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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내면서 사는 게 목표입니다"

[2012 농사직설]<1>비가림막 하나 씌웠을 뿐인데

#1. 장미 팔러 블라디보스토크 가봤수?

충북 진천의 'MS명성농원.' 6843㎡(약 2000평)에 장미 재배 시설이 들어서 있다. 온실 안에 들어가니 후끈한 습기가 안경에 하얗게 올라 앉았다. 허리 높이의 '양액베드' 위에는 장미 꽃대가 종대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조용성 대표가 장미 농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조 대표는 '귀농인'이다. 미대를 나온 그는 서울과 청주 등 도시에서 갖가지 사업을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40대에 접어들자 형이 수박 농사를 짓던 곳으로 내려와 농사를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장미. 공부를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 등을 돌아다니며 장미 재배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체적으로 연구를 거듭했다. 그 결과 2004년 10월에 국내 최초로 무농약 친환경 장미 인증을 받았다. 진딧물, 노균, 흰가루병 등의 병해충을 친환경 제제를 사용해 예방한다. 그는 "성공적인 농작을 위해서는 재배식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허리 높이의 '양액베드' 위에 장미 꽃대가 올라온다. ⓒ프레시안(김하영)

장미 재배 방법도 각종 기술이 집약돼 있다. 땅 위에 바로 모종을 심어 재배하는 노지 방식이 아니라, 사람 허리 높이의 직사각형 통 모양의 일종의 화분인 '베드' 위에 작물을 심고 베드 안으로 15가지 영양분이 혼합된 양액을 흘려 작물을 키우는 '양액재배' 방식을 도입했다. 조 대표는 "양액재배는 pH, EC 등의 양액 농도가 자동화 돼 관리가 쉽다"며 "꽃대나 잎 색깔 등 작물의 상태를 보고 칼륨이나 철분을 조절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40% 늘어나고 품질이 균일하다. 자동화 덕분에 2700평 시설 재배를 하는데 일하는 사람은 조 대표를 비롯해 4명이 전부다.

시설 재배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미는 시즌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결혼 시즌인 5월과 10월, 졸업 시즌은 1월과 2월, 입학시즌인 3월. 이 때를 못 맞추면 값이 반 값으로 내려가고, 시즌을 잘 맞추면 값이 두 배로 뛰는 등 가격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다.

▲ MS명성농원 조용성 대표. ⓒ프레시안(김하영)
무엇보다 장미는 수출 품목으로 전망이 밝다. 조 대표는 일본과 러시아에서 인기가 좋은 러블리 리디아, 오션송, 룰렛, 엠세컨드러브 등의 '스프레이'(미니 장미) 품종의 장미를 주로 재배한다. 한국에서는 장미 한 송이에 700~800원을 받는데, 해외로 수출하면 5000원 이상을 받는다고 한다. 조 대표는 전량 러시아와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이 장미를 참 좋아하는데, 모스크바 같은 곳은 네덜란드산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 극동 지방은 한국이 지리적 잇점을 갖고 있어 시장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0만 달러어치 수출 계약도 했다.

그렇다면 조 대표는 얼마나 '벌고' 있을까. 2010년 매출액이 2억100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이 중 인건비와 양액 등 재료비, 보일러 난방비 등 생산비, 감가상각비 등을 제하고 나면 연 800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린다고 한다.

농가에서는 제법 고소득에 해당되지만 '대박' 까지 보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고 기자의 농에 조 대표는 씩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도 살 맛 납니다. 좋은 공기 마시고 좋은 경치 보면서 사는 것은 물론, 때 되면 낚시하러 다니고 스키타러 다니고 그럽니다. 아 참. 1년에 한두 번 마케팅하러 러시아도 가고 일본도 가고 합니다. 도시에서 사업하고 있으면 어림도 없었겠죠."

#2. 대추, 말린 거 말고 생대추 먹어봤수?

▲ 충북 보은 아랑농원 김종식 대표의 대추밭. ⓒ프레시안(김하영)

충북 보은 회인면 건천리. 상주 고속도로가 하늘 위로 곧게 뻗어 있는 곳 아래 대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아람농원 김종식 대표의 대추밭. 멀리서 볼 때는 대추밭인 줄 몰랐다. 그냥 농촌의 여느 비닐하우스 같은 곳이었으나 안에 들어서니 대추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비가림막'이었다.

김 대표는 젊은 시절 밭에다 대추를 심어 키웠지만 수확이 신통치 않았다. 대추의 개화 시기가 6~7월인데 장마철이랑 겹쳐 착과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추를 수확해 파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보통 사람 키 두 배 정도인 대추 나무에 대추가 열리면 장대로 털어 떨어진 대추를 말려 '건대추'로 파는 게 대부분이었다.

5년 전 김 대표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대추가 비를 싫어하면 비를 가려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림막을 세웠다. 비를 가리지만 옆은 터서 바람이 통한다. 물은 스프링쿨러로 준다. 대추 나무의 크기도 비가림막 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가지치기, 가지묶기 등을 통해 낮고 넓게 자라게 관리했다. 사람 키 높이 정도로 대추 나무를 키우니 장대로 털면서 생기는 낙과가 줄어들고 손상 없이 생대추를 딸 수 있었다.

비가림막을 설치한 뒤 1헥타르에서 900kg 수확되던 것이 5000kg으로 늘었다. 대추 열매의 크기도 2~4mm 굵어졌고, 당도도 높아졌다. 자연스레 말려 파는 건대추보다 생대추 판매량이 늘었다. 보통 대추는 제수용이나 결혼식 폐백에 사용되는 건대추가 일반적이지만 생대추를 먹어본 사람들은 "사과보다 달고 맛있다"면서 감탄한다고. 비가림막을 설치한 뒤 수입은 1평(3.3㎡) 1만 원에서 2만 원으로 늘었다.

김 대표의 성공 뒤에는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산림청과 군으로부터 시설비 절반 가량을 지원 받았다. 예부터 대추로 유명했던 충북 보은군은 '황토대추'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판로 개척에 힘을 쏟았다. 보은군에서 지난해 대추 축제를 열어서 판매한 금액만 46억 원이라고. 축제에서 생대추 맛을 본 사람들의 인터넷 주문으로 인해 보은 대추 생산량의 70~80%가 인터넷을 통한 개별 소비자 직거래 판매라고 한다. 현재 보은에서만 대추 농가가 1233가구에 이르고, '비가림막'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3. 삼부자, 딸기로 이룬 가족의 행복

▲ 베리원 딸기농장 이원섭 대표. ⓒ프레시안(김하영)

충북 청원군에서 딸기 농장을 하고 있는 이원섭 대표. 도시에서 토목사업을 했다. 그러던 중 1994년 고향으로 귀농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고추, 마늘, 열무 등을 키워 내다 팔았다.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했다고 한다. 가격도 폭락했고, 청주 육거리 시장에 가서 파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딸기로 눈을 돌렸다.

처음에는 땅에 모종을 심어 키우는 이른바 '노지 재배'를 했다. 수확이 시원찮았고 힘도 들었다. 2년을 고생하다가 '딸기 박사'라 불리는 논산 딸기시험장 김태일 박사가 딸기 재배 신기술 강의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공부를 했다. 열심히 배운 뒤 자신의 밭에서 실험을 하고 청원군 농업기술센터에도 드나들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하다가 잘 안 되는 것,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김태일 박사에게 물었다.

그렇게 배움의 배움을 거듭한 뒤 그가 택한 방법은 수경재배(양액재배)였다.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정부와 군의 지원을 받아 과감하게 투자했다. 무엇보다 땅 위에 농사를 지을 때보다 허리 높이의 베드 위에서 농사를 지으니 허리 숙일 일이 없어 편해졌다.

출하시기도 노지 재배에 비해 한 달 가량 빨라졌다. 남들보다 빨리 시장에 내놓으니 딸기 값도 높게 받았다. 한 마디로 장사가 됐다. 그래서 더 투자를 해 4동이던 비닐하우스가 11동으로 늘어났다. 내년에는 7동을 더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연매출 2억 원 정도인데, 시설이 늘어나면 매출이 두 배 정도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청원군에서도 딸기를 전략 품목으로 지원하고 있다. 논산까지 딸기 재배를 배우러 다니던 그였지만, 이제 그에게 딸기 재배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 이원섭 씨의 아들들. ⓒ프레시안(김하영)

온화한 표정의 이 대표에게 딸기 농사보다 더 자랑스러운 것이 있었다. '자식 농사.' 그의 큰 아들은 서울에서 고시 공부만 4년을 했다고 한다. 고생하는 큰 아들에게 이 대표는 "그러지 말고 아버지랑 같이 딸기 농사를 지어보자"고 권했다. "잘만 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사업인 것 같다"고. 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시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했다. 그는 지금 농업대학에 다니며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도시생활이 그립지 않냐구요? 허허. 전혀요."

둘째 아들은 군대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부상을 당했다.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지만, 국가에서는 국가유공자 지정이 안 됐다고 한다. 둘째 아들도 전역 후 딸기 농장에 합류했다. 아버지는 "베드 시설이 딱 배꼽 높이라 허리 숙이지 않아도 돼서 둘째도 일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안심해 했다.

두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 대표의 눈에 '야심'이 가득했다.

"이대로라면 재배 면적을 두 배는 더 늘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가족영농법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평생 직장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기술을 배워서 투자하면 아들들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업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세금 한 번 내보는 게 목표입니다. 농민이라고 해서 언제까지 나라에서 지원만 받고 살겠습니까. 저도 많은 지원을 받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공해서 세금 내는 농민도 있어야죠. 저와 제 아들들이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김하영)

#4. 2012 농사직설

1429년 세종은 정초, 변효문 등의 신하에게 명을 내려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펴내게 했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 온 농서들이 있었지만 한반도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나이든 농부들의 경험에서 얻은 농법을 수집케 한 뒤 우리 농업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 펴낸 '조선판' 농서였던 셈이다.특히 <농사직설>은 세종 시대에 편찬이 끝난 것이 아니다. 성종, 효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판본이 거듭되며 '개정판'이 발행됐다고 한다.

우루과이라운드(UR), WTO에 이어 FTA까지. 자유무역의 파고로 인해 1990년대 초부터 한국 농업은 계속 위기였다. "이제 농업은 끝났다"고 했지만, 우리 농업은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농업이 없는 나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유무역 외에도 농업의 환경은 계속 변하고 있다. 친환경/유기농 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고, 무상급식 운동이 '로컬푸드' 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파프리카 같은 수출 작목이 연일 뉴스에 등장하며 '벤처 농업'을 선전하고 있고, 베이비부머의 은퇴 시대에 맞춰 귀농/귀촌이 새로운 삶의 형태로 관심을 끌고 있다. 2012년 개정판 '농사직설'이 필요한 시대다.

앞서 소개된 진천 장미농가, 보은 대추농가, 청원 딸기농가 세 곳의 공통점은? 세 농가에서 얻은 힌트를 통해 <프레시안>은 2012년 새로운 농업 트렌드를 조명하는 기획연재를 진행한다.

□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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