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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생존자들과 실미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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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생존자들과 실미도 가다

[르포] "국가의 배신이 훈련병 봉기 야기"

30여년 전 실미도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영화 ‘실미도’의 폭발적 흥행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68년 4월부터 71년 8월까지 실미도에서 일어난 이야기의 진상규명은 아직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은 이에 16일 30여년 간 은폐된 진실에 한 발짝 더 접근하고자 실미도 생존자들과 함께 실미도를 방문했다.

<사진 1,2,3,4,5>

***영화 '실미도'성공, 실미도에 관심 불러 일으켜**

16일 오전 잠진포 선착장에서 실미도 생존자 다섯 분을 만나기로 했다. 그들과의 동행이 성사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영화 ‘실미도’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세인들의 관심이 영화의 실제모델인 실미도 생존자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훈련 묘사와 극한 감정 대립 그리고 인간 내면의 갈등을 잘 표현한 영화 ‘실미도’는 단순히 흥행 성공을 넘어, 묻혀진 진실에 대한 강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각자 생업에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생존자들은 세인들의 관심이 진실 규명에 다가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고맙고 기대감도 들지만, 한편으로 지나친 관심이 한 때의 유행이 아닐까 불안하기도 한듯 싶었다. 생존자들은 이같은 '이중적 감정' 때문에 언론들의 부단한 접촉 요구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실미도는 생각보다 서울에서 가까운 섬이다. 과거엔 무의도에서 인천으로 배를 타고 이동했지만, 인천국제공항이 생기면서 육로로 실미도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서울-영종도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인천국제공항을 지나 10여분 차로 더 가면 잠진포 선착장에 이른다. 잠진포에서 무의도까지는 배로 5분 남짓, 실미도는 무의도에서 썰물때 도보로 건너갈 수 있다.

오전 11시경 잠진포 선착장에서 실미도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몇 분은 이미 언론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분이지만, 오늘 처음 대열에 합류한 분들도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짧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오십이 훌쩍 넘은 그들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가슴깊이 묻어둔 채 평범한 중년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에서 배우 허준호씨가 열연한 조중사 역의 실제 모델인, 인자한 표정의 김방일(60세, 실미전우회 회장)씨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예전엔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도 못할 정도로 살기 가득한 눈을 가졌었어요.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부터는 군생활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 때의 살육 현장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때부터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가능한 한 성질을 부리기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했고, 착한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인자하게 보인다면, 아마도 그런 노력탓이 아닐까 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말의 행간에 숨어있는 그간의 김방일씨의 고뇌와 고통을 엿볼 수 있었다. 말과 말사이 유난히 긴 공백은 ‘속죄’, ‘착한 마음’이란 표현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케 했다.

<사진6>

***실미전우회, "세상에 알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 "**

오전 11시30분 쯤 무룡호가 잠진포 선착장에 도착했다. 생존자들과 함께 추운 날씨로 언 몸을 녹이기 위해 훌쩍이던 커피를 다 마시고 배에 올랐다. 잠진포에서 무의도까지 5분 거리. 섬을 돌자 이윽고 안개 속으로 어렴풋이 실미도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생존자들은 뱃머리에 나란히 서서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감회에 젖은 모습이다. 실미도 부대 창설 멤버인 김양구씨(60, 실미전우회 사무국장, 68년4월에서 7월까지 실미도 소대장으로 근무)에게 실미도를 다시 찾은 감회를 조심스레 물어봤다.

“영화 ‘실미도’가 대박을 터트리고 나서, 저희들에게 취재 의뢰가 참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실미도를 일주일에 한번 정도 기자분들과 옵니다. 세상에 좀더 알려져 진상 규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하지만 올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아니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솔직한 저의 마음입니다. 30년간 가장 친한 중학교 동창에게도 말하지 않을 정도로 가슴 깊이 묻어둔 이 곳 생활을 다시 끄집어 내야하는 고통이 어떤 건지 겪어보지 않으면 누구도 모를 겁니다.”

'오고 싶지 않으면서도 오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기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실미도에서 기간병으로 근무했던 김정현씨(58세, 대전 거주)도 그러했다.

“올 때마다 새롭지만, 이제는 더 이상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세상에 더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미도를 방문한 날 밤은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괴롭습니다. 너무 힘들때면 ‘묻어버린 지난 기억을 왜 지금 와서 다시 꺼내야 하나, 이런다고 정부가 나서 진상규명에 나서기는 할까’며 반문하기도 합니다.”

오전 11시40분. 물이 빠지기는 이른 시각이었다. 실미도에 오느라 아침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다는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무의도 선착장 근처에 있는 횟집에 들어갔다. 횟집을 운영하는 김선만(49)씨는 무의도 토박이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실미도 사건을 목격했다는 그는 생존자 분들과도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생존자 분들이 가게 문을 들어가자 김선만씨는 김양구씨를 보고 아는 채를 했다.

“혹시 강소위 님 아니십니까?, 강소희 노래 ‘차라리 남이라면’을 즐겨부르던...”

실미도 부대는 훈령병을 교육하는 소대장과 교관들은 모두 실명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김양구씨도 그런 경우다. 김양구씨는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당시에 가끔 휴일에 있던 기간병과 훈령병이 함께하는 오락시간에 가수 강소희 노래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강소위'와 '강소희'라는 유사한 발음 때문에 김선만씨는 김양구씨를 기억하고 있노라고 했다.

지역 특산물인 생굴로 만든 ‘굴밥’을 먹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실미도 얘기가 단속적으로 들린다. 김양구씨는 일요일이면 연병장 앞 바다에서 망둥어 낚시와 굴 잡이를 했다고 한다.

“일요일 산악 구보를 마치면 자유시간이 주어졌어요. 전 반찬거리도 만들 겸해서 자주 연병장 앞바다에서 낚시를 했습니다. 그 땐 어찌나 망둥이들이 많던지...그물로 한 번 긁으면 손쉽게 망둥이 여러 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물이 빠졌을 땐 굴을 캐는 것도 솔솔한 재미였습니다. 바다 냄새 가득한 굴을 잡아서 부대원들과 먹는 건 힘든 훈련 와중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굴밥을 맛있게 먹고 나오자 물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무의도에서 보이는 실미도는 고즈넉한 느낌이다. 나무로 덮힌 실미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피비린내가 나는 살육의 현장이란 느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서해에 떠있는 수많은 다른 섬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가슴 깊이 묻고 일상을 사는 것처럼 실미도 역시 지난 피비린내 나는 기억을 깊게 숨긴 듯 평범해 보인다.

<사진 7>

오후 2시30분. 이내 길이 열리고 일행은 실미도로 들어갔다. 막사가 있던 장소로 걸어가면서 그 당시의 기억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의문투성이인 실미도 부대. 먼저 부대가 만들어진 배경을 당시 훈련교관이었던 김성진씨(58세, 서울 거주)에게 물었다.

“68년 1.21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전국적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기 위해 남파되었다는 김신조의 기자회견은 모든 사람들을 공포와 분노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서울에선 반공 궐기대회와 김일성 화형식이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씨가 북한에 보복하고자 북한의 1.21부대와 같은 숫자인 31명으로 구성된 실미도 북파 부대를 만들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의 지휘 감독아래 공군이 훈련을 맡아 68년 4월에 이 곳 실미도에 부대가 만들어 졌습니다.”

“부대에 배치된 기간병이나 훈련병들 모두 북한에 대한 보복심과 적개심으로 가득찼습니다. 모두들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영웅된 자세로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가혹한 훈련도 무난히 교육할 수 있었습니다.”

***훈련병, 중죄인이 아닌 잡범 중심, 민간인도 섞여 있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훈련병들이 모두 무기수나 살인범과 같은 사형수가 아니었다고 김성진씨는 말했다. 실제로 여러 조사에 의하면 다수 훈련병들은 날치기, 사기, 미군부대 담치기 등 잡범 수준의 범법자로 사회 밑바닥에서 힘겹게 삶을 꾸리던 이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사실 제가 이리로 배치 받을 때만해도 이 부대가 어떤 성격의 부대인지 몰랐습니다. 일단 와서 보니 김일성 살해를 목표로 하는 특작부대 훈련소인지 알았습니다. 훈련병들도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쪽으로 왔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모두들 근거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사형수나 무기수 같은 중죄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날치기나, 소매치기, 담치기 등과 같은 가벼운 범법을 저지르긴 했지만, 범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민간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 합니다. 이들이 이곳에 온 배경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전 성공 이후에 충분한 보상과 신분 보장 약속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다 거짓이었지만 말입니다...”

<사진 8>

10여분을 걷고나서 이윽고 부대 막사와 훈련이 이루어지던 유격장에 도착했다. 나무가 무성히 자라서 그 때 그모습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막사 터나 우물터, 그리고 화장실 등의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언덕을 넘느라 숨이 차 보이는 김성진씨로부터 어떠한 훈련들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다.

***무리한 훈련이 사고 불러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산악구보를 했습니다. 지금은 나무가 있지만, 그 때는 나무가 한그루도 없어서 이 산, 저 산 뛰어다닐 수 있었습니다. 섬 끝에서 끝까지 2.1㎞ 정도 됩니다. 10번 정도 쉼없이 뛰는 산악 구보가 끝나면 아침 식사를 합니다. 훈련 계획에 따라서 이동 표적을 맞추는 신사격훈련, 장애물 통과 훈련, 산악 외줄타기 훈련, 독도법 등을 번갈아 교육했습니다. 좀더 빨리 뛰게 하기 위해서 달리는 훈련병 뒤에서 총을 쏘아 대기도 했습니다. 3개월 정도 지나니깐 모두 사격 도사, 달리기 도사가 되더군요”

“외줄타기를 처음 하는 날, 사고가 있었습니다. 교관인 제가 세 번 시범을 보였는데, 교육대장님이 곧장 훈령병에게 외줄을 타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전 무리라고 말씀드렸지만, 훈련대장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최초로 외줄에 올라간 훈련병이 3분의 1쯤 탔을 때 땅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습니다. 그 훈련병은 긴급 치료를 받고, 식당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훈련은 짧은 시간에 높은 효과를 내기 위해서 무리하게 진행된 것은 사실입니다.”

훈련과정을 듣다보니 기간병과 훈련병과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런 가혹한 훈련을 시키다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간 충돌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3년간 서로 같이 생사고락을 했기에 깊은 속정을 나눌 기회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에 대해서 소대장이었던 김방일씨와 사병이었던 김정현씨(58세, 대전거주)가 말했다.

“갈등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반 군대의 훈련병과 교관의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에서는 훈련병들은 묵묵히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혹하게 훈련을 시킨 것도 그들이 북한에 침투되어 살아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훈련은 가혹했지만, 그건 서로를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숙식을 함께 했지만, 솔직히 속정을 나눌 시간은 없었습니다. 일단 훈련을 마치면 모두들 잘 수밖에 없었고, 교관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김방일 씨)

“근무를 나갈 땐 기간병 2명과 훈련병 1명이 한 조로 나갔습니다. 실탄은 저희 기간병에게만 지급되었습니다. 순찰을 돌다 외진 곳에 가면 왠지 겁이 났습니다. ‘이들이 혹시라도 날 해하고 달아나지 않을까’ 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다행히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적과의 동침’이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김정현 씨)

실미도 부대는 당초 68년 8월이 작전 개시를 목표로 창설되었다. 하지만 남북 화해 무드가 형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이후락으로 교체되자 실미도의 생활도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실미도부대의 필요성이 재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분위기를 김방일씨가 전한다.

“처음 훈련병들에게는 급료나 부식 등 면에서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당시 육군 병장 월급이 4백원 정도 였는데, 훈련병에게는 4천1백원이 지급되었습니다. 사관후보생 월급과 맞먹는 월급이었죠. 이틀에 한 번 꼴로 돼지고기가 충분히 제공되었습니다. 또 일반 군대에서는 화랑담배가 지급되었는데, 여기서는 당시 최고급인 신탄진 담배가 한달에 15갑이 지급되었습니다. 하지만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나서는 모든 것이 1백80도 바뀌었습니다. 난방용 연료인 기름은 더 이상 지급되지 않아, 나무로 땔감을 대신했고, 밥도 보리밥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식은 형편없어졌습니다. 훈련은 당연히 더 루즈해 질 수밖에 없었고, 사기도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훈련병 봉기, 국가의 배신이 불러와"**

실미도는 68년 후반부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권의 필요성으로 만들어진 부대는 다시 정권의 필요성으로 버려진 것이다. 이들은 이를 ‘국가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국가의 배신’은 훈련병들에게 분노로 다가왔고, 나아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연결되었다고 생존자는 전한다.

“그날(71년8월23일) 사건이 일어난 것도 정부의 무대책 때문입니다. 작전상 필요가 없어졌다면 좀더 일찍 부대를 해체시키고, 적절한 처우를 해 주어야 마땅했습니다. 부대는 만들어 놓고, 아무런 지침도 없이 소외감만 주었기 때문에 훈련병들은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국가가 배신’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는 당초 정권의 보상과 신분 보장 약속도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교관들은 그들에게 '제대하면 장교로 진급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책임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김방일씨)

“훈련의 목적이 불투명해지면서, 훈련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훈련을 시키는 제 입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군기가 빠지는 것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일정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김성진씨)

약식 위령제를 지내고, 71년 8월 23일 사건이 발생한 지점으로 갔다. 당시 총격전에서 살아 남은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설명해주었다.

“자고 있는데 옆 막사에서 총성이 들렸습니다. 그 때 ‘올 것이 왔구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습니다. 반사적으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었습니다. 산을 올라 큰 바위 뒤에 숨었습니다. 총성과 비명소리가 한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 총을 미처 가져오지 못해서, 혹시라도 훈련병들이 저를 발견하면 대비할 생각으로 돌멩이를 손에 쥐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3시간 정도 지났을까 소리가 잠잠해져 나와보니 이미 훈련병들은 섬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제가 살아남은 것은 아마도 훈련병들이 기간병들에게 특별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샅샅히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김정현씨)

“배가 아파서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죽을 쒀 먹을 요량으로 식당에 갔습니다. 6시쯤 총성이 났습니다. 난동을 직감하고 산 깊숙이 도망쳤습니다.”(안지근씨)

“지금은 제 아내가 된 약혼자 덕택에 살았습니다. 출장 차 교육대장님이랑 뭍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약혼녀의 친척이 절 보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교육대장님의 허락을 받고 배에서 내린 것이 생사의 갈림길이 되고 말았습니다.”(김방일씨)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왔다가 살았고, 어떤 사람은 매트리스 뒤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 중에는 총 6명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8명은 모두 사살되었습니다”(김정현씨)

***전우회, 진상규명, 위령탑 건립 마지막소원**

몸을 숨겼던 장소를 한 번씩 돌아보고 나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잠진도로 가는 마지막 배가 오후 5시30분. 남은 이야기는 돌아가는 배안에서 하기로 하고 걸어서 무의도로 갔다. 무의도로 걸어가면서 생존자 분들은 부탁 어조로 이런 얘기들을 했다.

“나도 이제 곧 환갑입니다. 인생 다 된거죠. 죽기 전에 실미도에 있었던 사건들이 진상규명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조금은 마음 편히 이세상을 떠나죠”

“그 때 죽은 사람들이 세상에 실미도의 진실을 알려주라고 저를 살려준 것 같습니다. 남은 인생 그 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쓸 생각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올해 안으로 위령탑을 세울 생각입니다.”

“그 때 죽은 기간병들은 국립현충원에 유공자로 안장되었습니다. 하지만 훈련병들은 아무런 보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연고도, 유족도 없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나서서 조사하지 못하면 영영 보상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 빨리 정부가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고, 대책을 세우길 바랍니다.”

“생존자 중 대다수가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충격이 가슴 깊이 남아 사회생활을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불안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단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치겠다는 일념하나로 힘든 고생을 묵묵히 견뎌온 사람들에게 국가가 너무 무심합니다.”

헤어질 즈음해서 생존자들은 연이어 가슴속에 있는 이야기를, 아니 불만을 터트렸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들 주장들은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여태 정부는 묵묵부답이라고 한다. 30년동안 묻혀진 진실. 이제 진상규명이 피해자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있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사건. 동시대인으로서 함께 감내해야 하는 시대의 고통임은 분명하다.

***들을 수 없었던 훈련병의 이야기**

늦은 저녁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상념에 잠겼다. 취재를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훈련병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24명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기간병을 통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진실의 한 축을 지니고 있는 훈련병들. 영원히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사람을 잃어버린 그들은 각색되고, 재구성되어 나타날 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실이 ‘왜 이리도 30년도 더 지나서야 밝혀졌나’는 안타까운 의문이다. 이런 의문에 생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제대를 할 때 각서를 여러장 썼다. 군생활 때 있었던 일은 절대로 함구한다는 내용이다. 정말 발설하면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과거 무자비한 국가권력은 지금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엄혹한 현대사 속에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 실미도 부대원이 있다. 영화가 국민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대성공한 것처럼, 실제 사건의 진상도 정부의 적극적 사고전환을 통해 조속히 규명되길 바란다. 이제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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