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珍島)는 정이 넘치는 곳입니다. 바다와 들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노래에는 살가운 정이 배어납니다. 삶의 애환이 스민 <진도아리랑>과 질펀한 <육자배기>는 진도의 정서를 말해줍니다. 진도의 예인들은 전문 소리꾼이나 연희자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네 어머니, 이모, 옆집 아저씨 같은 이웃에 사는 분들입니다.
시인 조병화씨의 시 <진도찬가(珍島讚歌)>는 이러합니다.
"진도는 정이 붙는 섬이더라 / 진도는 정이 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이더라 / 진도는 정이 흐르는 흙이요, 물이요, 산이요, 들이요, 개울이요, 집들이요, 마을들이요, 농토들이요, 정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싸인 섬이더라 / 들리는 것이 육자배기요. 흥타령이요, 남도민요요, 바람이 판소리, 구름이 판소리…(중략)"
작가 김훈씨는 "진도는 원형의 섬이다. 진도는 맑은 땅이다. 삶의 모든 국면들을 포괄하는 힘세고 순결한 원형들이 그 섬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서 축적되었다. 그러므로 진도는 섬이 아니다. 진도는 세계적이고 진도는 보편적이다"라고 썼습니다.
▲운림산방은 한 폭의 산수화이다. ⓒ진도군 |
진도에는 우리 고유의 음악과 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진도씻김굿> <진도북놀이> <진도만가(輓歌)> 등 '진도'라는 지명이 붙은 노랫가락이나 춤은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특히 남도 민요의 정수인 <진도아리랑>은 민초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노래로 섬사람들의 애환이 녹아 있습니다. 한때는 쓸쓸한 유배의 땅이었지만 들판의 소리꾼이 사라지지 않는 섬, 진도는 이제 우리 국토에서 마지막 남은 신명의 땅입니다.
바람 따라가듯
길 없어도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고
너에게 가리
일곱 빛깔 영롱한 별빛 아래
바다와 하늘이 몸을 섞으며
슬픔을 묻는 곳
그 섬에 가리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돌아온 길 돌아다보며
먼 하늘 한 자락 눈에 묻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서 있는
남쪽 끝 그 섬으로
나는 가리
<김정화 : 그 섬에 가리>
지금은 다리가 놓여 있지만 예전에 진도에 가려면 거친 물살의 '울돌목'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진도대교 밑 푸른 바닷물이 소용돌이 바닷길인 '울돌목'입니다. 울돌목의 폭은 294m 정도이나 물살이 세고 소용돌이쳐서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듭니다. '소리 내어 우는 바다길목'을 뜻하는 그 울돌목에서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330여척의 왜선을 무찔렀습니다. 한자어로 명량(鳴梁)해협이라 합니다.
울돌목은 진도를 외딴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나라와 뜻이 다른 선비들을 유배하는 귀양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도는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풍수해나 가뭄이 닥치는 경우도 적었습니다. 귀양 온 이들은 시름을 씻어내기 위해 시와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소일했습니다. 그들의 수준 높은 학문과 문화가 진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진도가 양반문화와 서민문화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유배지였던 까닭입니다. 유배의 서릿발 같은 정신이 한자락 소리가 되고,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고스란히 전해진 것입니다. 외딴 섬이었던 진도였기에 끈질기게 그것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진도음악여행> 사전 답사를 다녀온 김진묵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말끝마다 행복하다고 했다. 특별한 종교에 빠져든 것도 아닌, 그냥 우리네처럼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들은 말끝마다 행복하다고 했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전어와 숭어를 막장에 찍어 먹는 그들 손에는 물론 소주잔이 들려 있었다. 아주머니 한분이 노래를 불렀다. "구름은 발 없어도 천리만리를 가는디...", "그라제!" 옆의 아저씨가 무릎을 친다.
한 아주머니는 작은 나무토막을 도마삼아 회를 썰어 작은 소쿠리 위에 계속 얹고 계셨다. 다른 아주머니가 받는다. "바람은 손 없어도 서있는 나무를 흔드는디...", <흥타령>이라고 했다. <한타령>이라고도 한단다. 바닷바람이 스쳐왔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테이블도 없는 바닷가-.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우리가 이 반도에서 삶을 영위하며 보고 들었던 것들, 아프고 슬펐던 것들, 혹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들이 날 것 그대로 숨 쉬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우리네 어머니, 아저씨, 이모, 고모들이라는 사실. 우리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누이에게서 우리의 딸로 이어지는 준엄한 잉태와 회귀의 법칙이 그들에게는 행복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우리 음악을 찾아보자는 욕심에 전라남도 진도에 간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눈물을 글썽이며 행복에 젖어들었다. "말하는 것이 모두 시이고 여기에 가락을 얹으면 노래가 되지요.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아요." 삶을 통찰한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도에서 만나는 전통문화는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던 선험적 기억이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우리가 일구어낸 문화의 원형,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나'를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인생이 뭐 있나
나비의 날개 짓에 한숨 한번 -
철새의 지저귐에 한숨 한번 -
다리가 있어 마음껏 걸었을까
눈이 있어 마음껏 구경했을까
그저 입으로 마음껏 노래하며
한숨 한번 크게 쉬고
어깨 툭툭 털고 다시 사는 게
그게 인생이지
<진도의 민요 중에서>
▲전국 해넘이 중 으뜸이라는 진도 세방낙조 전경 ⓒ진도군 |
<진도음악여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28일(토)>
06:30 서울에서 출발합니다.(행선지가 멀고 행락객들로 붐벼 교통체증이 우려됩니다. 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 유진여행사 <세상의음악학교> 버스에 승차 바랍니다. 아침식사 거르신 분들을 위해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2:30-13:20 진도대교 앞 우수영 도착, 점심식사
14:00-15:30 진도향토문화회관 전통예술공연 감상
우리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자 매주 토요일 인간문화재와 전수생들의 민속공연이 펼쳐집니다. 진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군립예술단이 펼치는 민속공연은 이 고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실감케 합니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 <다시래기> <진도북놀이> <진도만가> <진도아리랑> <사물놀이> <남도잡가> 등을 교체 공연합니다.
[강강술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인 <강강술래>는 마을의 처녀들과 아낙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노래에 맞춰 마음껏 뛰면서 노는 민속놀이이다. 조선시대는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을 강조하면서 여인네들에게 속박과 굴종을 강요하여 왔다. 그런 유교적 전통을 엄격히 지켜오는 시대에도 다소나마 여성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제도가 필요했다.
진도와 해남지역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강강술래>도 그런 여성에게 해방의 시간으로 필요했던 놀이문화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주로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명절에 행해지던 <강강술래>는 평소 길쌈을 비롯해서 안팎으로 노동으로 시달리며 시집살이까지 감내해 내야만 했던 우리 여인네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해방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달은 예전부터 풍요의 상징이며 남녀 애정표현의 한 형태로 상징화되어 왔다. 달 밝은 밤에 여성들은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한껏 향유했다.
<강강술래>가 어느 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설(說)이 분분하다. 다만, 꽤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서 우리를 웃게 하고 울게 했던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임은 분명하다. 가락에 맞추어 땅을 밟으며 춤을 추는 형태는 원시종교에서 그 유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誌)>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보면, "…5월에 씨를 뿌리고, 귀신을 제(祭)한다. 떼를 지어 한데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 낮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추는데 다 같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어 손발을 맞추며 몸을 낮췄다 높였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 같이 탁무(鐸舞)와 같은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다시 춘다." 하였다. 이는 이미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도 손발을 맞추며 춤을 추는 <강강술래>와 비슷한 형태의 춤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지금의 <강강술래>로 정착되었는지 그 근원은 알 수 없다.
강--강--술--래--/강--강--술--래--
뛰어보세 뛰어보세 /강--강--술--래--
윽신윽신 뛰어보세/강--강--술--래--
앞에가는 군사들아/강--강--술--래--
발맞춰서 뛰어가세/강--강--술--래--
곁엣사람 보기좋고/강--강--술--래--
먼뎃사람 듣기좋게/강--강--술--래--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강--강--술--래--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로, '강강'은 전라도 지방의 방언(方言)으로 원(圓)을 뜻하는 '감감'의 후음(厚音)이라고 전해지기도 하고, 술래는 수레(車), 순유(巡遊), 순라(巡邏)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강강술래> 하면 단순히 반복해서 둥글게 도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다양한 종류의 놀이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그 노래의 빠르기로 <늦은 강강술래>, <중 강강술래>, <잦은 강강술래>로 구분한다. <늦은 강강술래>가 정중동(靜中動)이라면 <중 강강술래>와 <잦은 강강술래>는 동중동(動中動)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여럿이 함께 모여서 흥겹게 노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 <강강술래>는 애당초 예술을 위한 공연 형태로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이웃 집 아짐(진도방언, 아주머니)이 달밤에 제 흥에 겨워 이웃집 아짐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와 신명나게 놀아보는 놀이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남도들노래] <남도들노래>는 가락이 무척 다양하고 흥겨우며 뒷소리를 길게 빼면서 부르고 사물과 못방구(소구보다 큰북) 반주 아래 시종일관 노래를 부르는 특징이 있다. <남도들노래>는 1971년 제1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하가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그 가락과 내용이 뛰어나 <남도들노래>라는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남도들노래>는 지산면 인지마을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모내기, 김매기 등 주로 논일을 하면서 부르는 농요로써 그 가락이 다양하고 뒷소리를 길게 빼면서 시종일관 노래를 부르는 특징이 있다.
어라 뒤야 저라 뒤야 상사로레(설소리)
어리뒤야 저라뒤야 상사로세(뒷소리)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까워 온다
어랴 뒤야 저라 뒤야 상사로세
이배미 저배미 다 심었으니
장구 배미로 넘어가세
어라뒤야 저라뒤야 상사로세
다되었네 다되었네
상사소리가 다 되었네
어라뒤야 저라뒤야 상사로세
[다시래기] 국가 무형문화재 <다시래기>는 일명 <다시락>이라고도 하는데 '다시 낳다' '다시 생성하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즐거움을 갖는다'는 뜻이다. 진도 <다시래기>는 상가에서 출상 전날 밤에 상주와 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물(四物) 반주에 맞추어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가무극적 놀이이다.
상두꾼들은 전문적인 잽이(굿쟁이)가 아니므로 다시래기패들이 나와 주역이 되고 상두꾼들과 함께 논다. 다시 말하면 <다시래기>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마을사람과 상두꾼들이 출상 전날 상가집에 모여서 상주와 그 가족을 위로하며 상여를 꾸미면서 마당에서 벌이는 일종의 소박한 소극 형태이다.
현재 민속극이 <심청전>이나 <흥부전> <박첨지> <남사당놀이>를 제외하고는 연극성격을 띈 놀이는 전국적으로 거의 없고 남도에는 극형태 민속을 찾기 어려우나 이 <다시래기>는 가무와 개인기가 곁들인 유일한 민속극이다.
[진도씻김굿] 진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씻김굿은 망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해 맺혀있는 한을 풀어주어서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타 지방에서 하는 굿은 무당이 북 위나 작두 위에서 걷는 등 사술적이고, 의상은 무복을 입는 것이 보통이며 무당 자신이 망자의 말을 전한다. 그러나 <진도씻김굿>은 춤과 노래로써 신에게 빌며 의상은 흰옷 차림으로 죽은 자의 후손으로 하여금 죽은 자와 접하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1980년 11월 17일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된 <진도씻김굿>은 원시종교인 샤머니즘(무격신앙)과도 통하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초연한 자세를 예술의 세계로 승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룻밤 내내 벌어지는 씻김굿은 길 닦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끊어질 듯 애절하게 이어지는 삼장개비 곡조는 모인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진도씻김굿> 음악은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탄 바 있다.
진도씻김굿의 순서는 먼저 조왕반에서 시작해서 혼맞이-안당-초가망석-처올리기-손님굿-제석굿-고풀이-영돈말이-이슬털기-왕풀이-넋풀이-동갑풀리-약풀이-넋올리기-손대잡이-희설-길닦음-종천으로 막을 내린다.
▲<진도씻김굿> 음악은 1979년 세계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탄 바 있다. ⓒ진도군 |
[진도북놀이] 전남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춤>이라고도 한다. 다른 지방과 달리 양손에 북채를 쥐고 장구처럼 치기 때문에 잔가락이 많으며 멈춤과 이어짐이 민첩하고 가락이 다양하다. 특히 북이 갖는 시간적 소리와 즉흥적 춤사위가 갖는 공간적 움직임이 어우러져 흥을 북돋운다. <진도북놀이>은 삼현육각 및 시나위 가락과 사물이 받쳐주는 형태가 음악적 구성면에서도 차이가 나므로 즉흥적 춤사위와 북가락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독특한 북놀이다.
[진도만가] 전남 무형문화재 제19호. 지산면에서 불려지는 신청예인들의 만가로서 전문화된 상여소리다. 상여를 메고 갈 때 다른 지방에서는 남자만이 상두꾼이 되고 만가의 선창자는 요령이나 북을 치면서 메김소리를 하지만 진도에서는 여자도 상두꾼으로 참여하고 만가의 반주 악기로 사물과 피리가 등장하며 메김 소리와 뒷소리를 뒷받침해 준다. 뿐만 아니라 가면을 쓴 방장쇠 두 사람이 조랑말을 타고 칼춤을 추면서 잡신을 쫓는가 하면 횃불이 등장하고 상주들의 상복 또한 특이하다. 진도의 만가는 1982년 춘천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연하여 민요 부문 우수상인 문공부장관상을 수상, 이후 전국에서 가장 세련된 음악미를 간직하고 있는 만가로 지목되고 있다.
[진도아리랑] 전남 향토무형유산 제1호. <진도아리랑>은 옛부터 <아리랑타령>이라 하여 구전으로 불리어져 그 시원(始原)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말엽인 1900년대 초부터 <진도아리랑>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가락은 흥겨운 멋을 간직한 속에 애절한 한이 깃들어 있고 비애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노래로 후렴 중의 응- 응- 응- 소리는 슬픔과 기쁨이 한데 엉겨 있는 것과도 같다.
이 민요의 창법(唱法)은 판소리와 같이 구성진 굵은 목을 눌러내는 듯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종지음의 치켜 올리는 생동감은 다른 아리랑과 쉽게 구별된다. 가사는 임을 그리는 애끓는 심사와 원망이 해학적으로 엮어진 내용이 많으며 그때마다 창자(唱者)가 지닌 정서를 전래의 가락에 맞춰 즉흥적으로 부르는 극히 서민적인 민요이다. 장단은 세마치이고 선율은 시나위 형으로 중몰이 장단에 불려지며 특히 <진도아리랑>은 가사와 함께 가락에 독특한 흥취가 있어 남도 민요의 진수로 일컬어진다.
[남도잡가] 전남 무형문화재 제34호. 잡가의 의미는 상층문화권의 정통가요인 가곡, 시조에 비해서 정제되지 못한 노래, 곧 잡스럽거나 속된 하층문화권의 노래로, 속가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것은 <경기체가>와 더불어 고려시대 가요의 한 몫을 차지하던 잡가와는 다른 용어로 조선 후기 광대나 사당패 등 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창출된 잡가(속가)를 지칭한다.
원래 잡가는 조선 말기에 형성되고 번창하다가 1830년을 전후하여 유행가 등 서양풍의 노래에 밀려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잡가는 조선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학 장르라는데 의미가 있으며,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장르로 꼽기도 한다. <남도잡가>는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흥타령, 개구리타령, 새타령, 성주풀이 등을 지칭한다.
16:00-17:00 남진미술관 관람
서예가 장전(長田) 하남호 선생이 사비를 들여 1989년 11월, 800여 평의 대지 위에 100평의 본가, 연원관, 양서제 그리고 150평의 지상 3층 미술관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소장해오던 작품 중 서예, 서양화, 동양화, 조각, 고대자기, 분재 등 국보급 미술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미술관 옆 동산에는 울창한 노송이 우거져 있고 멀리 여귀산 봉우리가 한눈에 보입니다. 주변 계곡의 맑은 물과 수림들이 농촌의 그윽한 정경과 고요함이 한데 어울려 있습니다.
17;30-18:30 세방낙조 감상, 진도북놀이 체험
바닷가 해넘이 중 전국 최고라고 알려진 세방낙조를 감상하면서 진도군 의신면 주민들의 북놀이 공연을 체험합니다. 진도의 서부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세방마을의 아름다운 다도해 섬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해질 무렵 붉게 물든 하늘과 바다, 그 사이로 올망졸망 떠있는 섬들의 어우러진 경관은 자연이 빚어 놓은 예술품입니다. 이를 배경으로 <진도북놀이>가 신명나게 한판 벌어집니다.
18:40- 소포마을 도착, 저녁식사와 공연관람 후 취침
주민들이 준비한 음식에 막걸리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합니다. 이어 소포마을 전통 남도소리 감상 및 체험 시간입니다. <남도잡가> 한 대목 배우기, 남도민요 감상, <소포걸군농악> 관람, 농악장단 배우기, <강강술래> 시연 및 한마당놀이 등이 펼쳐집니다.
소포마을은 남도 가락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전통마을로 소리, 장단, 춤, 강강술래 등 다양한 전통 놀이를 감상하고 흥겨운 가락에 따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마을입니다. 김병철 전수관장의 남도 소리문화 설명과 지역 특색이 강한 장례문화까지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동네 아짐(아주머니)들의 노래는 처연하고 때로는 질펀하며 김병철 관장의 해설은 시에 가깝습니다. 소포마을 바로가기->www.sopoli.com
소포마을은 검정쌀의 원조 마을이자 도지정 제18호 <진도북놀이>, 도지정 제19호 <진도만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 <강강술래>,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들노래>가 독립적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도지정 무형문화재 39호 <소포걸군농악>의 보유지이기도 합니다. <소포걸군농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양손으로 북을 치기 때문에 '양북'이라고도 하며 역동적이고 가공되지 않은 북춤의 원형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 (고)박병천 님의 주활동무대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소포걸군농악대는 전남지역 투어를 다니며 민족문화를 계승해왔고 마을 자체적으로 극단을 조직해 진도 전역으로 공연을 다니던, 문화적 생산력이 대단한 마을이었습니다. 아직도 자생적으로 일곱 개나 되는 전통민속보존회가 우리의 소중한 민속을 보존 발전시키고 있는 전통 민속의 보고로서 서민문화를 대표하는 삶의 소리, 가공되지 않은 다양한 전통 민속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강강술래>는 달 밝은 밤에 여성들이 오랜만에 맛보는 '해방공간'이었다. ⓒ진도군 |
<5월 29일(일)>
07:30-08:10 소포마을에서 아침식사
이 마을에서 구기자, 진도홍주, 대파, 검정쌀, 돌미역, 울금(카레의 원료) 등 진도 특산물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08:30- 소포마을 출발
09:00-10:30 운림산방 관람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별서 건축(別墅建築)으로 전남 지방기념물 제51호입니다.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小痴) 허련(維鍊, 또는 許維, 1808~1893)이 기거했던 곳으로, 본채와 초가로 된 사랑채, 신축된 유물보존각 등의 건물과 연못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평기 해설사의 구수한 해설을 들으며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담긴 내용이 다가와 속삭이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운림산방] 첨찰산 아래에 소치(小痴) 허련(維鍊)이 말년에 터를 잡고 기거했던 운림산방(雲林山房)이 있다. 허련은 궁벽한 유배지 진도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학승 초의선사와 최고의 서화가로 불린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고 화가로 입신했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붙여준 호이며, 운림산방은 소치에서 미산(米山) 허형 - 남농(南農) 허건으로 이어지는 남종화의 맥이 이어져온 곳이다.
소치는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현재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草衣大師, 張意恂)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 된다. 비록 낙도에서 태어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 (書), 화(畵)에 능하여 40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재에서 헌종을 뵐 수 있었고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연못을 앞에 두고 선혈처럼 붉은 동백꽃, 반들반들한 수피의 배롱나무 그리고 노송들이 둘러쳐진 운림산방은 한 폭의 산수화이다. 시서화(詩書畵)의 대가들이 가꿔놓은 곳이니 그 유현한 맛이 더할 나위없다. 추사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했던 소치 허련의 작품들이 해설을 들으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을 거점으로 전개된 허씨 가문 4대에 걸친 예술은 진도가 이룩한 인문주의 예술의 절정이며 19세기 한국 미술의 꽃이다. <일부 자료 출처 : 진도군>
12:00-12:40 고창에서 점심식사
12:50-14:30 고창판소리박물관 관람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창판소리박물관에 들려 판소리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박물관 건물은 전체적으로 북 모양을 하고 있고 지붕은 서민의 갓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1층의 소리마당, 아니리마당, 발림마당, 혼마당 그리고 2층의 기증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리마당은 판소리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으로, 판소리의 역사와 특징 등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 선생의 판소리 책본과 고수들의 고장(鼓長)북 등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바로 옆에는 신재효 선생의 생가인 <동리정사>가 복원되어 있어, 그의 삶을 잠깐이나마 느껴볼 수 있습니다.
신재효 선생은 그때까지 계통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6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문과 어구를 실감나게 고쳐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하였습니다. 특히 <박타령> <토끼타령> 등은 창극화까지 하였으며, <광대가(廣大歌)> <도리화가(桃李花歌)> 등의 판소리 단가와 판소리 가집(歌集)인 <신오위장본(申五衛將本)>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15:30 서울 향발
세상의음악학교 <진도음악여행> 참가비는 19만원입니다(교통비와 숙박비, 4회 식사, 관람료와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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