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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재 강국의 지식 사회? 그 요란한 위선"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 ⑧]

인재 강국의 지식사회?

"한국은 3면이 바다이고 70%가 산이어서 별로 뻗쳐나갈 데가 없는 데다, 석유 등 천연 자원도 별로 없기 때문에, 한국이 살 길은 '인재', 즉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활용해 수출을 많이 하는 길밖에 없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1968년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이후 십여 년 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교과서와 참고서에서는 물론, 담임선생님 말씀, 월요일과 토요일 운동장 조회 시간에서의 교장 선생님 말씀, 어른들 말씀,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뉴스 시간에 하던 이야기들, 이 모든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들었다. 우리나라가 살 길은 오직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밥 먹듯이' 자주 들었다. 아니, 아마도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보다 더 자주, 더 강도 높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세뇌교육'의 핵심이던가. 그래서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 속는다.

얼핏 듣기에 앞의 말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 그러나 현실은 불행히도 '사람을 함부로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마치 경영학에서 '인적자원관리(Human Resources Management)'가 급부상하면서 인간 노동력을 비용(cost)으로 보던 관점이 아니라 자산(asset)이나 투자(investment)로 보는 관점을 강조한 반면, 실제 현실에서는 핵심 노동력과 주변부 노동력으로 분할 통치하는, 황당한 결과를 초래한 것과 비슷하다.

따지고 보면 위 인용문은 수출을 통해 돈을 벌고자 했던 기업과 그 근처에서 떡고물을 노리던 극소수 사람들의 입장만 반영하고 있다. 그런 논리로 '경제성장'을 하기 시작한 지 50년이 된 지금 그간의 과정을 솔직히 성찰하면 잘못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첫째, 모든 나라가 동일한 천연자원을 다 가질 수 없다. 각 나라 나름의 특이한 천연자원이 있기 마련이다. 삼면이 바다이고 70%가 산이란 것도 어떻게 잘 보면 고유의 소중한 천연자원이다. 이미 윤구병 선생이 <조그마한 내 꿈 하나> 및 <잡초는 없다>에서 지적한 바 있듯, 동, 서, 남쪽 바다에 온갖 해산물을 기르고 오염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만 한다면 '무한히' 해산물을 건져 올릴 수 있다. 또 70%의 풍부한 산에 온갖 좋은 나무를 심고 약초와 나물, 꽃을 심거나 길러 조심조심 활용하기만 해도 '엄청난' 산림자원과 먹을거리가 나온다. 삼면의 바다와 70%를 단점으로만 보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장점으로 만들려는 컨셉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울창한 숲을 활용하여 먹고 살 길을 잘 개척했고, 스위스는 넓은 평지와 구릉지를 잘 활용하여 관광과 농축산업으로 먹고 살 길을 개척했다. 반면에 자원이 많은 나라는 제국주의 침탈로 오히려 시달림을 받는다는 '자원의 역설'까지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늘 타자의 장점을 부러워할 줄만 알았지 우리의 장점을 들여다볼 줄 몰랐다. 오히려 그 장점을 이제는 모두 망가뜨려버렸다. 금수강산이 오염강산으로, 넓은 농경지가 공장과 고층아파트 단지로 둔갑해버렸다. 애국가에 나오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파괴해버렸으니 "하나님이 보우하실" 땅이 더 이상 없다. 이제 애국가도 바꿔야 할 판국이다.
▲ 시간강사의 정당한 권익 향상을 위해 노조 결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김영곤

둘째, 한국의 살 길이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 얼핏 사람을 중시하는 전략을 채택한 것 같지만, 사실상 사람을 헐값의 노동력으로 이용만 해먹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인재'라는 말조차 결국은 써먹기 좋은 '인간 목재'가 아닌가. 1960-70년대의 전태일이나 동일방직 노동자의 삶, 1980-90년대의 현대자동차와 대우조선 노동자들 삶 속에 상징적으로 나타나듯, 한국의 노동자들은 무슨 화려한 기념식 같은 데서 '산업전사' 또는 '수출역군'으로 위선적 칭송을 받을 때만 존중받았지, 일상적 노동과정이나 노사관계, 사회적 삶 속에서는 늘 푸대접받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의 활성화 이후 그나마 노동자의 권익이 신장되긴 했지만 여전히 장시간노동과 비인간적 노동조건에 시달린다. 비록 임금이 오르긴 했지만, 물가 상승과 필수 지출의 증가로 실질임금 효과는 그렇게 높지 않다. 특히 1990년 이후 급증한 비정규직 노동자나 이주노동자들은 마치 1960~70년대의 노동조건을 재현하는 듯하다.

셋째, 자원 부족과 인재 강조를 통한 '수출 지향적 경제개발' 전략 자체의 문제다. 현재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70% 이상이다. 특히 식량의 자급률은 쌀을 포함해서 25% 정도이고 쌀을 빼고 석유의존도를 감안하면 순수한 자급률은 5%도 안 된다고 한다.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5%도 안 되니 이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가? 1960년대 초에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에서 2007년 말 2만 달러로 약 250배 부자가 되었으나 그것은 돈벌이 차원의 이야기고, 살림살이 차원에서는 자립 능력이 5점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수출 지향적 경제란 우리가 가진 자연과 인간의 생명력을 효과적으로 추출하여 상품화하여 세계시장에 팔아 달러를 많이 번 다음 그 돈으로 살림살이를 해결하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전략이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자연과 사람의 생명력을 무자비하게 추출하여 돈벌이는 250배 성장했으되, 자연과 사람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말았다. 1997년의 '외환위기' 내지 'IMF 사태'는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 패러다임의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근본적 반성 위에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함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그 뒤 10년은 불행히도 새 출발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안고 포장만 새로 한 채 맹목적으로 앞으로 달려가는 꼴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지식사회' 또는 '지식 기반 경제' 같은 새 포장이 등장했다. 1996년 OECD의 정의에 따르면, 지식 기반 경제란 "지식과 정보의 창출, 확산, 활용이 모든 경제 활동에서 핵심이 될 뿐 아니라 국부 창출과 기업 및 개인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경제"다. 한국에서도 산업연구원에서 2000년에 <지식 기반 경제의 이론과 실제> 및 <지식 기반 경제의 인력 정책> 등 연구 결과를 발간하면서 이 담론을 주도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정부 아래서 '지식 격차' 또는 '디지털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담론이 적극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식사회 또는 지식 기반 경제라는 담론이 결국은 새로운 차원으로 인간 노동력이 가진 생명력을 추출하려는 시도라 본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동안 '틈새'로 존재하던 노동력의 지적, 정신적 차원을 자본의 이윤 증식에 십분 활용하려는 시도다. 결국 이것 또한 '주어질' 미래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점만 강조했지 '어떤' 미래 사회를 '창조'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아닌 것이다. 이것이 정책적으로는 '신지식인'의 강조, '직업능력 개발'의 강조로 나타났다. 마치 약 100년 전 F. W.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가 인간 노동력의 육체적, 물리적 측면을 자본 증식에 십분 활용하려는 시도였다면, '지식 기반 경제' 또는 '지식 경영'은 인간 노동력의 지적, 정신적 측면을 자본 증식에 전적으로 동원하려는 시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게다가 '디지털 격차' 또는 '지식 격차'를 줄이자는 구호조차 일견 그 인간적, 보편적, 평등적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선진 독점대기업들이 먼저 개발한 지식이나 디지털 기술을 범지구적으로 마케팅하려는 것이라는 혐의를 벗기는 어렵다. 하드웨어는 공짜로 또는 저렴하게 깔아주고 소프트웨어는 '저작권' 등을 이용, 고가로 팔아먹는 행위가 바로 이를 증명한다.

지식 기반 경제의 조건과 비정규 교수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지식 기반 경제 내지 지식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입장에서 본다 하더라도, 현실의 모습은 전혀 그런 담론을 구체화할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하다. 그 대표적 측면이 오늘 한국의 대학이 가진 모습이다. 대학은 연구와 개발, 비판과 창조를 그 존재 이유로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식 기반 경제를 논하는 데 있어 대학은 일정한 구심 역할을 해야 한다. 지식사회 또는 지식 기반 경제에서 말하는 광의의 '지식'이란, 우리가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세 가지 큰 공부, 즉 지식, 기술, 지혜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우선, 큰 공부(大學)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영어와 컴퓨터, 경영 정도만 주로 공부하고 졸업한다. 큰 공부를 해야 하는 대학에서 비싼 돈을 내고 작은 공부만 한다. 다음으로, 무엇이 큰 공부인가 하는 것인데, 대학은 단순한 '졸업장 공장'이 아니라 그리하여 '기득권층 진입의 통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적극 해결하여 삶의 희망과 사회적 행복을 드높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큰 공부의 내용이다. 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규명하고 설명한 뒤, 그것을 고치고 바꾸기 위한 지식, 기술, 지혜를 연마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선 학생들과 선생들은 그런 큰 공부와 바른 삶에 대한 의욕에 불타야 한다. 오늘날 대학은 '진리, 정의, 자유, 창의, 사랑, 봉사' 등 요란한 구호만 있지, 실제는 '돈, 성적, 학점, 건물, 상업, 경쟁' 등이 판을 친다. 바로 이 지점에 비정규 교수 문제도 서 있다. 대학 강의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차별' 대우를 받는 비정규 교수의 광범한 존재 자체가 이미 대학들의 요란한 위선적 구호와 모순된다. 그리고 비정규 교수가 지식, 기술, 지혜를 창출, 이전, 공유, 활용하는 전반적 과정을 하나씩 따져 보면 그 구조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결코 지식 기반 경제를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시간강사 문제에 갇혀 있는 지식사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광수

지식 기반 경제를 실제로 만들기 위한 '지식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지식의 창출, 이전, 공유, 활용이 개별 조직이나 사회 전체에서 유기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 이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비정규 교수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식 기반 경제에 일종의 '아킬레스 건'이 될 것이다.

첫째, 지식의 창출 면을 보자. 지식 창출이란 지식의 개발, 획득, 임차, 융합, 적응, 접속, 연결 등 다양한 과정을 통해 명시적 지식이나 암묵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조직 구성원들이 이러한 지식 창출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면 그 구성원들의 신분과 처우가 안정화되어야 한다. 언제 계약 해지될지 모르거나 생계 해결에 불충분한 처우가 상존한다면 그 누가 그 조직을 위한 지식을 적극 개발, 획득, 융합,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겠는가? 게다가 지식의 창출에 필요한 것이 창의성 아닌가? 창의성은 결국, 다양성과 개성을 충분히 인정받을 때, 그런 다양성과 개성을 맘껏 발휘하더라도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이 확보될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활성화한다. 그러나 비정규 교수의 경우 그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전제 조건들이 결핍되어 있다. 또한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사람들의 의사소통 능력, 문제 분석 능력, 문제 해결 및 창의적 사고, 인간관계 능력, 협상 및 조정 능력, 자기 경영 능력 등이 강조되는데, 이런 제반 역량의 창출은 조직 구성원들 사이의 일상적, 항상적 대면관계가 충분하지 않다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비정규 교수의 경우 이런 조건이 결여됨으로써 학생들이 발전시켜야 할 제반 주체적 능력의 고양에 큰 도움을 주기 어렵다.

둘째, 지식의 이전 및 공유 측면을 보자. 작은 조직이나 개인에 의해 창출된 지식은 더 넓은 범위로 이전되고 공유되어야 비로소 지식 사회, 지식 기반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지식과 정보의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유통 체계를 확충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비정규 교수의 경우에는 대학(원)생들이나 정규 교수들과 일상적, 대면적, 안정적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아 신뢰 형성의 결핍으로 지식의 이전이 원활하지 못하다. 또한 비정규 교수들은 고정된 연구 공간이 없고 생계를 위해 '유목민'처럼 이동해야 하는 처지이므로 지식 이전과 공유에 필요한 공통의 시간, 공통의 공간, 공통의 관계를 갖지 못한다. 게다가 정규 교수와 비정규 교수 간 신분 격차는 상호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경계선'을 강화함으로써 지식 보유의 '비대칭성'과 지식 이전의 '불균등성'을 초래하기 쉽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로 인해 지식 이전과 공유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게 된다. 결국, 지식 흐름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는 동시에 기존의 공유된 지식마저 '자기만족의 덫'에 빠지기 쉽다. 결국 그 조직이나 사회는 건강성이나 생동성을 잃기 쉽다.

셋째, 지식의 활용 측면을 보자. 창출, 이전, 공유된 지식들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실제로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비정규 교수의 경우, 연구와 강의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고 특히 학생들이나 다른 정규 교수들과의 관계 또한 불연속적이다. 따라서 연구와 개발, 토론과 비판, 창조와 실험 속에서 창출된 지식이 활용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학술진흥재단 차원의 불연속적, 일회성 지원을 통한 지식의 활용은 전시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설혹 그것이 개별적으로는 비중 있는 결과를 제출한다 할지라도 연속성과 체계성, 축적성을 갖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 비정규 교수들에 의해 논의, 연구, 개발, 창출된 지식들이 누적, 축적되면서 더욱 고차원의 새로운 지식으로 재창조되거나 실질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사전에 배제된다. 그리하여 말로는 '학습조직' 또는 '조직학습'을 강조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전혀 되지 않아 수많은 자원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한다. 이것은 시간, 돈, 에너지, 열정 등 측면에서 엄청난 사회적 낭비에 다름 아니다.

'지식사회' 이전에 '행복사회'를 위하여

앞에서 우리는 한국의 경제발전 전략이 1960년대부터 'IMF 사태' 무렵까지만 해도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십분 활용, 달러를 많이 벌어 잘 살아보자는 식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IMF 사태' 이후 '신지식인' 담론과 함께 '지식사회' 또는 '지식 기반 경제'야말로 한국이 다시 도약할 수 있는 새 전략이라고 선전되었음을 보았다.

나는 전자가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서 개미 형 담론이라면, 후자는 베짱이 형 담론이라 본다. 개미는 육체적으로 사람과 자연의 모든 생명력을 추출하는 주체를 상징한다면, 베짱이는 정신적으로 그 생명력을 추출하는 주체를 상징한다. 베짱이가 단순히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창의적인 작곡을 하여 음악 디스크(CD)를 만들어 고부가가치 상품을 수출 해 많은 외화를 벌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두 유형 모두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삶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돈벌이 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근본 문제를 지닌다. 원래 경제란 것도, 그 어원인 '경세제민(經世濟民)'이나 '오이코스(oikos=home)'라는 말에서 보듯, 돈벌이가 아니라 '살림살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살림살이 경제의 회복과 창조를 위해 더 많은 논의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한국이 올바른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지식사회'가 아니라 '행복사회'를 핵심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행복사회란 개인의 행복이 사회의 행복이 되고 사회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이 되는 그런 사회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조건만 갖추어지면 행복사회 건설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하나는 '기득권' 체제를 허무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아무리 복잡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 핵심엔 기득권 쟁탈 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면 더 많은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 바로 이것이 사다리꼴의 기득권 체제다. 제 아무리 많은 토론과 대안이 제시된다 한들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이 기득권 쟁탈 체제가 타파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둘째는 사람들이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고유의 개성과 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원탁형'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성 있는 평준화'가 필요하다. 개성 있는 고교 평준화, 개성 있는 대학 평준화, 그리고 개성 있는 직업 평준화가 필요하다. 직업 평준화가 없이는 대학 평준화도 원점으로 회귀한다. 나중에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전망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정규 교수와 비정규 교수 문제도 '개성 있는 교수 평준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대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모두 동일한 교수로서 비슷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물론 경력이나 업적에 따라 일정한 등급 또는 역할 분담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신분상의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출발한 '원탁형' 체제는 온 사회를 변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말을 안 해도 저절로 '지식 기반 경제'는 구축될 것이며, 말을 안 해도 '행복사회'가 다가올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과 사회는 모두 '지속 가능'해진다. 지속가능성 없는 사회는 그것이 지식 사회든 과학기술 사회든 모두 '위험 사회'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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