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이 철도노조 대표를 면담해 설득한 적이 있느냐'는 신계륜 환노위원장의 질문에 방 장관은 "실무자들이 만났다"고 했다. 장관은 물론이고 고용노동부 국·과장 중에서도 경찰의 침탈 현장에 갔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용노동부 장관이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중재를 해도 모자랄 주무 장관이 민주노조의 심장부가 유린되는 초유의 사태를 뒷짐 지고 불구경했다는 얘기다.
민주당 은수미 의원은 "정부가 떼강도로 돌변한 사건"이라고 했고,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소신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이런 사태를 사전에 알지도 못했다는 장관부터 경질해야 한다"고 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조차 "경찰이 5000명을 동원해 추태를 부린 것은 정부의 잘못"(최봉홍)이라고 했고, "노동부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것은 비판 받아 싸다"(김성태)라고 했다. 그러나 주무장관이 입도 벙긋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노총 침탈 사건의 모든 시나리오가 청와대로부터 시작됐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민주노총과 경향신문사에 재산상의 피해에 대해 변상하겠다는 이성한 경찰청장의 뒤늦은 수습으로 박근혜 정부가 표방하는 '법과 원칙'의 맨얼굴이 가려질 리도 없다.
그야말로 화약고를 건드렸고 벌집을 쑤셨다. 민주노총이 총파업 방침을 밝힌데 이어 한국노총마저 박근혜 정부의 노동계 적대를 비판하며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이 이날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나가야 한다"고 한 당부는 자가당착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노총이 탈퇴해 반쪽짜리이던 노사정위에서 한국노총마저 빠지면 통상임금 문제 등 노동 정책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불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와 노동계의 끈이 모두 단절되면 남은 수순은 전면전뿐이다.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명분 없는 진압이 노동계 전체를 적으로 돌린 꼴이다.
▲ 민주노총이 있는 경향신문 건물은 경찰의 난입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프레시안(최형락) |
초유의 공권력 난동으로 최악의 노정 갈등에 불을 질러놓고도 정부는 좀체 생각을 교정할 것 같지 않다. 방하남 장관이 국회에서 질책을 받는 동안 박 대통령은 철도파업에 대해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원칙 없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간다면 우리 경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 수석들에게는 "어려울 때일수록 원칙을 지키라"는 지침도 내렸다. '무관용'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뜻이다. 철도노조 손보기가 '비정상의 정상화'이며, 비정상의 정상화는 "숫자에 상관없이 하나라도 비정상의 뿌리가 완전히 뽑힐 때까지 끝까지 추진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박 대통령의 논리 구조에 양보가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임기 내내 추진할 과제라고 했으니 해가 바뀌어도 박 대통령은 그대로일 것이다. 신년 메시지의 예고편일까. 박 대통령은 2014년 갑오년을 염두에 두고 '120년 만의 갑오경장'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웠다. "120년 전의 경장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꼭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성공하는 경장의 미래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박 대통령이 친절하게 풀이했듯이 '경장(更張)'은 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팽팽하게 조인다는 뜻의 '해현경장(解弦更張)'이란 말에서 나왔다. 내년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명목으로 질서와 의식과 제도를 더욱 대대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암시다.
'박근혜의 갑오경장'이 어떤 성격일지는 임기 첫해를 돌아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이번 노동계 사태에서 여실히 보여준 바, 반대세력의 뿌리를 뽑고야 말겠다는 가차 없는 공포정치다. '종북'을 남발해 사상을 옥죄고, 교과서를 갈아엎어 학생들을 이승만-박정희 신봉자로 만드는 과업이다. 유신헌법을 기초한 인물을 비서실장으로 두고 새마을운동을 나라가 살 길이라고 갈파하는 시대역행이다. 오죽하면 교수신문이 올 한해를 특징짓는 사자성어로 '도행역시(倒行逆施 :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를 뽑았을까.
그래도 이 갑오경장이 성공할까? 민주노총은 28일 총파업과 함께 정권 퇴진 투쟁을 예고했다. 원격진료와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보건의료계도 내년 1월 총파업을 벌이기로 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분노를 꾹꾹 참아온 서민들도 민영화 의혹을 계기로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학가에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한창이다. 이러다간 거문고 줄이 아예 끊겨나갈 판.
민주당 허영일 부대변인이 "1894년 갑오년에는 갑오경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학혁명도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논평했다. 120년 전 그해에도 조선 정부의 수탈에 일본으로 곡물까지 빠져나가면서 삶이 더욱 피폐해진 백성들은 '사람이 하늘이다'라며 들고 일어섰다. 공포정치와 철도-의료 민영화 논란으로 맞게 될 2014년의 기운은 여러모로 갑오 농민 봉기를 더 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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