 쏟는 게 우선이다. 집단성과 개체성의 관계 설정 방식이 자아 정체성 및 자기인식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두서없는 맹목만큼이나 갈피 잃은 열정 역시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자아 정체성 형성이나 자기인식에 도달하려는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집단성과 개체성 중 하나를 부정하는 상황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러한 노력 자체에 대한 과도한 신뢰 이전에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가늠해야 한다. 이를 받침 삼아 자기반성·자기통제 능력을 잘 발휘하면서 하고 싶어 하거나 해야 하는 일에 전념하면 될 터이다. 성숙 없는 열정은 성숙으로 향하지 않는 열정만큼이나 성숙에겐 적이다.
20대 초반에 쓴 <오체 불만족>이나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를 기준으로 오토다케를 평가하는 것은 분명 섣부르다. 다양한 경험과 모험을 즐기며 열정적인 집중과 집요함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그다. 개방적 시선이 온당해 보인다. 집단성의 심층에 좀 더 근접하여 집단성과 개체성의 공존을 모색한다면, 정체성 및 자기인식 문제에 반성의 깊이와 폭을 확장하는 일은 그에게 어려운 과제가 아닌 듯하다. 그의 성향과 지성 역시 자신의 심각한 장애와 연관된 사회적, 물리적, 사회 심리적 환경의 끈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토다케라면, 사쿠라다의 날선 비판이 계속해서 빛을 발하도록 내버려둘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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