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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보다 성공이 먼저였던 나, 초식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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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보다 성공이 먼저였던 나, 초식남이 됐다"

[20대, 녹색 정치를 말하다] '잉여'와 풀뿌리 민주주의

지난해 3월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환경 문제가 더이상 일부 전문가들의 '듣기 좋은 꽃노래'가 아닌 시민들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단지 방사능 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높아졌다는 것만이 아니다. 사고는 전력 낭비에는 길들여진 채, 원자력 발전이 일으킬 수 있는 '재앙'에는 무감각하고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은 없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췄다. 이는 원자력 발전뿐 아니라 '4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는 토건주의, 식품 안전 등 여타 환경 문제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고는 절망과 동시에 희망을 지폈다. 이러한 자화상에 충격 받은 이들이 곳곳에서 교수 모임, 의사회, 법률가 모임 등 '반핵'을 내세운 모임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탈핵, 탈성장, 탈토건'을 내세운 녹색당이 2월 창당을 준비 중이다.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준비위에 참여한 당원들의 이야기를 묶어 조만간 가제 '녹색당선언'이라는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그중 20대 청년들의 이야기 5편을 연재한다. <편집자>

저는 지금 스물 일곱 입니다. 그런데 연애를 못 해 본지 오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려서 두어 명과 연애를 해 본 이후로 연애를 못해 봤습니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면서 '공부해서 성공하자. 성공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맘껏 사랑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성공을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연히 연애는 멀리했습니다. 그 당시 연애는 사치였습니다. 사회에서의 성공이 연애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패하고, 외로움의 아우라가 제 몸을 감쌀 때 즘,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런데 취업도 연애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수한 노력이 있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은 연애 포기 상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결혼도, 출산도 포기해야 하는 '삼포'의 길로 들어설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슬프기 보다는 자연스럽습니다. 거기다가 혼자 놀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문화생활부터 생활양식까지 혼자인 게 편합니다.

초식남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저는 초식남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끔 육식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초식남입니다. 성격이 부드러운 것 같지는 않지만 연애에 대한 욕구 자체가 거의 사그라 들긴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감이 부족해 진 것입니다. 괜찮은 이성을 만나도 '나 까짓 게 감히 어떻게' 라는 자기검열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제 속에 있던 '연애나라'는 흔적도 없이 멸망했습니다.

돌아온 탕아

저는 살면서 의식 있는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대학교 때는 운동권 친구들을 보고 바보 같다고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촛불시위 때에도 심적으로 지지했지만, 시위에 참가하는 것보다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신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온 몸으로 빨아들일 정도로 순수했다면 순수했고, 영악했다면 영악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의 저의 모습입니다. 이런 제게, 정당 가입은 정말 꿈 밖의 일이었고, 한미 FTA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하는 스스로가 놀랍습니다.

원래 하고 싶던 일이 공무원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공무원이 되면 출세해서 보상받을 것이 있으면 보상 받고, 부모님도 기쁘게 해 드리자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덤으로 멋진 정책을 만들고, 정의로운 입법을 통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만화 같은' 저의 꿈이었습니다. 의도가 불순해서 인지, 시험에 합격할 수도 없었고,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뒤틀리고 나약한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잘난 것 없는 저는 다른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어느새 시쳇말로 '잉여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몇 개 없던 의자에 제가 앉지 못하고, 또 다른 의자를 찾으려고 보니 남은 의자도 거의 없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제서야 내가 경쟁의 승자가 되었을 때에는 보지 못한 것들, 아니 애써 무시했던 현상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내가 한 쪽 눈을 감고 보고 싶은 것만 봤을까? 이런 회의가 들었고,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우선 저의 탓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내가 못나서, 내 능력과 노력이 부족해서 경쟁에서 탈락한 것이라는 것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애초에 부족했던 의자가 더 늘어났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얼마 없는 의자를 뺏는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자가 왜 줄었는지, 어떻게 하면 의자를 더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패자부활전도 없는 경쟁의 패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합니다. 약해지고 나니까 그제서야 살 궁리하는 이기심이랄까요? 저는 한 쪽 눈을 감고 경쟁에 몰두 했을 때도 의도가 불순했지만, 두 눈을 뜨고도 여전히 불순한 의도를 감출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착하고 나쁜지는 뻔한 얘기일 것 같고, 분명한 것은 사회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제가 저를 비롯해 지금 사회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부산에서 열린 채용 박람회에서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뉴시스

녹색당이 저와 모두의 풀이 되기를

사회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고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보니, 연애보다 사회참여 활동이 더 재미있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초식남에게 즐겨 먹을 수 있는 먹이가 생긴 것입니다. 들판에 널린 풀은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제 입맛을 돋우게 만드는 풀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한나라당이라는 풀은 많기는 한데, 싹부터 노랗고 주변 사람들이 그걸 먹고 위독한 상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 풀은 제가 제일 경계하는 풀이 되었습니다. 민주당이라는 풀은 한나라당 풀과 같은 종인데 색깔만 달랐습니다. 지역에 따라 변화한 보호색 같아 보였습니다. 한나라당 풀과 민주당 풀은 독초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치명적인 독초.

독초를 제외하고는 먹을 만한 풀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이리저리 풀을 찾아 헤맸습니다. 몇 개 먹을 만한 풀을 발견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원체 입맛이 고급인지라 당기지 않더군요. 그러다 눈에 확 들어오는 풀이 있었으니 녹색당이란 풀이었습니다. 처음 그 풀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이란, 태양을 그대로 받은 듯이 생생한 초록의 윤기가 도는 게, 보기에도 건강한 것이, 먹으면 보약이 되고 건강한 피와 살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풀은 혼자만 먹기에는 너무 너무 아까워서 모두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사는 들판에 녹색당 풀이 워낙 적게 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운이 좋아서 발견한 것이지, 녹색당 풀을 구경도 못하고 죽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녹색당 풀을 왕성하게 번식시킬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들판은 너무도 아름다울 것이고, 그 들판 위에서 사는 사람들도 모두 건강해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풀뿌리 녹색당

앞서 녹색당을 건강한 풀로 묘사했는데, 저는 정말 녹색당이 건강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당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역이 주인공이 되고, 시민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나라 구석구석이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잉여로운 저는 왜 녹색당의 많은 가치 중 풀뿌리를 말하고 있을까요? 풀뿌리가 지금의 수도권 집중화와 그에 수반되는 청년실업 같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도권에 전 국민 중 절반이 몰려 살면서 일국의 모든 자원과 이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극도의 불균형한 상태에서는 다양성, 자연, 문화유산 등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각종 파시즘밖에 없을 것입니다.

수용능력(Carrying Capacity)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시라는 공간이 어느 정도의 경제활동과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인데, 수도권은 이 수용능력을 넘어선지 오래일 것입니다. 지방이 살아나야 우리나라의 굵고 작은 문제들이 풀릴 기미가 보일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잉여들을 해소하겠다고, 정부는 일자리에 목을 메고 있는 듯 보이는데, 그나마도 표면적 제스처에 그칠 뿐, 실제로는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외칩니다. 저는 이런 정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성장률이 아니라 지역이야." 지역이 살아나면, 모든 것을 빨아먹는 수도권 블랙홀도 약해질 것이고, 꼰대들이 걱정하는 이 나라의 이삼십대 잉여들도 더 이상 잉여롭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 지방을 살린다고 이전 정권처럼 중앙에서 퍼다 나르기 또는 외부자본의 침략적 투기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균형 발전' 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아래, 토건자본이 얼마나 많은 지역 공동체와 자연을 망가뜨렸습니까? 외부자본의 침입과 손잡은 토호들의 전횡으로 지역 공동체는 급속히 무너지고 무너진 공동체에서는 난민과 빈민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강원도만 하더라도 '레저산업', '관광산업'이라고 사탕발림하면서, 골프장, 스키장 이런 장난질을 칩니다.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자연과 파탄난 마을입니다. 최근에는 강릉의 구정마을이 그런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에 대체 왜 편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서울에서 뽑아먹고 지방에서 뽑아먹고, 쥐어짜낼 곳만 있으면 파고 드는 것이 토건자본입니다. 이대로 두다가는 신라 말, 고려 말, 조선 말과 같은 세기말적 현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 공동체와 풀뿌리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입니다. 뭐가 세워지고, 들어서는 가시적인 변화는 없겠지만, 느림의 미학과 함께 내실 있는 "질 높은 삶"이 구현될 것입니다. 언제까지 "크고! 빠르게!" 라는 21C 정신과 맞지 않는 구호를 외칠 것입니까? 지금은 작고 느린 정신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녹색당이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자연히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라는 무시무시한 조어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청년들이 출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탈핵, 생태적 지혜, 풀뿌리 민주주의…. 아!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렙니다. 녹색당이 지향하는 가치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익숙해지는 사회, 우리는 만들 수 있습니다. 느리지만 분명히 변화할 수 있습니다. 힘내요,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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