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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온다…이제 체념하자!

[장석준 칼럼] 가을을 산다는 것

가을이 지나가고 벌써 겨울이 찾아왔다. 여름 끝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금세 찬바람이 밀려온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가을은 이렇게 짧기만 하다. 이것도 다 인간 문명이 판도라의 상자마냥 열어젖힌 기후 변화 가속화 때문이라는데, 아무튼 짧아지니 더 사무친다. 올해는 유독 그렇다. 하도 어이없는 일들, 가슴 아픈 일들이 이어진 탓에 저물어가는 가을이 더 야속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름의 뒷자락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가을 초입을 짧은 책 한 권 쓰는 데 보냈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운동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왔고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짚어보는 책이다(책세상 발간 예정). 입문서 성격의 책이라지만 주제가 무려 '사회주의'인지라 써내려가기 쉽지 않았다. 덕분에 내게 이번 가을은 더욱 빨리 스치고 지나간 셈이다.

그런데 길지 않은 지면으로나마 19세기부터 200여 년간의 역사를 훑어 내려가다 보니, 문명의 성쇠를 계절의 변화에 빗대는 (어쩌면 상투적인) 논리가 새삼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봄'이라는 말 외에 더 나은 비유를 찾을 수 없는 시기가 눈에 보였고 그 다음은 영락없이 '여름'의 시절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의 역사가 그러했고, 그래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고 등장한 이념-운동 역시 각 시기마다 다른 색깔을 띠곤 했다.

영국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탄생해 유럽, 북미 등 세계 곳곳으로 퍼지던 19세기는 자본주의 문명의 '봄'이었다. 이 무렵 산업 사회는 마치 꽃봉오리들이 처음 피어올라 막 세상을 향해 열리려 할 때처럼 수많은 미지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처럼 보였다. 인생에 비유한다면, 청년기라고나 할까. 물론 이때부터 이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지배자, 특권층으로 상승할 기회인 것이 훨씬 더 많은 다른 이들에게는 전에 없던 고통의 강요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조차, 아직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까지 포함한 대다수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근대 문명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었다. 청년기에 흔히 볼 수 있는 건강한 몽상과 열정, 패기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뒤이은 시대, 즉 장마철의 모진 비바람과도 같았던 20세기 초의 대혼란을 뚫고 등장한 한 세월은 자본주의 문명의 '여름'이었다. 여름은 봄에 싹을 틔운 생명이 한창 끝없이 뻗어나가는 계절이다. 이 시기의 자본주의가 꼭 그러했다. 한때 나락에 빠지는 줄만 알았던 산업 자본주의는 전례 없는 성장의 질주를 벌였다. 자원의 소비와 총산출량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끼치는 영향 모두 그 확장의 속도를 배로 높였다. 이러한 성장이 누군가에게는 실제 번영으로 다가온 반면 더 많은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질시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미래의 목표였지만 말이다.

이 계절에는 사회주의조차도 성장과 풍요의 약속, 그것이었다. 자유주의 국가 체계에 적응한 서구 사회민주주의든 1930년대 소련의 고속 성장 경험을 반복하고자 한 국가 사회주의 체제들이든 모두 '저들'의 여름을 '우리'의 여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와 의지, 고투에 다름 아니었다. 소수만 맛보는 성장의 과실을 다수 대중의 것으로 만들겠다거나 자본주의 중심부의 번영을 우리 민족/국민도 누려보겠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추격의 대다수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이 여름의 끝자락에 한국은 번영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아주 예외적인 성공 사례였다. 자본주의적 권력 독점의 가장 벌거벗은 형태에다 국가 사회주의의 일부 요소들까지 버무린 돌진적 실험을 통해 이게 가능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실험을 주도한 정권을 신화의 주인공마냥 떠받드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이런 유의 실험이 낳을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후유증에 항거하고 있다.

아무튼 한국은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한여름의 열기에 함께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여름은 이제 끝나버린 것 같다. 나름 짧지 않은 시간을 명멸했던 이 여름의 여진도 이제는 생명력을 다해간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다가오는 새 시대는 자본주의 문명의 '가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이제 '가을'을 살아간다는 것을 캐묻고 이를 실감하며 거기에 적응해가야 하는 게 아닐까.

가을에 여름과 같은 성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가을은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마감하고 안으로 무르익는 때이다. 봄처럼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꿈꿀 수도 없다. 세상은 이미 상당한 시간을 거친 뒤다. 다시 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등장했던 여러 가능성들 중 채 만개하지 못한 것들을 얼마간 되살리는 정도다.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산의 때다.

이 익숙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자면 우리에게는 어떤 삶의 자세가 필요할까? 봄의 저 '몽상'도 아니고 방금 막 지나간 여름의 그 '추격'도 아닌 어떤 공동의 윤리가 요청되는 것일까? 나는 칼 폴라니의 대작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의 맨 마지막 결론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이 대목에서 폴라니는 뜻밖에도 "체념"을 말한다. 체념이라니, 너무 염세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나도 오랫동안 선뜻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길지만, <거대한 전환>의 마지막 문단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은 언젠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진리 앞에서 스스로를 체념했고, 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예전에 믿었던 모습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불평 없이 묵묵하게 받아들인 이상,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불의와 비(非)자유라면 모조리 제거해내고 말겠다는 그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 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홍기빈 옮김, 길 펴냄, 2009년), 604쪽)

우리의 일상어에서 '체념(諦念)'은 '좌절'의 동의어로 읽히지만, 본래 이 말은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의 '생각하고 바라는 바'(염, 念)를 '살핀다'(체, 諦)는 것이다. 어떤 망념들은 과감히 끊어버림으로써 오히려 정말 생각하고 바라야 할 바를 제대로 염원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정한 자유를 위한 결단이다.

이런 체념으로부터 새롭게 출발하지 않는다면, '가을'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우리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 한국인들은 방금 전까지 늦여름의 성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지난 계절의 기억을 떨치기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사실상의 핵무기(핵발전소)를 머리에 인 채 살 수밖에 없다는 억설이나, 노골적으로 북한을 내부 식민지 삼아 '여름'을 다시 불러내보자는 망상이 좀처럼 힘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체념'의 서늘한 바람은.

어쩌면 인간사의 '가을'도 기후 변화 이후의 가을처럼 쏜살같이 지나가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가을을 거쳐 겨울을 맞이한다는 것의 고마움을 뒤늦게 한탄하게 될지 모른다. 가을을 알차게 보냄으로써 설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축제로 겨울을 춥지 않게 지새웠던 선조들을 애타게 부러워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가을을 건너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 낯선 새 시대를 맞이할 채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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