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을 뚫는 담배"라는 마술이 있다. 오백원짜리 동전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도록 잘라낸 다음 스프링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다시 붙인다. 관객 중 아무나 골라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와 담배 한 개비를 빌린다.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혹해서 빌린 동전과 준비한 동전을 바꿔치기 하고서, 담배로 동전을 뚫는 모습을 보여준다. 담배가 다 뚫고 지나간 다음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면서 동전을 바꿔치기한다.
제이미 이안 스위스라는 마술사는 이 마술을 시연하면서, 담배가 실제로 동전을 뚫고 지나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관객들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관객 한 사람이 "기막히다. 그런데 구멍 뚫린 동전은 어디서 구하는 거요?"라고 반응을 보였다. 마술의 비결을 알고 있어서 나온 말이 아니고, 담배가 동전을 정말로 뚫고 지나가는 장면이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눈치를 채이고 만 것이다.
정치에서도 너무나 완벽한 그림은 사기이기가 쉽다. 예컨대 임기 5년짜리 단임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하면, 그냥 허풍이다. 그런데 유권자가 그런 허풍을 듣기 좋아한다면 어떨까? 다시 말해 담배로 동전을 뚫는 마술사를 보고 관객들이 초능력자라고 숭배하기 시작하면 어떨까? 자기는 초능력자가 아니라고, 단지 구멍을 뚫어서 준비해 둔 동전과 빠른 손놀림으로 잠깐 눈을 속였을 뿐이라고 고백한다면 정직한 사람이겠지만, 그렇게 정직한 사람이라면 마술사로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치판에서는 과장이나 비약이나 허풍이 불가피하다. "매년 7% 경제성장, 일인당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내세운 이명박의 구호만이 과장이 아니라, "파벌주의, 지역주의, 금권정치를 타파하고 원칙과 상식에 근거한 통합의 정치를 펼칠 것이며, 특권과 차별을 시정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해 공정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한 노무현의 구호도 과장이다. 노무현이나 이명박이 좀 의욕적인 성격이라 과장의 정도가 남보다 높을지는 모르지만, 박정희의 "민족중흥"이나 전두환의 "정의로운 사회"나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준비된 대통령" 따위 구호에도 모두 과장과 비약과 허풍이 섞여 있다. 요컨대 정부를 맡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청사진을 가능하면 장밋빛으로 칠해야 하는 것은 상품을 광고하면서 약점을 부각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천박하다고 일부 고상한 척하는 지식인들이 아무리 개탄하고 힐책해봤자, 선거판에서 선전이라는 요소가 싹 사라지고 "진정한 진실"만이 남을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윤리적 덕목이 항상 그렇듯이, 정직이라는 덕목 역시 무한정 추구하기만 하면 되는 항목이 아니고 다른 일들과 균형을 잡아야 할 사항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정직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한다손 치더라도 (물론 그렇게 될 리도 당연히 없지만), 언제 어느 정도로 어떤 가치를 희생하면서 정직해야 하는지는 각자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수천만 명의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데 정책의 세세한 내용들을 분석한 수천 페이지 보고서를 보여줄 수는 없다. 더구나 무엇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급선무다. 정치판의 구호란 그렇기 때문에 과장과 허풍이 섞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렇게 보면, 구호에서 과장을 빼도록 하기보다는 유권자의 수용능력과 분별력이 민주주의의 유지에 핵심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결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체제의 역량은 정확히 유권자들의 역량 이상일 수도 없고 이하일 수도 없는 것이다. 가능한 한 자기 상품의 장점을 부각하기 마련인 상품광고를 보면서 건강한 소비자라면 유혹에 빠지지 않고 냉정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하듯이, 서로 다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정치광고의 홍수 속에서 유권자들이 분별력을 발휘해야 세상이 구원은 고사하고 조금이나마 나아질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분별력이란 무엇보다 허풍과 과장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하고, 이런 능력이 생기려면 과도한 기대에 매달리지 않는 냉정한 자세가 필수적이다. 소원과 현실, 희망과 실재, 느낌과 사실을 구분하는 능력, 다시 말하면 내 맘에 비친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보고 있는 나 자신까지를 상대화할 수 있는 자의식이다. 한국인들에게도 물론 자의식은 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객관식 시험을 통해서, 모든 문제에 미리 정해진 모범답안이 있다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의 틀에 자신을 비춰보는 폐쇄적인 자의식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에 모범답안이 어딘가에 있다고 어릴 때 객관식 시험 보던 상황을 모델로 생각하면, 머리 좋은 사람이 그것을 찾아낸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그러니까 고용, 빈곤, 교육, 지역균형, 부동산 투기, 집단이기주의, 언론계의 공정한 질서, 대북관계, 소고기 수입, 기타 등등, 끝없이 이어갈 수 있는 정책과제들을 다 고려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 중에서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몇 가지만을 고려하는 사람이든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보는 문제들을 정답을 찾아서 해결해주기를 정치인에게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예컨대 고용문제나 교육문제가 "해결된 상태"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고용이나 교육에 관해 불만이 없어진 상태일 수는 없다. 기껏해야 지금보다 불만이 좀 줄어든 상태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흔히 완벽주의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들 말한다. 마이클 조단이나 김연아 등,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사람들이 완벽을 추구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전인미답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이클 조단이든 타이거 우즈든 김연아든, 통속적인 표현으로 완벽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중요한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만일 그들이 뜬구름 잡는 식으로 형체가 불분명한 "완벽"을 쫓았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조단이 추구한 것은 "완벽한 농구"가 뭔지가 아니라 한 번의 점프와 한 번의 드리블을 좀더 잘하는 기술이고, 김연아가 추구한 것도 "완벽한 연기"가 아니라 한 번의 턴과 한 번의 자세를 개선해서 이어가는 솜씨인 것이다. "완벽을 추구했다"는 소리는 옆에서 구경꾼들이 아양 떠는 소리 또는 그들의 연습과정을 대략 서술하는 문구일 뿐이고, 순간순간에 "완벽을 추구한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절대 땀나는 연습은 할 수 없다. 한 번의 점프, 한 번의 스텝, 한 번의 스윙에서 조금이나마 개선의 여지를 찾아 점프와 스텝과 스윙을 한 번 더 해보는 것이 연습인 것이다. 실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순간순간 필요한 동작에 집중해야지, "완벽한 경기"를 보여준다는 마음을 먹었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집중력이 흩어지기 십상일 것이다.
최종 목표는 장기적일 수도 있고 단기적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할 일은 추상적일 수가 없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할 때 "완벽"을 운운한다는 것은 음풍농월로 세월이나 보내자는 말과 같다. 완벽주의의 폐해에 관해서는 심리학자들이 수많은 논문과 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체계적인 해설은 접어두고, 여기서는 미루기, 남 탓하기, 은폐, 자기비하만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장기목표와 단기목표, 그리고 그 사이의 연관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막연한 완벽만을 추구하다 보면, 어떤 일도 진행을 못하고 중간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게 된다. 넘어가도 될 일과 꼼꼼히 챙겨야 할 일이 분별되지 않기 때문에, 매사에 완벽을 기한답시고 주저하느라 발걸음을 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루기다.
남 탓하기란 전형적으로 "내 눈에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에 티끌을 탓한다"는 말이다. 비판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담론이 되려면, 상대방이 놓친 지점들을 지적하는 형식으로 상대의 입장을 더욱 정교하게 구성할 기회를 준 다음 내 입장과 공개적으로 대조함으로써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통로를 지향해야 한다. 즉, 쌍방간에 어디서 왜 차이가 나는지를 서로 명확하게 조명함으로써 상대의 진의를 이해하고, 나아가 공론으로 하여금 쌍방을 조화시킬 여지가 없는지, 그리고 만약에 조화의 여지가 없다면 그 시점에서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쌍방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보니 선택을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지 등을 결정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완벽주의적 심성에서는 공론의 결정을 기다릴 여유가 없이 자기 자신도 내용을 분명히 모르는 채 "완벽"이라는 문구에다 자신의 허망한 자아를 실어서 우겨대기 때문에, 비판의 목적이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에 집중된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느냐"는 심보로 논쟁에 임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구린내가 나는지는 돌아볼 겨를이 없게 된다.
담론을 통한 공론의 선택에 자기를 맡기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초적인 욕구대로 공론을 전횡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나는 구린내는 무조건 덮어야 하는 것도 완벽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서양 중세 교황청이 주장했던 무오설(無誤說, infallibility)은 히틀러,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등, 독재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머리가 빈 사람일수록 가짜 학위를 탐내듯이, 옳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는 자일수록 옳다는 간판을 갈망하게 되는 이치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독재체제는 권력에 의한 은폐라는 곰팡이를 먹고 기생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 존심(存心, self-esteem)은 - 자존심(自尊心, pride)이 아니다 - 자라날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하고 갈수록 처참하게 훼손된다. 거짓말, 자기기만, 그리고 억지가 갈수록 자아를 해쳐서 품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살인자에 폭군이라면 잡혀서 벌을 받지 않을수록 더욱 비참해질 뿐이라고 한 취지가 정확히 이것이다. 자신을 존경하지 못하면 당연히 다른 사람 누구도 존경할 수가 없는데, 애당초 존경심이라는 것이 없는 자신을 스스로 존경하게 될 가능성은 갈수록 낮아지는 악순환이 여기 있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몰입하여 추구할 대상을 구할 수 없게 만드는 황당한 완벽주의가 이런 자기비하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여러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정치담론에서 이런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실례는 거의 매일 무수히 발생하고 있는 만큼 굳이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소통이 정책의 내용보다 중요하다는 내 입장과 완벽주의가 서로 대립하는 지점들을 예시한다면 내 의도가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내 입장은 이명박 정부를 직접 비판하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진보/보수의 구분과는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 팽배한 주류의 정치의식에 대한 비판임을 강조할 필요도 있다. 이명박 정권이 소통을 무시한다는 지적은 이미 바로 앞에서(제2장 제4절의 서두) 명시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주류의 정치의식에 이런 공허한 완벽주의가 작용하는 예를 둘만 들기로 한다. 민주당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명성" 논쟁과, 황석영이 이명박을 "중도실용"이라고 부르며 다가간 일에 대한 좌우의 반응이다.
민주당 지도부가 정책정당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뉴민주당 플랜"이라는 것을 고안하고, 거기에 성장주의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당 안팎에서 비판이 있는 것은 일견 흔한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추미애 의원은 이를 두고 "한나라당 2중대"라 비난했다고 한다(☞ "추미애 '뉴민주당 플랜' 읽어보지도 않고 비난", <뉴스캔>, 2009. 5. 15.). "신자유주의"를 배척하지도 않고, "진보"를 표방하지도 않은 채, 어정쩡하게 "복지"와 "성장"이라는 토끼 두 마리를 다 쫓으려 한다는 비판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뉴플랜"뿐 아니라, 누가 어떤 정책을 내놓든지 이견은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견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이든 전면적인 비판이든 적극적인 대안과 구체적인 반대이유가 제시되지 않는 차원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허망한 완벽을 요구하는 도깨비장난에 불과하다.
▲ 추미애 의원. ⓒ연합뉴스 |
자기 당에 대고 "한나라당 2중대" 따위 저주를 퍼붓는 태도는 공허한 완벽주의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결과다. 당의 노선에 대한 비판은 마땅히 당내 논의기구에서 절차를 요구해서 조목조목 분석적으로 이뤄져야지, 저런 식의 무절제한 언사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미숙한 자기현시에 불과하다. 적어도 "한나라당 2중대"라는 판단에 진지한 의미가 조금이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그 말을 하기 전에 추미애는 탈당부터 고려했어야 일관적이다. 성급한 과격파들의 정서에 기대 자기존재를 과시하려는 언론 플레이도 물론 정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었다면 유머가 섞인 조롱으로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고, 그렇게 했어야 한다. 추미애의 말에서 유머보다는 심술이 더 많아 보인다는 점에서 바로 나는 그가 허황한 "정답"의 프레임에 갇혀서 논의되는 쟁점과 자신의 존재를 분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황석영에 대한 좌우파의 반응 역시 전형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자기가 맘대로 만들어 놓은 기대에 비춰서 거기에 맞지 않는다고 공격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황석영이 이명박과 협조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물론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홍석현이 노무현에게 기용되었을 때 놀란 정도 이상으로 황석영이 이명박에게 기용되는 것이 놀랍지는 않다. "이문열을 제치고 왜 황석영이냐"는 복거일의 불평은(☞"이문열 제치고 황석영? ... 배은망덕 MB", <프레시안>, 2009. 5. 15.) 이 나라의 자칭 "뉴라이트 자유주의자"들이 사실은 관직을 둘러싼 관심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지만, 조선시대 관직을 둘러싼 논쟁이 으레 상대를 완벽의 기준에 비춰 악랄하게 씹어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상기하면 이 장의 논의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황석영의 "변절"을 공격하는 진보진영의 실망어린 목소리들 역시 공공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개인의 문제가 쉽사리 섞여버리는 미분화된 평면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평면적인 사고방식이 문제와 정답을 직선적으로 연결하는 선험주의에서 파생한 공허한 완벽주의의 모습이다. 황석영이 이명박과 협조한 일에 관해 황석영 개인의 처신 말고 공적인 결과를 생각한다면, 예컨대 그가 "유라시아 특임대사"를 맡아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자기가 그 일을 맡아 남북관계에는 어떤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지, 황석영 기용을 기점으로 정권의 토건주의적 성향이 조금이나마 완화될지 등을 논의할 수 있다. 공허한 완벽주의의 틀에 갇혀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이 그래서 되느냐"는 수준의 불평을 일삼는 버릇에서 벗어난다면, 황석영을 인간적으로 매도하는 일 말고, 그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를 논의할 대목들이 굉장히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몽골연합론"이 어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황석영과 이명박의 상호이익을 이어주는 단순한 말의 고리 이상으로는 전혀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황석영이 이명박과 제휴해서 아예 우파로 말뚝을 박을지도 모르고, 이명박을 약간이나마 개명시킬지도 모르며, 몇 달 후에 이용만 당한 채 버림받을 수도 있고, 그 여파로 정권에 대해 과격한 반대를 추구하게 될 수도 있다. 이밖에도 무수한 가능성들이 있는데, 이런 모든 결과들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 아니라 두고 봐야 알 일일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보나마나 뻔하다"는 식으로 지금 온갖 악담과 매도를 마구 뱉어내는 작태들은 일방적인 짝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분풀이하는 정서보다 성숙하다고 봐줄 여지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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