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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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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 바벨탑

[여기가 용산이다②] 아주 오래된 골목길

내 가난한 발바닥은 아주 오래된 골목길을 기억하고 있다. 신발 속에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은, 오래된 그 골목길에서 보았던 목련과 장미와 벽화들이었다.

내 가난한 발바닥을 부러워하던, 사랑하던 한 개의 발을 가진, 오래된 여인이 있었다. 한 개의 발로, 두 개의 부끄러운 발을 가진 나보다 풍요롭게 살던 여인이었다.

우리 세 개의 발은 아주 오래된 골목길을 포근히 감싸던, 아주 오래된 집의 창문을 바라보곤 했다. 그 집까지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처럼 꼬이고 꼬인 골목길을 돌고 돌아가야 했다. 경상도에서 그곳 서울까지 걸어온 그 풍요로웠던 발은, 내 남루한 코트 자락보다 넓고 넓은 대문을 가진, 그 오래된 집의 창문 앞에 자주 서 있곤 했다.

감자, 나는 저런 집에서 살고 싶어. 네 점쟁이가 마흔만 넘으면 잘 산다고 했잖아. 그때 저 집사서 살면 되겠네. 감자, 나는 저 집 1일층에다가는 꽃집을 열고, 2층에는 살림집 그리고 삼층에는…….

그 집 마당 한 곳에 서있던 목련이 떨어질 즈음에 내 가난한 발바닥은 홀로 그 집 앞에 서있었다. 시를 썼던 오래된 여인은 부동산 관련 일을 시작했다. 목련이 탐스럽게 피던 그날 밤에, 감자, 여기 북아현동에 주상 복합 아파트랑 임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대. 에이씨, 내 저 집 사면 우리 감자 3층에다가 소설만 쓸 수 있는 작업실 하나 줄라꼬 했는데.

▲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 ⓒ프레시안

이제 내 가난한 발바닥이 멈춰 서 있는 곳은, 굴레방 다리 밑 좁은 곱창집 안이다. 벽화를 그리던 미술학부 여자아이는 건너편 탁자에 홀로 앉아, 떠나간 옛 남자를 생각하며 울고 있다.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다는 곱창집 사장님은 건너편 아현 시장에서 여기까지 쫓겨 올라와 빈 술병을 치워준다. 사라지는 옛 추억들을 겨우 견디며 좁은 곱창집에는 여자와 나 그리고 오뎅국을 끓이는 사장님이 있다.

나는 쫓겨날 식당도, 집도 없다. 그저 떠돌이로 지내고 있다. 내가 가진 재산은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빈 발바닥과 그 발바닥이 밟고 있던 오래된 기억들뿐이다. 발바닥이 가 닿았던 곳에서는, 이제 불길이 꺼져버렸고, 남은 자들과 그리고 남길 바라는 자들의 오래되어 슬픈 노래들만이 간간히 들리고 있다.

신은 죽어 변질된 신으로 부활했다. 부활의 신을 찬양하는 무리들은 죽은 신들이 지배하던 땅에 새겨진 발자국을 지우고 그들의 바벨탑을 세우려 하고 있다. 지상에 가득 덮인 부활의 신을 위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를 그 탑들 밑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오래된 언어로 제각기 읊조리며, 하늘을 보고, 이제 더 이상 찍히지 않는 땅바닥을 보며 제각기 흩어져 가고 있다.

이 미친 축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된 기억의 회상뿐이다. 그러나 그 기억을 끄집어내 줄, 그녀와 목련과 장미와 벽화와 그리고 창가의 불빛은 바벨탑 밑으로 뭉개 사라져 간다.

부활한 신은 지상의 무리들에게 서로 다른 언어로 살아가는 법을 강요하고 있다. 나의 '기억'을 당신들은 무엇이라 인지하는가? 비루한 나의 오래된 재산들은 이제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가? 당신들이 열광하는 그 신들에게 제발 물어봐 달라. 나의 언어는 당신들과 달라 물을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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