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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과학-종교의 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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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과학-종교의 현모습"

과학과 종교의 대화 <17·끝> 연재를 마치며

재작년 가을 사이언스북스로부터 과학과 종교라는 주제에 관해 각기 신학자, 과학철학자, 종교학자의 시각에서 편지를 써서 책으로 묶어 내자는 제의를 받은 후, 겨울부터 시작해 작년 여름까지 반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책을 위해 좌담 토론을 하고 글을 다듬던 중에 지난 봄 프레시안의 제의로 연재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다시 반년이 지났다. 과정들 사이에 약간의 간격이 있기는 했지만, 책을 기획하고, 글을 쓰고, 다듬고, 연재를 마치기까지 거의 두 해를 계속 달려온 셈이다. 이제 다시 편지들과 좌담들을 다듬어 책을 내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연재를 마치고나니 일단 큰 고비를 넘은 듯 홀가분하다.

조금은 답답했다. 살짝 다듬기는 했지만 이미 썼던 편지를 그대로 연재한 것이기에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달라진 생각을 끼워 넣을 수도 없었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요즘 세태에 대한 생각을 반영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터넷 언론이라는 매체의 특성 덕분에 얻은 값진 선물, 즉 댓글과 편지로 나타난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역시 약간의 댓글과 짧은 편지로만 응답할 수 있었을 뿐, 연재 중인 편지 자체에는 이를 담을 수가 없었다. 사실 독자들의 반응이 워낙 많고 다양해서 이에 대해 일일이 댓글을 달고 답장을 쓰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필자들의 생각과 시도에 공감을 표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거나 문제점을 따끔하게 지적해 주는 독자들에게서 힘을 얻기도 했지만, 필자들이나 다른 독자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생각을 독백처럼 마냥 풀어놓는 독자들이나 도대체 요즘 같은 형국에 웬 과학과 종교 타령이냐며 질타하는 독자들을 만나면 힘이 빠지기도 했다. 필자들의 생각과 글이 본래 의도했던 소통을 이루어 낼 만큼 다듬어지지 못한 한계도 있었지만, 애초에 소통에 대한 일말의 관심과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은 적지 않게 실망스러웠다.

연재가 끝난 후 몇몇 독자들의 댓글과 편지를 게재하기로 했을 때, 그 많은 글들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엄두도 내지 못하던 필자들을 대신에 프레시안 측에서 몇몇 글을 선정해 주었다(☞관련 기사 : "과학-종교, 한 쪽에 꼭 판돈을 걸어야 하나?")

공교롭게도 게재된 세 편 모두 소통하고자 하는 필자들의 의지에 대해 조언이나 반론을 통해 소통으로 화답해 준 글들이다. 필자들이 이루고자 했던 소통을 좀 더 진전시켜 보려는 프레시안 측의 판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연재를 마치면서 모든 독자들에게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이 세 분의 독자에 대해서는 짧은 답변으로나마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 같다.

필자들이 추상화된 '과학'과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다는 지적에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 분명 그런 과학이나 종교는 없다. 있다면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나 여러 분야로 나뉘게 된 '과학들'과 역시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상이한 신념 체계를 지니게 된 '종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추상화된 개념과 범주로서 '과학'과 '종교'를 말하는 일을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특수성이 반드시 일반성이나 보편성과 상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과학들이 있고 종교들이 있다 해도, 그 과학들 간의 또 종교들 간의 차이를 가로지르는 공통점을 추출하고, 이를 '과학'과 '종교'라는 추상적 개념과 범주로 묶어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가 본질적으로 추상화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한 이런 개념화와 범주화는 사실 불가피하다. 추상화된 논의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독자의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추상화 자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데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들의 논의가 다분히 서구 과학과 서구 그리스도교에 치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들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 지 오래인 '우리'에게 있었다. 서구의 것은 '우리'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의 일부일 뿐이지만, 그것을 빼고 '우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좋든 싫든 서구 과학과 서구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우리'를 제대로 되살피기 위해 한 번쯤 제대로 직면해야 하는 대상이다. 물론 좀 더 잘하려면 '우리'를 구성하는 다른 것들, 예를 들어 동양의 과학들과 종교들에 대해서도 좀 더 다루어야 했겠지만, 이는 능력 밖의 일이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한 번에 모든 측면을 다 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구 과학과 서구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특수성과 범주의 보편성 사이에 있는 과학과 종교의 문제를 통해 '우리'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사례이자 발판이었을 뿐이다.

과학과 종교가 일종의 '문화'라는 지적과 둘 다 '절대화'가 문제이며 중요한 건 '마음'과 '선택'의 문제라는 지적에도 대체로 공감한다. 과학과 종교는 분명 인간이 구축해 온 문화의 주요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문화 속에서 작동하는 온갖 힘들이 과학과 종교에서도 작동하기 마련이다. 종교는 물론 심지어 과학조차도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곤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학 문화를 해부하여 그 이면의 숨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이를 비판하는 일은 필요하며 절실하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한 필자들의 작업도 이러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가 과학을 좌우할 수는 있지만, 과학에는 이데올로기부터 자유로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 과학이 단지 '문화'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문화를 상징과 관련지어 이해한다면 더더욱 과학에는 그러한 문화와는 거리가 먼 부분이 많다. 과학이 비록 방법 면에서 스스로 상징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 이러저러한 문화적 상징 조작에 동원되기도 하지만, 엄밀함의 추구와 검증의 노력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 자체는 상징이나 상징 조작과 별로 상관이 없다. 이 점을 간과하고 과학을 단지 상징과 문화의 일부로만 보면 과학적 방법이 지닌 일정한 가치를 지나치게 상대화하게 되며 결국 과학에 수시로 개입하는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밝혀내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절대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과학적 이론이나 종교적 신념을 절대화하는 것은 분명 문제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 과학적 이론은 발견과 검증을 통해 끊임없이 폐기되고 갱신되며 구축된다. 또 종교적 신념들의 다양성은 자기 신념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그 어떤 종교의 주장도 모두 무너뜨린다. 그러나 여기서도 과학과 종교에서의 절대성 문제를 마구 뒤섞어 버리면 곤란하다. 또 절대성을 문제 삼으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나아가서도 곤란하다. 모든 것이 그저 선택과 마음의 문제라고 보는 입장은 극단적 상대주의의 혐의가 짙다. 물론 우리가 아는 앎이란 우리의 감각과 사고의 능력 안에 갇힌 제한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그러니까 결국 모든 것은 마음먹고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를 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이러한 상대주의는 언뜻 타자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인정이 아니라 무관심 내지 무시다. 본래 상대주의란 권력 관계의 약자와 강자 모두의 절묘한 자기 방어 수단이었다. 서구의 힘 앞에서 비서구는 상대주의를 취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했고, 서구는 상대주의를 통해 제국주의의 과오에 대한 알리바이를 마련하려 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상대주의는 자신과 타자 사이의 거리를 확실하게 고착화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이해조차 시도하지 않은 채 자신 안에 함몰되는 나르시시즘이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를 다루면서 절대화를 경계하는 상대주의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극단적 상대주의는 모든 것을 선택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서로 다른 생각들 사이의 그 어떤 대화도 소통도 불가능해지게 만든다. 상대주의는 사고의 출발점이지 도달점이어서는 안 된다.

적확한 문제제기와 예리한 비판으로 도움을 준 독자들에게도 고마웠지만, 꼼꼼하고 다양한 정보로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준 독자들, 특히 창조론자들과의 토론에 참여했던 경험과 이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비판적 논평을 보내 준 현장 과학자의 편지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우리가 기대한 소통 가능성이 헛된 바람만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그 고마움은 특히 컸다.
▲ "교단과 신학의 차이를 막론하고 급속히 근본주의화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변화가 없다면 한국 개신교에는 미래가 없다." ⓒ뉴시스

▲ "장로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한 후 온갖 발언, 정책에서의 종교적 편향성으로 인해 반감을 키우다가 급기야 불교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일은 한국 개신교에서 반성과 변화란 아직 멀기만 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뉴시스

필자들이 다른 주제들에 비해 창조와 진화 문제를 특히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이 문제가 대개의 개신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면서도 심히 왜곡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한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에게는 개신교를 조롱하는 빌미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개신교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한때 개신교에 깊이 몸담았던 무신론 과학철학자로서, 또 개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갖는 종교학자로서, 필자들은 그리스도교 진영 내에서 진화와 창조 문제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이 공존해 온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로써 창조 과학과 지적설계론이 창조와 진화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믿는 근본주의적 견해가 한국 개신교계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문제 삼고자 했으며, 또 '개독교'라는 별명과 더불어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지나치게 만연하고 있는 상황도 문제 삼고자 했다.

교단과 신학의 차이를 막론하고 급속히 근본주의화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변화가 없다면 한국 개신교에는 미래가 없다. 또 비록 적지 않은 개신교인들이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은 물론 심지어 같은 개신교인들에게조차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개독교'라는 별명으로 개신교인들을 뭉뚱그려 버린 채 이해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포기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해 없는 원초적인 비난만 난무한다면 건전한 비판적 담론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그러한 한 개신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미래가 없다. 개신교가 변화하느냐 마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는 개신교라는 하나의 종교에 대해서조차 건강한 비판적 담론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회라면 전반적인 종교 문화에 대해서는 물론 나아가 그 사회 자체에 대해서도 건강한 비판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들이 창조와 진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 것은 이러한 건강한 비판적 담론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었다.

편지 주고받기를 막 끝내고 난 얼마 후인 작년 7월 개신교 선교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희생자가 생기고 국고가 지출되는 큰 대가를 치른 후 귀국한 선교단원들이 국민 앞에 사과하면서 일단 사태는 마무리되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끝난 것도 달라진 것도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아 왔다. 개신교계에서 잘못된 선교 방식을 문제 삼는 반성의 움직임이 약간 일기는 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고, 많은 개신교인들은 반성은커녕 순교의 사명을 더욱 미화하고 부추기면서 왜곡된 국내외 선교 행태를 계속 강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 여름 개신교 보수 연합 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역사적 예수에 관련된 서울방송(SBS)의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단지 신학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방송 중단을 촉구하는 압력을 행사한 일이나, 장로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한 후 온갖 발언, 인선, 정책에서의 종교적 편향성으로 인해 반감을 키우다가 급기야 불교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일은 한국 개신교에서 반성과 변화란 아직 멀기만 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사회 전반에서 건강한 비판적 담론보다 이해 없는 원초적 비난이 더 무성한 현실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롯해 특정 종교의 신자에서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자들이 쓴 종교 비판 서적들이 쏟아져 나온 일이나, <PD수첩>과 <뉴스 후> 같은 방송 프로그램들이 굴지의 거대 종교들에 관련된 고질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룬 일은 우리 사회에서 종교에 관한 건강한 비판적 담론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런 책들과 방송들에도 일정한 한계는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단순한 일시적 유행에 그치거나 말초적 비난만 자극하는 데 그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적어도 지난 한해는 우리 사회에서 종교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건강한 비판적 담론이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때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해와 비판보다는 몰이해와 비난이 더 많아 보인다.

신학자, 과학철학자, 종교학자로서 우리 세 필자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했지만, 우리가 과학과 종교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고 이를 연재하면서 품었던 바람은 같았다. 과학이든 종교든, 또 과학과 종교든, 누구나의 관심을 끌 만한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었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면서 우리의 논의에 귀를 기울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품었던 것은 과학과 종교에 관한 우리의 논의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비판적 담론이 구축되는 작은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이로써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의 통로가 마련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연재는 끝났지만,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더 많고 진지한 논의들 속에서 우리의 바람이 조금 더 구체화되고 현실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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