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외부 충격 이전에도 '경제 회복' 여부를 놓고 정부와 일반 서민들은 서로 상반된 입장이었다. 이런 간극은 정부의 과장과 왜곡도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지만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분절적인 경제 구조가 근본 원인이다. 수출 증대, 경상수지 흑자, 부동산 및 주식 등 자산가격의 상승, 이런 변수들에 바탕을 둔 높은 경제성장률 등 거시 경제지표가 더 이상 일반 서민들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경제지표와 유리된 서민경제, 현재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레시안>이 '근로빈곤(working-poor)' 문제에 집중하려는 것은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동안 일부 언론에서 이 문제를 산발적으로 다룬 적은 있지만 누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워킹푸어'가 됐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또 <워킹푸어 : 빈곤의 경계에서 말하다> (데이비드 K. 쉬플러 지음, 나일등 역, 후마니타스 펴냄), <워킹푸어> (카도쿠라 다카시 지음, 이동화 역, 상상예찬 펴냄)처럼 미국과 일본의 워킹푸어 사례를 다룬 책은 있지만 한국의 워킹푸어를 다룬 책은 아직 없다. 누가, 왜, 어떤 이유로 워킹푸어가 됐는지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지만 각 나라의 경제 현실에 따라 차이점도 있다.
또 오는 6월에는 이명박 정부의 '중간 평가'라 할 수 있는 지방선거가 있다. 경제정책에 대한 논의는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에 비해 제한된 의미를 갖겠지만 여전히 중요한 쟁점이다. 수치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다수 서민들의 일상은 진짜 위기가 무엇인지,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처방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편집자
사실 과거에도 가난한 이들의 대다수는 일하는 이들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을 하는 청소년들, 길거리 한 구석에서 좌판을 깔고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들...'가난=게으름=무능력'이라는 통념은 입증되기 힘든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가난'과 '일'은 전부터 반드시 비례하는 변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워킹푸어'(working-poor. 근로빈곤층) 문제는 분명 이전과 차별성을 갖는다.
워킹푸어란? 워킹푸어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1990년대 미국에서 노동유연화 전략에 따른 문제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이 말은 미국의 극심한 소득 양극화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워킹푸어 문제는 미국, 일본, 유럽국가 등 대다수 국가의 '공통적인 고민'이 되고 있다. 특히 '버블붕괴' 이후 10년간 장기침체를 경험한 일본은 고이즈미 정부가 경제발전 방안으로 미국식 모델을 채택하면서 워킹푸어가 급증했다. 고이즈미 정부 기존의 '종신고용모델'을 버리고 미국식 노동유연화 정책을 받아들여 비정규직을 대폭 늘렸다. 2008년 기준 일본의 워킹푸어는 전체 임금근로자의 26.2%로 추산된다. (현대경제연구소, 2010년 1월15일, '일본 워킹푸어 현황과 시사점') 워킹푸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나라마다 다르다. EU에서는 근로빈곤층을 중위소득의 60% 미만인 가구에 속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위소득은 경제활동인구를 소득 순으로 나열했을 때 가장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얻는 수입을 말한다. 미국은 미 연방이 정한 빈곤선(FPL), 일본은 3인 가구 기준 연간소득 186.3만 엔 이하를 기준으로 잡고 있다. <주요국에서의 근로빈곤층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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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규모의 문제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지난 15일 2008년 기준 워킹푸어의 숫자는 총 취업자 2357만 명 중 273만 명(11.6%)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는 2008년 3인 기준 최저생계비인 102만6603원 이하를 받는 근로자를 기준으로 한 수치다. 유럽연합(EU)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빈곤선인 중위소득 60% 미만을 기준으로 할 경우 이 수치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증가속도의 문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7월 발표한 '근로빈곤층 실태진단' 논문에 따르면, 2008년 하반기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2009년 상반기에 워킹푸어가 14만 여명이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1997년 외환위기를 포함해 2003년 카드대란과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 세 번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워킹푸어의 숫자는 급증하고 있다.
셋째, 구성의 다양성 문제. 노인, 장애인, 여성가구주 등 전통적인 빈곤층 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워킹푸어를 구성하고 있다. 워킹푸어가 급증하게 된 배경에는 세계화가 있다. 사람과 자본의 이동이 국경이라는 범주를 넘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가난의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그 해결에도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한 나라 안에서 높은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있는 일자리를 마련하고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고, 낮은 임금으로 다른 나라의 일자리와 경쟁하도록 강요된다.
넷째, 빈곤 탈출 가능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빈곤의 대물림' 구조가 더 공고화 되고 있다. 특히 교육은 이전에는 한국 사회에서 '부의 대물림'을 상쇄시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오히려 교육으로 인해 '부의 대물림'이 고착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섯째, 사회적 박탈과 배제, 그리고 그 결과인 비가시화. 사회적 박탈이나 배제는 개인이 그 사회에서 널리 인정되는 음식, 의복, 주거 조건 뿐 아니라 문화 활동, 대인관계 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빈곤은 이런 사회적 박탈이나 배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박탈과 배제가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유령'이 된다.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 언론 등 공론의 장에서도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나 이해관계는 묻히기 쉽다.
▲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는 노동유연화를 낳았다. 고용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실업과 빈곤의 공포는 일상이 됐다. ⓒ프레시안 |
여섯째, 전염에 대한 공포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 공포는 워킹푸어 뿐 아니라 대다수 중산층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현 경제질서를 유지하는데 매우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는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기업간 무한 경쟁을 유발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생산비용을 줄이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비용을 가장 먼저, 가장 과격하게 줄인다. 비정규직의 급증이 그 결과다.
윤진호 인하대 교수는 "워킹푸어의 증가는 노동시장 양극화의 결과"라면서 "고용, 임금, 근로조건 모든 것이 양극화되면서 중간층이 사라지고 모두 하향 평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대기업 노동자의 90% 가까이 됐으나 지금은 50%도 안 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언제든 잘릴 수 있는 비정규직의 확대는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실업과 빈곤의 공포가 일상이 된다는 얘기다. 이런 공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것만이 아니다. 실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퇴근 후에도 업무를 걱정하고 회사일 때문에 사생활을 포기하고 심지어 건강까지 포기하는 '슈퍼직장인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10명 중 4명이라는 조사도 있다. 또 많은 부모가 자신의 노후의 삶은 포기하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해체' 위험성까지 감수하면서 자녀를 '교육 이민'을 보내거나, 서너살부터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내몰아 입시 경쟁 체제에 편입시키는 상당수 중산층의 삶도 경제적 공포와 무관하지 않다.
워킹푸어의 증가는 나라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워킹푸어는 충분한 소비 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국내 소비 부진가 부진해지면 기업의 생산 활동 역시 정체될 수밖에 없다. 나라 경제 전체가 축소 균형화된다.
정부의 세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세금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 계층이 증가한다면 정부의 재정은 더 악화된다. 결국 재정재건을 위해 세수를 늘리려 한다면 그 부담은 부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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