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문산 정상. 조망이 시원하다. ⓒ백두대간학교 |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단 한 번도 끊이지 않고 호호탕탕 흘러온 백두대간 약 1,625km 산줄기에는 우리나라 12종산을 비롯한 높고 깊은 명산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등줄기를 이루는 이 산줄기에도 쉬어 가려는 듯 머무르려는 듯 대간의 기세가 미약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중화지구'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황악산과 속리산 사이, 추풍령에서 화령재까지의 구간이 그곳입니다. 1,000m 이상의 산이 없어 사람들이 드나들기도 쉬워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곳도 많은 곳입니다. 표고가 낮으면서도 기온 차가 3~5도 나는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인해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습니다.
중화지구의 시작이며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이자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인 추풍령은 해발 221m, 자병산과 함께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훼손지인 금산은 해발 370m이고, 산행 구간에 속하는 용문산과 국수봉은 각각 710m와 763m에 불과합니다. 큰 부담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산과 숲을 느낄 수 있는 구간입니다. 이처럼 중화지구는 백두대간이지만 낮은 산줄기로 인해 천연의 국경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국시대 때부터 전쟁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달의 산행은 중화지구의 일부인 작점고개에서 시작하여 용문산, 국수봉을 지나 큰재로 내려서는 약 11km의 구간입니다. 산행 전 금산에 잠시 머무를 예정입니다. 금산 산행은 바라보는 것으로 걸음을 대신하려 합니다. 무너져 사라져 버린 금산을 온전히 보기 위함입니다. 백두대간에 속해 있는 금산은 석회석 광산이 들어서 산 전체가 사라져 버린 자병산과 함께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훼손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채석장 개발로 인해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19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 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이고 폭파되어 사라진 것입니다.
한반도라고 불리는 이 땅의 시작이며 생태축이라고 하는 백두대간의 오늘날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습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고 말해도 될 만큼 손상을 입었습니다. 지리산의 생태계를 단절시킨 성삼재 도로와 양수발전소, 덕유산국립공원에 들어선 스키장과 골프장 등의 대규모 위락시설을 갖춘 무주 리조트, 육십령에 들어선 채석장, 민족의 영산이라 할 수 있는 태백산에 들어선 대규모 폭격 훈련장인 한미 합동 공군훈련장, 희귀식물이 많은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 자병산의 한라시멘트 석회광산, 약 200~300평의 숲을 갈아엎어야 1기를 세울 수 있다는 줄 지어 늘어선 송전탑들, 수많은 희귀식물과 법정보호식물, 천연기념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천연림보호구역인 점봉산에 들어선 양수댐, 해당 지역이 자연경관과 생태를 고려하지 않고 개설되고 있는 임업도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생태적 고려 없이 시행되는 국가의 정책과 자본의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자연을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개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가치관의 결과입니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지 않고 철저히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가치관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극복할 때에만 백두대간을 비롯한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라 부르는 이 땅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우리 민족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자연을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으로 객체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생명을 낳아주고 품어주는 신성한 주체로 믿고 섬겨 왔습니다. 자연을 사람과 같은 인격체 또는 그 이상의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하였습니다.
산을 한갓 산으로 보지 않고 바다를 한갓 바다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산에는 산을 지배하는 산의 신령이 있고 바다에는 바다를 지배하는 바다의 신령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신령들은 자연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품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길흉화복도 관장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을 경외하였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곧 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의 이러한 인식을 오늘날 우리는 잃어버렸습니다. 개발 논리와 성장 정책에 의해 빼앗겼습니다. 그 결과 산과 자연에 대한 훼손과 파괴는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산과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일은 산에 깃들어 사는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 마을 공동체와 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파괴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구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규정한 제임스 러브로크의 '가이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고 산은 모든 생명을 품어 살아가게 하는 신성한 생명의 터전이며 모태입니다. 따라서 산을 살아 있는 신성한 생명체로 여기는 산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한갓 미신이 아니라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섣부른 자연과학적 사고보다 한 단계 앞선 초과학적인 인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생태학적 이치에 입각한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세계관인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산행은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금산을 둘러본 후 작점고개로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합니다. 이 달의 산행구간은 말씀 드린 것처럼 중화지구에 속한 구간으로 높은 산이 없습니다. 따라서 산과 숲을 느끼며 산길 걷기에 참으로 좋은 구간입니다.
길이란 걷는 자들만의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지나지 않으면 수풀이 우거져 곧 길이 아니게 됩니다. 사람 지나는 곳이 곧 길이 됩니다. 길은 걸을 때에만 길이 됩니다. 길이란 걷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때로 고행이 따르기도 하지만요. 걷는다는 것은 내 몸, 내 감각으로 자연과 만나는 것입니다. 자연과 홀로, 온 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행위가 바로 걷기입니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느끼고 나누는 것입니다. 새소리, 풀잎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하늘의 움직임, 땅의 온기 등 그 모든 것들을 듣고 느끼고 나누는 것입니다.
작고 아늑한 작점고개에서 발걸음을 떼시어 용문산과 국수봉을 지나는 중화지구의 아늑하고 편안한 산길을 지나시며 자연과 더불어 마음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산행코스 : 작점고개-용문산-국수봉-큰재(금산 및 <백두대간숲생태원> 관람)
-산행거리 : 약 11km
-소요시간 : 약 8시간(금산, <생태원> 관람 시간 및 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난 이 도 : 하(★)
▲<용문산 구간> 산행 지도 |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30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 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30 추풍령 복돼지식당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340-2/043-742-2550) 도착
아침식사 및 도시락 싸기
아침 메뉴 : 시원한 콩나물국
06:30 산행 안내 및 등반 교육
07:00 금산 : 백두대간 파괴의 현장 체험
07:40 작점고개 도착 : 스트레칭
08:00 작전고개 산행 출발
08:40 무좌골산
09:20 갈현
10:50 용문산
11:00 헬기장에서 옹기종기 모여 점심 식사
13:30 국수봉
14:30 큰재 도착 : 산행 마감/스트레칭
14:30 ~ 15:00 <백두대간숲생태원> 관람
15:30 부산식당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내/043-732-3478) 도착
옥천 별미 도리뱅뱅이와 올갱이해장국, 막걸리로 뒤풀이
17:00 서울로 출발
19:0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스패츠,
아이젠, 얼굴가리개, 그리고 반드시 빈 도시락과 수저를 가져오세요.
[산행자료]
[추풍령]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 경부선 중의 최고점으로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한국의 중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룸. 높이 221m. 낮고 완만한 고개지만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옛날부터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며,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의 추풍령역이 있고, 4번 국도가 통하며,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점으로 추풍령휴게소가 있다. 추풍령에서 갈재구간 산행기점인 당마루 새마을 앞에 추풍령 표석이 있다. 추풍령 표석은 88올림픽 성화봉송로를 기념으로 1988년 9월 5일 영동군에서 세운 것으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이라는, 가수 남상규씨의 노래 구절을 적어 놓았다.
그 옛날 남쪽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기 위해 또는 장사를 하려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또는 등짐을 짊어지고 달구지를 끌며 이 산등성이를 넘어 다녔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언 발을 절룩거리며 이 고개를 넘어 남으로 한 많은 피난길을 떠났을 것이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추풍(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추풍(秋風)으로 불리고 있다.
-군사적 요충지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추풍령 오룡동에서 의병 2천 명을 이끌고 왜장 구로다 나까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2만 명을 맞아 분전 끝에 물리쳤고(1차 전투), 다시 밀려온 4만 명의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장지현은 영동의 매천리에서 태어나 한때 관서의 변방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이미 한양의 성문을 열어젖히던 임진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영남과 호서의 접경, 당마루
추풍령 면소재지가 있는 작은 산읍이다. 본래는 경상도의 금산군(김천)을 따르던 마을인데 1906년에 충북의 황간군이 되었다가 훗날 황금면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동군이 되었다. 오늘날엔 지방 자치가 되어 황금면보다는 추풍령면이 두루 소문을 얻기에 이롭다고 그렇게 바꾼 것이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이 으레 그렇듯 물이 적어 불편하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여 곡식보다는 과수가 잘 된다. 물이 적고 토지가 메마르던 옛날에는 그저 메밀 농사가 고작이었다. 고갯마루가 온통 새 하얀 메밀꽃이었으니 추풍령의 다른 이름 백령(白嶺)은 그리하여 생겨났다. 일제시대 사기점 골짜기에 저수지를 파 겨우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제는 너나없이 작파하고 밭이란 밭은 모두 포도가 주업이다.
명색이야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를 넘는다. 소문난 고개치고는 별 볼거리가 마뜩찮고 흔한 당집이나 당목 한 그루도 없는데 웬 일인지 마을의 이름만은 예로부터 당마루라 불렀다. 마을을 둘로 쪼개어 경상도와 충청도가 나뉘었으니 당마루 역시 경북의 당마루와 충북의 당마루가 서로 생겨났다. 반쪽은 김천 시민이요, 반쪽은 영동 군민이다.
고갯마루에 배나무를 심은 작은 언덕 밭이 옛날 주막이 있던 자리다. 배나무 밭이 끝나는 밭둑에 도계를 알리는 경계석이 서 있는데 그 기둥 돌을 사이에 두고 한때는 경상도 주막과 충청도 주막이 나란히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이 아쉬운 경북의 술꾼들이 당마루에 올라와 경상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가 없는 충북 주막으로 건너오곤 했다는 일화는 두루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추풍령은 언제나 그렇게 구름이 모여들고 바람이 술렁대는 고개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官路)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기차가 으레 빠짐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까닭이야 숨 가쁘게 고갯길을 넘은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곳이니 기차인들 그 냥 갈 수 없었을 터이다. 마땅히 역은 번창하고 많은 일본인이 모여 살았던 탓에 유곽의 규모 또한 매우 컸다고 한다.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온 목탄차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바로 추풍령이었다.
-내륙 한양 길의 절반, 반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오늘날에 이른바 영남대로라 부르는 문경 새재 길에 견줄 만큼 추풍령 길의 통행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조위의 글은 그 목적이 금산군 동헌의 중수기였던 탓에 일정한 지역에 대한 부풀림의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추풍령 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 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
가령,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 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5로와, 천안, 공주로 이어지는 제6로에서 각각 지로(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로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청주를 경유할 때'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과 일본의 사신은 물론 영남과 한양을 오가는 나그네에게 있어 추풍령은 그저 하나의 사이 길에 불과하였고, 그것은 언제나 특별한 목적이나 형편에 따른 선택의 문제였다.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10리 남짓한 신안리에는 반고개란 이름의 고개가 있다. 추풍령에서 모동으로 넘는 고개인데 오랫동안 발길이 드물다가 최근에 포장길을 내어 두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부쩍 늘었다. 신안리 사람들은 지금도 반고개가 한양과 부산 길의 절반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믿는다. 마을이란 으레 저마다의 유래와 신앙을 갖추기 마련이니 이는 반드시 깊이 따져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다. 또한, 지금이야 경부선을 중심으로 대전과 대구, 경주를 연결하는 4번 국도가 추풍령에서 황간과 영동을 지나 대전으로 통하지만, 옛길은 분명 추풍령에서 북쪽으로 반고개를 넘어 보은과 청주로 올라갔다. 어떤 경로이건 추풍령을 넘었다면 그 길이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으뜸 쉼터
추풍령을 두고 흔히 말하기를,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라 하는 것은 다만 오늘날의 이야기다. 그 길이 그만한 대접을 받게 된 까닭은 올곧게 경부선 철길과 경부고속도로 덕택이다. 역마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로 바뀌면서 전에는 볼품없던 고을이 번성하고, 전에는 번거롭던 고을이 그저 한적한 시골로 변하였다. 충주와 청주가 서로 그 운명을 바꾸었고 공주와 대전이 또한 그러하였다.
추풍령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이라는 이유와 경부고속도로가 넘는 가장 큰 고개(사실은 작은 언덕이라 해야 옳지만)라는 까닭이 뭉쳐 바야흐로 오늘날 가장 부산한 고갯마루가 되었다. 그 분수령은 변함없이 백두대간이다. 옛날엔 영남대로로 백두대간을 넘어가던 문경 새재가 조선 팔도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엔 경부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추풍령이 당연히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는 셈이다. 인물의 역사가 반드시 그 됨됨이의 깊이와 넓이만으로 전승되지 않듯, 고갯길의 역사 또한 꼭 그 높이와 크기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고갯길의 역사를 따질 적에 가장 중요한 잣대는 오로지 백두대간이다.
반도 이남의 동서가 만나는 고개, 추풍령 고갯마루는 그렇게 오늘도 인파로 출렁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한 번쯤 그 고갯마루에 들러 쉬어가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온갖 종류의 교통수단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온갖 차림의 나그네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불과 해발 200미터의 고개. 저 쟁쟁한 백두대간의 여느 고갯길에 견주면 그저 작은 구릉에나 불과하지만 추풍령은 이미 그 모든 고개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추풍령은 '국토의 대동맥'(경부고속도로)이 '국토의 척량'(백두대간)을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고개이기 때문이다.
-추풍령과 괘방령
옛날 과거길 보러갈 때 괘방령으로 넘어가면 장원급제 방이 내걸렸고 추풍령으로 넘어간 벼슬아치는 추풍낙엽처럼 벼슬자리 떨어졌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괘방령과 추풍령.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추풍령으로 쳐들어갔다가 괘방령으로 쫓겨났고, 한국내전 때는 북한군이 추풍령으로 남진했다가 괘방령으로 퇴각했다는 역사가 전해져 오는 이 두 고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추풍령에 수많은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가 하면 괘방령은 한적하다. 진군과 퇴각, 번다함과 적막함.
[금산] 370m. 채석장 개발로 대간 자락의 북사면 절반이 사라진 산으로, 자병산과 더불어 대표적인 백두대간 훼손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 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부선 철도용 자갈 공급, 그 다음에는 고속 전철용 자갈 공급을 위해 깎아졌다. 앞으로도 10년 이상은 자갈을 채취할 수 있다고 하는데, 현재 작업장에서 바로 옆에 채석장을 하나 더 낼 준비를 하고 있다. 경부고속철에 자갈을 납품하고 있어, 고속철 보수 연한이 끝날 때까지 채석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것. 채석이 끝나면 공사중 나온 폐석과 모래, 토사를 절벽 앞에 계단식으로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산을 복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지만, 이들이 채석장 동북 사면에 시범적으로 심어놓은 묘목들은 대부분 푸슬푸슬한 모래땅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고사 직전이다. 현재는 채석을 중단하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를 하고 있다.
-백두대간 곳곳 채석장...폭약에 추풍령 허리 날아가
충북 영동군 추풍령(221m). 설악산과 태백산, 소백산을 거치며 숨가쁘게 내달려온 백두대간은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덕유산(1594m)과 지리산(1915m)으로 달려나간다.
그러나 추풍령 고개에는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줄기 대신, 산 절반이 톱으로 썬 듯 잘려나간 절벽만 가파르게 서 있다. 국내 굴지의 철도용 궤도자갈 생산업체인 삼동흥산이 지난 68년부터 경북 김천시와 영동군이 경계를 맞댄 추풍령 자락 금산에 채석장을 내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동군쪽 절반을 폭약으로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백두대간보전회 충남지부장 유재호(47)씨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잇는 금산이 이미 절반 이상 파괴돼 백두대간 줄기가 끊기기 일보직전"이라며 "새 채석장까지 들어서서 맥이 완전히 끊기기 전에 개발을 중지하고 복구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풍령을 지나 높고 넓게 치솟은 덕유산 산줄기가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육십령(734m) 고개 역시 채석장으로 무참하게 훼손되고 있다. 경남 함양군과 전북 장수군이 경계를 맞댄 육십령은 "산을 넘는 동안 산적 60명을 만난다"는 전설이 내려올 만큼 숲이 울창하던 곳. 동사면에는 남강 최상류 계곡이, 서사면에는 금강 최상류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육십령은 태을산업과 함양석재 등 골재회사들이 낸 대형 채석장으로 흉칙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태을산업과 함양석재는 각각 지난 90년과 89년부터 육십령 정상부위에 6만1886㎡(1만8720평), 2만8568㎡(8640평) 규모의 채석장을 내고 도로공사용 골재와 건축용 석재를 채굴하고 있다.
폭약으로 산을 쪼개는 발파음과 크러쉬어 굉음, 주변 산야를 뒤덮는 먼지는 육십령도 추풍령 금산과 마찬가지였다. 채석장이 생긴 직후부터 태을산업 채석장 바로 앞에 자리잡은 서상면 황남리 주민들로부터 "덤프트럭이 비포장 진입로를 달리면서 생기는 먼지 때문에 하우스 농사에 피해가 막심하다"는 민원이 그치지 않았지만, 태을산업은 지난 97년에야 진입로를 포장했다.
1999년 환경부는 백두대간 마룻금을 중심으로 양쪽 700m를 <생태축>으로 지정했다. 백두대간이 훼손되고 있다는 환경단체 원성에 밀려 정부가 "이것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내세운 '최소' 범위다. 그러나 아예 산 정상에 버젓이 자리 잡은 육십령 채석장에 대해 함양군청은 "허가 당시엔 '백두대간' 개념 자체가 없었다"며 "법대로 해서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작점고개에 오르면...ⓒ백두대간학교 |
[작점고개] 340m. 능치재, 성황뎅이고개, 여덟마지기고개라는 별칭도 있다 하며, 김천 어모면에서 추풍령으로 넘어가는 한적한 고개다. 작점고개란,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에서 딴 것이며, 여덟마지기고개란, 충북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갯마루 근처에 성황당이 있는 고개라 하여 성황뎅이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정작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 정자에는 '능치쉼터'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고갯마루 아래 능치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간 종주 자료에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는 것은,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작점리 마을은 충북 최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부터 유씨가 자리 잡은 마을로 소백산 줄기이며 마을 뒤편에는 난함산 상단에 국영통신 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200여 년 전 전국에 제일가는 유기 생산 공장이 작점리 전 지역과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일대까지 공장이 분포되어 있어 유기점포 판매상인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새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새'작'자의 '雀'과 유기점포가 많아 '店'자를 따서 작점이라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장수하는 마을로 손꼽혀 있다.
영동 쪽의 작점마을이 김천 쪽의 능치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무좌골산] 474m. 전에는 삼각점봉이었다. 북동쪽 기슭에 파란, 붉은 지붕의 도치량마을이, 왼쪽에 추풍령저수지가 위치한다.
[갈현] 용문산 자락을 완전히 내려와서 만나는 노루목이다. 죽전리와 능치리를 연결하는 소로가 교차한다. 이름은 '칡고개'라는 의미다.
[용문산] 710m. 1800년 무렵 박생이란 유생이 산세를 보고 용문산(龍門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1940년경 나운몽 목사가 입산하여 근처에 기도원(애향숙)을 세운 뒤, 일명 용문산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곳이다. 서울과 부산 사이 바로 중간에 위치하고, 영남과 호남의 분계선이며, 서북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남북 양대 강의 분수령이 되는 산의 특성으로, 남한 중심에 위치한 소위 '성산'으로 파악한 것이다.
초창기 애향숙은 신앙적인 목적보다 일제하의 설움에서 오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출발하였다가 이후 애향숙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기도원 운동으로 면모를 바꾼 것이라 한다. 현재 전국 3만여 명의 신도가 연중행사로 기도대집회를 열고 있다.
[국수봉] 763m. 충북 영동, 경북 상주의 경계를 이루며 백두대간 중 추풍령-큰재 구간에 속해 있으며 큰재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4km 지점의 능선 상에 솟은 산이다. 국수봉에 서면 상주의 너른 평야와 백학산, 서산, 기양산, 갑장산, 묘함산, 황악산, 민주지산 등 주변의 산들이 전개되고 날씨 좋은 날이면 백두대간 상주, 문경, 김천 구간과 소백산까지도 조망된다. 국수봉은 웅산(熊山), 용문산(龍文山), 웅이산(熊耳算) 또는 곰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정상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고 아울러 낙동, 금강의 분수령이므로 국수(掬水)라 한 듯하고 웅신당(일명 용문당)이라는 대가 있어 천제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의 웅이산과 같이 시초(蓍草)가 난다고 하여 웅이산이라고 하며, 상주의 젖줄인 남천(이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국수는 掬水(움켜쥘 국)와 菊水(국화 국)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나,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으로 물을 쥐고 있는 형국이므로 의미상 국수(掬水)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큰재] 해발 300m가 겨우 되는 영동군 모동면에서 상주시 공성면으로 넘어가는 2차선 아스팔트 고갯길이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고갯마루에는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폐교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었다. 1949년 11월 개교하여 597명의 학생을 배출하고 1997년 3월 폐교되었다. 그 후 '부산녹색연합 생태학교 백두대간교육센터'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숲생태원>이 세워져 있다.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2>⑥ <용문산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웠던 눈 덮인 지리산, 모진 눈보라에 몸 떨며 황홀했던 소백산, 장엄한 산줄기에 절로 마음 내려놓았던 덕유산, 깊은 산에 자리한 거대한 풍력 발전기 곁을 지나던 선자령, 제비꽃 무성하던 봄의 대덕산, 철쭉 붉게 타오르던 봉화산, 빗줄기와 운무 따라 오르던 함백산, 구름 위로 걸었던 오대산, 무릉도원 풀어냈던 청옥·두타산,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함께 바람과 구름까지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황홀지경을 보여주었던 조령산, 고요히 산길 걸으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던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에 이르기까지 12번 산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백두대간은 더욱 살가워졌습니다. 몸은 대간 길에 머물기 원하고 마음은 대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기 원하게 되었습니다. 친밀함은 더욱 가까워지고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런 마음의 길을 이어 나가기 위해 <백두대간12걸작선2>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왜 백두대간인가?'
'왜 우리는 백두대간을 걷는가?'
백두대간은 이 땅의 시작입니다. 백두대간이 열리며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이어 일어나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물줄기가 흘렀습니다. 생명의 터전입니다. 삶의 출발이고 정신의 뿌리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은 하늘의 뜻이 발현된 하늘의 땅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머무는 신성한 땅, 거룩한 공간입니다.
백두대간은 '지혜의 머리가 된 산'인 백두산(白頭山)의 '하늘의 연못' 천지(天池)에서부터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인 지리산(智異山)의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天王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하나의 산줄기요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산입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오고가는 생명의 통로일 뿐 아니라 기후와 언어, 삶과 문화를 구분 짓는 큰 산줄기입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이 땅의 처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첫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바람에 기대어 그 산길을 다시 엽니다.
새로운 산행 코스를 선정하는데 몇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구간별로 이야기가 있는 산행을 만들어갑니다.
둘째, 근교 산행을 즐기는 분들이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산행 코스를 잡았습니다.
셋째, 숲의 소리를 듣고 나무와 꽃을 느끼며 천천히 산행을 합니다.
넷째, 계절별로 아름다운 구간을 선정하였습니다.
다섯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하였습니다.
여섯째, 종주 산행을 하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지리산과 설악산 종주를 넣었습니다(1박2일로 진행되는 산행으로 난이도 '중상(中上)'의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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